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유혹] 얇은 책 한 권이 반역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다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를 읽고

조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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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에서 원고청탁을 받고서 무슨 책의 서평을 쓸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최근에 읽은 책이 무엇이었나 골똘히 기억을 더듬어보았습니다. 요즘은 용산참사 현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당연히 제일 먼저 ‘여기 사람이 있다’가 떠올랐어요. 하지만 나까지 이 책에 대해서 서평을 쓸 필요는 없어 보였고요, 다음으로 송경동 시인의 시집 ‘꿀잠’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송경동 시인이 발표한 용산참사 추모시들은 내가 노래로 만들고 있으므로 평론은 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낙지도서관’에 앉아서 서가에 꽂혀 있는 많은 책들을 한 권 한 권 찬찬히 훑어보며 골똘히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바로 다음날 용역깡패들이 쳐들어와 그곳을 때려 부숴버렸기에 무슨 책을 읽을까 하는 행복한 고민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낙지도서관만큼 큰 규모는 아니지만 용산참사 현장 뒤에 있는 카페 ‘레아’에도 조그만 책장이 마련되어 있고, 제법 읽어보고픈 책들이 여러 권 놓여 있습니다. 물어보니 요이라는 친구가 갖다놓은 책들이라는군요. 지난 8월 31일에 서울 대한문 앞에서 용산 유가족들이 삼보일배를 하다가 세종로 파출소 앞에서 16명이 연행된 사건이 일어났는데, 요이도 그날 연행된 사람 중 하나입니다. 레아 카페의 자칭 사장이자 용산을 통털어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 도영을 요이는 바쿠닌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바쿠닌은 유명한 아나키스트인데, 도영이 바쿠닌처럼 생겼다고 그렇게 부른답니다. 요이는 또다른 아나키스트 프루동을 닮아서 저는 혼자 요이를 볼 때마다 프루동을 떠올립니다.

아나키즘에 관심이 있다면

가끔은 사람들이 제게 ‘아나키즘에 관해 흥미가 생겼는데 읽어볼만한 책을 소개해달라’고 부탁을 해오곤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눠본 뒤 몇 권을 추천합니다. 그렇게 추천하는 책 중 하나가 바로 조세현 선생님이 지은 이 책입니다. 이 책은 일단 문고판이라서 두께가 얇고, 내용도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읽기가 편합니다. 서구와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던 중국, 조선, 일본 등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은 서로가 가진 차이와 다양성을 넘어서 어떻게 연대하고 투쟁했을까? 그리고 1920-30년대를 풍미했던 그 역사는 지금 어떤 물줄기로 흐르고 있는가? 동아시아에 아나키스트들이 남아 있다면 현재는 어떻게 만나고 연대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호기심이 생긴다면 일단 이 책을 집어 들어보세요. 사거나 공공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도 좋지만, 용산에 와도 볼 수 있습니다.


1세대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삶, 고민

이 책에서는 주로 1세대의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일본의 고토쿠 슈스이나 오스기 사카에, 중국의 스푸나 리우스페이 그리고 조선의 가네코 후미코나 신채호처럼 나름 유명한 아나키스트들이 나오고 이들이 교류하던 시대적 상황이 그려집니다. 분명히 반역의 생명력이 살아 날뛰던 시대였습니다. 아쉽게도 지금으로선 상상으로만 그려질 뿐이죠. 왜냐하면 1세대 이후 동아시아 아나키즘은 반역과 연대의 정신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요즘 우리들이 외치는 인권이라든가 민주주의 같은 가치들, 즉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평등을 추구하는 시대적 요구들이 당시 1세대 아나키스트들에게는 해방이나 혁명 같은 것들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물론 지금도 해방과 혁명을 외치는 저 같은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당시 많은 동아시아 민중들의 지지와 공감 속에서 대중적 운동의 목표는 분명 일본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과 조선혁명이었을테니까요. 백만 명이 참여한 2008년의 촛불집회 이후 한국사회가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직접행동에 대해 책에서 가르쳐줄 수 없는 소중한 교훈들을 배웠다면,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동아시아의 민중들은 1919년의 3.1 운동과 5.4 운동을 통해 아나키즘 같은 저항운동이 자라날 토양을 다져나갔다지요. 그리고 그 후 10여 년간 동아시아에서는 반역의 역사가 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렇다면 2008년 이후 한국에서는 그런 역사가 반복될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끝난 2009 한국사회포럼에서는 환경운동(녹색), 여성운동(보라색) 그리고 노동운동(적색)이 서로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다고 합니다.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를 읽으면서 저는 녹색, 보라색, 적색이 실제로 만나 소통하고 연대했던 과거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차별적 권력관계에서 생기는 위계질서를 극복해가면서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여러 운동가들이 동아시아에도 있었음을 기억하게 된 것이죠. 성별의 위계, 계급의 위계, 종의 위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본질적으로 경계가 없다는 것을 반역의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반역의 상상력을 복원하는 것일테구요. 그런 상상력은 잊혀지거나 묻혀진 과거의 역사를 현실의 상황에 맞게 재구성해낼 때 폭발적으로 확장되지 않을까 합니다. 얇은 책 한 권이 참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는 법이죠?

덧붙이는 글
조약골은 피자매연대와 행동하는 라디오 ‘언론재개발’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권오름 제 168 호 [기사입력] 2009년 09월 02일 13:5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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