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날다] 머리와 가슴을 맞대어 한 뼘 더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 인권교육

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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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은 모든 사람의 참여를 지향한다. 그 참여는 ‘문자’에 상당히 의존한다. “각자 불리고 싶은 별명을 써 보세요.”, “내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적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어떤 차별을 당했을까를 생각해서 적어보는 거예요.”, “각자 주어진 상황극을 읽고 쓰세요.”, 적으세요, 읽으세요... 그러면서 한편 “꼭 글로 쓰셔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림으로 표현하셔도 되요.”라는 상상력을 주문하는 무거운 센스까지.

물론 글이나 문자는 정보를 전달하고 기록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인권교육에서 만나게 되는 결혼이주여성, 이주노동자 등 우리가 사용하는 글이 낯선 참여자들이나 글로 표현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아동이나 어르신(어찌 표현해야하나?)들과 함께 할 때, 글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고 훨씬 더 풍부한 인권적 감성으로 만날 수 있는 방법 또한 필요하다. 각자의 기억을 호출하여 자세히 뜯어보고 함께 상황을 재구성하면서 인권의 싹을 틔울 수 있을까?

날개달기



푸른시민연대의 ‘어머니 교실’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사회경제적 상황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교육혜택을 받지 못했던 여성들이다. 60세를 전후하거나 훌쩍 넘긴 여성분들로 구성된 ‘어머니 교실’에서는 한글교육과 인문학 강좌가 진행되고 있는데, 짧은 시간이나마 인권을 맛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교육에서는 가부장적 사회와 가정 내에서 ‘주부/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지워진 나의 권리를 찾아보고, 가정 내에서 많이 발생하는 갈등 상황에서 당연하게 희생되어온 권리들을 복원하는 상황극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더불어 날개짓 1

나의 인권을 찾기 위해서는 그 ‘인권’이 어떤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인권의 항목들을 알아보기 위해 우선 지금 내게 가장 절실한 권리를 음식에 빗대어 ‘인권의 밥상’을 차려보기로 했다. 이런저런 인권들이 있다 해도 그것이 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체감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림의 떡’에 불과할 뿐, 생활 속에 살아 숨 쉬지 못한다. 그래서 참여자들이 발견한 나의 권리가 인권항목과 어떻게 만나는지 찾아가는 것이다.

참여자들은 요리를 그리고 거기에 나의 권리를 표현해보자는 주문에 처음엔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데......”라며 난감해 했지만 그것도 잠시, 쓱쓱 이런저런 요리들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참가자들이 나에게 필요한 권리들을 표현하는 동안 진행자는 여러 인권의 항목들을 칠판에 붙여두었다.

- 아침에는 꼭 밥을 먹는다. 그것이 나는 좋다. 나는 오이를 좋아한다. 매일 먹으니 좋다.
- 아침에 바나나를 먹는다. 바나나는 다이어트에 좋다고 해서.
- 나는 어디서든 사인이나 은행에 가서 글을 내 마음대로 쓸 줄 알았으면 좋겠다.
- 나는 목표가 집장만. 큰 것을. 나는 공부를 하고 싶다.
- 나는 가정에서 벗어나서 여행을 가고 싶다. 내 마음껏 공부하고 싶다. 건강하고 싶다. 살을 빼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 나는 평상시 여행을 참 좋아해서 나의 권리는 내 마음대로 가고 싶은 데를 가고 싶다.


완성된 요리(권리)는 해당하는 권리항목 아래 모여 진수성찬이 되었다. 사람들이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교육을 받을 권리, 휴식과 여가의 권리. 이러한 우리들이 생활 속에 필요로 하는 권리들이 다름 아닌 인권임을 확인하며 참가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아가 인권의 밥상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는 다른 요리(권리)들도 맛보았다.

더불어 날개짓 2

그렇다면 이러한 권리들은 삶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거나 혹은 침해되고 있을까? 이는 상황극으로 재현해보기로 했다. 참여자들인 5,60대 여성들이 자주 직면할 수 있는 상황들을 설명하고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만들어 보았다.

# 연애
약수터에서 만난 최 씨와 자식들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 연애감정을 갖게 된 미숙 씨. 살짝 들뜨는 마음에 데이트 신청을 해볼까 싶지만 마을 사람들의 시선과 자식들이 눈치 보여 고민 중.


