[벼리2] 인권 없는 자들의 환상도시

김민혜정
print
한 신인여배우의 죽음은 그녀가 남긴 문건으로 인해 ‘성상납’이라는 문제를 드러냈다. 그녀에게 ‘성상납’을 받은 사람들이 과연 누구냐?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모였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이 어디까지 조사할 수 있는지도 귀추가 주목된다. 모두들 그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정당하게 드러나고 풀어져 본 적 없는 문제이기에, 권력의 지형도가 드러나는 것, 성상납 ‘향유자’들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싸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상납’만이 문제일까? 그것이 관행이었다는 점은 여배우를 둘러싸고 일상적으로 작동되는 구조가 있음을 알게 한다. 거론되고 있는 리스트의 주인공들은 그녀들의 일상과 생업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드라마를 만드는 감독, 제작비를 대는 광고주, 기사를 만드는 언론인. 그 사이에 있는 매니지먼트사는 여배우와 여자 가수의 외모부터 사생활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관리 생산하여 상품으로 내놓는 유통알선자이다. 이번 사건에 많은 의견을 쓰고 있는 대중, 네티즌들은 희생된 여배우의 편에서 정의를 추구하고 있는 것 같지만, 평소에 이들은 드라마와 기사를 하루에 수회 클릭하고 즐겨보는, 배우와 가수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연예산업의 냉철한 소비자들이다.

‘성상납’이 특별한가

여자연예인들의 ‘성상납’ 문제는 검은 커넥션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 혹은 분노를 낳고 있지만, 어찌 보면 ‘성상납’은 특별하고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근처에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여자배우나 여자가수들의 존재감, 역할 자체는 이미 성적으로 어필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한국사회의 연예계는 가부장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 섹슈얼리티를 다른 재능이나 능력에 앞서 기본요소로 삼고 있고, 요구하는 강도도 매우 높다. 어려야 하고 웃어야 하고 말라야 하면서 풍만해야 하고, 섹시하면서도 청순할 것. 이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여자배우나 가수로서 데뷔하기 어렵거나 일을 지속하기 어렵고 경쟁에서 살아남기는 더욱 어렵다. 유명 남자배우가 몇 년간 최고 개런티의 탑 배우를 유지하면서 작품 경력을 쌓아가는 반면, 그에게 배당되는 파트너 역할은 점점 더 나이어린 여자배우로 교체되고 있음을 분석한 자료도 있다.

공백 기간에 끊임없이 성형을 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성형미인을 비난하는 시선은 많으나, 그 이면에는 여성들을 줄 세우고 그것을 예의라고 일컫는 철저한 외모지상주의가 공고히 있다. 성적으로 어필하는 여자가수, 청순가련한 여자배우, 여성성을 이탈하거나 비하함으로써 마음껏 웃게 만들어주는 개그우먼까지. 남성의 시선에서 구성된 여성 섹슈얼리티와 성적 판타지의 영역 밖에서 대중의 인기를 모으고 성공하는 여성연예인을 보기란 쉽지 않다. 고 장자연 씨를 보면서, 더 이상 섹시하라는 컨셉이 너무 버겁다는 말을 남기고 몇 년 전 자살한 여자가수가 떠오른 이유는 그 때문이다.

드라마의 안팎을 지배하는 남성권력

이들이 하게 되는 연기나 부르는 노래 역시, 가부장적인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남녀의 역할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고 유형화되어 있다. 해피엔딩은 이탈했던 남자가 남자다운 역할을 회복하고, 이탈했던 여성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 행복해지고, 가족주의가 제 힘을 회복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청순가련한 어린 여배우는 여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돈 많은 남성과 짝을 이뤄 결혼한다는 최고의 보상을 받고, 섹스어필하는 여배우는 다른 여자를 음해하고 남성을 집어삼키며 평온한 가족을 해하는 악녀로 등장하여 팜므파탈에 대한 가부장들의 응징을 당하고 결국 파멸에 이른다. 이삼십대를 지난 여자배우가 맡게 되는 역할은 주인공의 이모나, 엄마, 시어머니 혹은 동네사람. 이들은 자기 삶이 없이 아들과 집안을 위해 헌신하거나 아들을 위해 노상 며느리를 탄압하고 비혼모, 이혼여성을 편견어린 시선으로 비난하고 이간질하는 역을 연기한다. 여성연기자들은 이런 걸 연기하며 분열 혹은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까. 어떤 여배우는 “반대 좀 그만하고 싶어, 내가 봐도 재수없는 걸”이라고, 또 다른 여배우는 “연기 헛헛증이 든다”라고 표현했다.

누가 이런 드라마를 만들어낼까. 누가 이런 노래들을 부르게 할까. 누가 우리 삶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동떨어져야 마땅한 메시지를 계속 찍어낼까? 노래나 드라마, 영화가 생산하는 여성의 이미지, 여성의 성역할, 외모에 대한 보상과 처벌, 가족에 대한 의무, 모성에 대한 강요는 연예산업을 가부장 권력들이 이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주말 SBS스페셜로 방영된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것’에서 한 배우는 “우리나라에서 도장 찍고 결재하는 사람들이 다 누굽니까. 제작자, 광고주 모두 남자들인데 여자들이 원톱 투톱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만들려고 할까요?”라고 반문했다.

여자들의 삶, 여배우들의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관심 가질 필요도 없는 남성들이 돈과 권력,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잘 나가는 한 남자배우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그러고 보니” 동기여자배우들이 잘 안 보인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남성판타지를 자극하는 영화들로 흥행해 온 강우석 감독은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에는 우연하게도 여자들 얘기가 없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가부장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남성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 섹슈얼리티의 전형을 만들고 이를 유포하며, 여성 섹슈얼리티를 향유하고 소비함으로써 남성 권력을 확인한다.

가부장들이 만들고 통제하는 여배우의 일상

여자배우들과 가수들이 온몸으로 입고 부르고 연기하게 되는 가부장제의 메시지는, 다름 아닌 여성연예인들의 일상까지 일거수일투족 겨누고 있다. 여자연예인들의 일상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것은 중간유통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매니지먼트사뿐만이 아니다. 권력자들이 생산하는 문화 컨텐츠를 소비하고 이를 학습한 대중들은 수십만의 눈이 되어 그녀들을 쫓고 실시간으로 검색하고 감시한다. 영화 속에서 흡연 연기를 한 그 여배우가 실제로도 흡연자인 건 아닌지, 청순가련의 그 여가수는 10대 시절 좀 놀던 날나리가 아닌지, 모유 수유하는 귀한 모성은 기특한데 몸매는 잘 유지하고 있는 건지…….

이 여성 섹슈얼리티에서 이탈되는 사람들은 가혹하게 심판되고, 퇴출된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개그우먼이 지방흡입시술을 받은 바 있다고 퇴출되었고, 점점 체중이 늘어났다는 이유로 한 여자아나운서는 시사프로그램 메인 진행에서 중도 탈락했으며, 가정폭력의 피해자임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유명여배우는 광고주로부터 손해배상소송을 당했고, 섹스비디오를 유출하고 클릭한 수십만 명을 뒤로 하고 여자가수는 홀로 브라운관에서 사라졌다. 누가 레즈비언임을 커밍아웃하고, 호주제에 반대한다며 양부모 성을 공개적으로 쓰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직업군에 속한 여자배우, 가수들이 인권침해를 당해도 도움 받을 길이 거의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동어반복이다. 주변인에게 이야기할 수도, 외부 기관에 도움을 받을 수도, 언론에서 다뤄지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법적인 구제수단을 찾거나 집단적으로 투쟁을 해보는 것도 이들에게는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동료들끼리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하고 위로와 지지를 얻는, 굳이 인권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될 기본적인 권리 혹은 삶의 수단도 이들에게는 없는 것 같다.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더 큰 권력을 찾아 다른 매니지먼트사로 옮기거나 결혼하거나, 소송·고발을 해서 사실상 업계에서 퇴출되고 개인적으로 피 말리는 후유증을 얻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목숨을 끊는다는 선택지.

그 일이 그녀들에게 ‘생업’이라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부분이다. 화려해보이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대기상태에서 선택되기를 기다리며 보내는 비정규직.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이들은 이런 구조에 대항하기를 포기하고, 개인적으로 겪고 참고 침묵해야 한다. 고혹할 만하고 우아한 자태로 “여자라서 행복해요”라는 대사를 읊어야 했던 이들이 치외법권의 사각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톱스타 여배우의 아슬아슬한 살아남기와 신인여배우의 죽음은 근소한 차이를 두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기

대학원생에 대한 교수의 성희롱, 여성 스포츠 선수에 대한 감독의 폭력, 여군에 대한 상사의 스토킹. 이 가해자들은 모두 “싫으면 하지 말든지”라고 간단히 말해왔다. 여자 학자, 여자 정치인, 여자 스포츠 선수, 여자 군인……. 이들은 여전히 예외적인 존재이고 ‘여성상위시대’를 빌어 침입한 외부인이며, 누가 뭐래도 근본은 ‘여자’인 자들이다. 그토록 어려운 관문을 스스로 뚫고 들어온 사람이 스스로 짊어져야 할 도전. 스스로 원해서 택한 일이니 그런 어려움 정도는 이미 각오되어야 마땅한 것. 이들에 대한 차별, 비난, 배제, 폭력은 그렇게 쉽게 정당화됐다.

이들이 선택한 일을 포기시키는 ‘보호주의’에 반대한다. 여배우들의 섹슈얼리티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시선과 연결된 ‘성상납 비난’ 여론에도 마냥 맞장구칠 수 없다. ‘성상납’의 고리가 낱낱이 드러나면 좋겠지만, 그것은 그녀들의 생존권, 행복추구권, 노동권을 바로잡기 위해서 그렇다.

이번 사건이 드러낸 문제는 드라마나 노래를 만들어지고 유통 소비되는 구조 구석구석에 빼곡히 들어차 있으며 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언제쯤 빛나는 여자배우들이 다양한 삶을,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연기할 수 있을까. 언제쯤 스스로 표현하고 싶은 바를 스스로 제작하고 유통할 수 있으며,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와 일상의 신념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하고 연대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여자배우’ 자리에 여성들의 모든 이름을 넣어서도 이 문장이 흔쾌한 답을 얻게 될 때쯤. 그 때쯤일까.

덧붙이는 글
김민혜정 님은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145 호 [기사입력] 2009년 03월 25일 18:59:35
뒤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