연애 문제에 있어서 참여자들은 모두 쿨~했다. 미숙 씨의 연애를 적극 밀어주며 “나이 들어도 연애할 수 있지”라며 최 씨를 만나는 약수터 산책길에 양산까지 들려주었다. 이 상황에서 미숙 씨는 무엇보다 동네 사람들의 “나이 들어서 웬일이야~”하는 수근거림과 정숙한 어머니로 남아주길 바라는 자식들의 기대가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숙 씨는 누군가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여성이기도 하다. 나이가 적든 많든 한 사람으로서 가지는 자연스러운 감정에 대해 참여자들은 우리 사회가 보내는 불편한 시선을 거두고 산뜻한 지지를 보냈다.

# 가족
결혼 후 가족이외의 친구들과의 여행을 모르고 살아 온 경자 씨. 친구들이 3박 4일 온천 여행을 가자고 해 가족들에게 말하니, 3박 4일은 너무 길고 1박이 좋겠다면서도 떨떠름한 남편, 경자 씨가 여행을 간 동안 집안일은 며느리가 모두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마음이 편치 않다.


가족의 상황은 참여자들에게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상황극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각자의 경험이 풍부하게 드러났다. “난 갔다 오면서 남편이 좋아하는 걸 사와. 그래서 오자마자 남편이 뭐라고 하기 전에 ‘잠깐 옷 좀 갈아입고’ 그러고선 부엌으로 가서 사 온 술과 안주로 술상을 차려줘. 그럼 아무소리 못해.”, “나는 멀 사다줘도 남편이 화를 내. 그러면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한편의 대안(?)극을 만들었다. “갈 때는 남편이 1박만 하라고 했으니까 그런다고 가는 거야. 그러고는 거기 가서 전화하는 거야. 차 없어서 못 간다고...” 갈등을 남겨둔 채 여행을 강행하거나 선물로 무마했던 상황에 대한 소심한 복수에 모두 신이 났다.

# 교육
어려운 형편과 동생들 뒷바라지에 학교를 다니지 못한 옥순 씨. 어느덧 자식들도 다 컸고 살림에도 여유가 생겨 평생교육원이나 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한글교실, 노래교실에 가 글도 배우고 친구도 사귀고 싶다. 옥순 씨의 부재를 염려하며 가족을 먼저 생각하라는 가족들과 이제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고 싶은 마음 사이.


위의 여행의 사례와 비슷한 가족갈등이 발생하지만 하루 중 일정시간을 비우는 교육문제에 있어서는 조금 관대했다. “배우는 건 좋은데 집안일은 누가 하나.” 가족들의 소극적 지지를 받으며 옥순 씨는 한글교실에 나간다. 이러한 현실에서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교육권’은 사라지고 ‘주부/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설득과 대안마련이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 것이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는 우리 사회가 복지나 소수자 문제에 있어 당사자의 권리담론으로 접근한다기보다는 그렇게 했을 때 예상되는 상황만을 문제적으로 지적하는 모습과 닮아있다. 양심적 병역 거부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병역 거부를 인정하면 군대 가는 사람이 줄어들 텐데 그러면 나라는 누가 지키나”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이.


인권교육을 마무리하며 글이나 문자라는 기법보다 더 큰, 인식의 장벽을 다시 확인한다. 상황극 속에서 드러난 가족 내 권력관계에 대한 인식, 경험에 의한 인식. 50해를 넘기며 체득해 온 권력관계와 그로 인한 체념이나 좌절과 같은 벽들이 상황극 곳곳에 묻어났다. ‘그래야 한다는 거지......’라는 말로 압축되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확신에 찬 표정, 그러나 언어화되어 표현되지 않는 냉소는 인권교육을 마무리하는 순간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든다.

다만, 이 시간에 차려진 밥상을 집에서도 한 번 차려볼까 하는 마음이 들게 했기를 바란다. 체념으로 작아진 소수자들이 권리주체로 일어날 수 있게 북돋는 것 또한 인권교육의 목표이므로.
덧붙이는 글
묘랑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 회원입니다.
인권오름 제 162 호 [기사입력] 2009년 07월 22일 12: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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