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인(in)걸] 여학생은 성적이 “너무” 우수하다. 도대체 어쩌라고~

한낱
print
한낱 활동가의 자기 고백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시절, 나는 ‘모범적인’ 여학생이었다. 민망하지만, 그랬다. 공부도 곧 잘했고, 반장도 몇 번 해봤다. 선생님들의 예쁨도 꽤 받았다. 학교 안에서 가끔 짜증나는 상황이 발생하긴 했지만, 그건 그냥 그 날 재수가 없어서 그랬던 거였다. 청소년 인권? 그런 거 전혀 몰랐다. 지금의 정신 상태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공부에 매진했다. 그만큼 성과도 있었고, 보상도 받았다. 당시에 내가 성차별을 받았던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학업성적과 임원직 수행으로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뛰어넘은 나는 여느 찌질한 남학생들보다 훨씬 인정받았다.

차라리 객관적인 점수로 평가받았던 그 시절이 여성인 나에게 더 행복한 시간이었던 걸까? 요즘 국방부가 군가산점 부활을 운운하는 걸 보면 처참한 느낌마저 든다. 아무리 졸업성적이 좋아도 '용모준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군필자 우선' 앞에서 고개를 숙여하는 학교 밖보다는 균형 잡힌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건가? 그렇기 때문에 여학생들의 우세가 학교 안에서는 가능한 거고, 여남평등은 학교 안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평할 수 있을까?

조금만 더 내 이야기를 해보자. 어렸을 적 엄마는 내게 “찰흙으로 고추를 만들어 붙여줘야지.” 등등의 농담을 많이 했었다. 내가 그다지 ‘여성스러운’ 외모를 갖추고 태어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엄마는 언니에게는 보이지 않는 다른 종류의 기대감을 내게 품었고, 나는 내가 집에서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는 무게를 어릴 적부터 지고 살았다. 지금도 내가 중학교에 올라갈 때 엄마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엄마가 미안하다. 예쁘게 낳아주지 못해서. 그만큼 너는 공부를 잘해야 돋보일 수 있어. 열심히 해. 엄마가 밀어 줄게.” 엄마의 진솔한 충고는 나의 처절한 인정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변호사든, 기자든 뭔가 똑똑하고 멋져 보이는 직업을 가지려면 공부를 뛰어나게 잘해야 했고, 좋은 대학에 가야만 했다.

물론 이런 경험이 내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탈학교 청소년 활동가는 자퇴를 고민하던 시절 담임교사가 했던 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너 자퇴 해가지고, 어디 시집이나 갈 수 있겠니?” 나의 엄마도, 이 담임교사도 여성인 우리가 맞이하게 될 쓰디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본인들이 여성으로서 살아오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를 나눠 준 것일 수 있다. 비록 그 지혜가 우리가 가진 조건 자체를 성찰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여학생들, 너무 똑똑해서 ‘문제’다?

소 팔아서 장남만 대학 보내던 시절은 이제 지났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여성도 남성과 나란히 취학의 문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의무교육이 되었고, 기회 자체만 본다면 성차가 두드러지지 않는 시점에 온 것 같다. 학업 성취도 평가 분석이나, 특목고 진학률을 보면 여학생들의 학업 수행 능력이 남학생들을 앞질러 가고 있다고 한다. 남학생 학부모들은 내신에 대한 불이익 때문에 남녀공학을 기피하고 있으며, 남고/여고로의 전환 신청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최근까지 일부 학교에서는 ‘남녀 내신 분리 산출’이 관행이기도 했다. 남녀의 뇌구조 차이를 근거로 남녀공학 폐지론을 주장하는 보수논객들도 활개를 친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함을 생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뇌의 크기까지 들먹였던 것이 우생학 아니었던가. 이제는 여성의 생물학적 우수함을 거꾸로 반증하고 있는 셈이니 도리어 반가운 일일 수도 있겠다.

사실 이런 분석들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것 자체가 이들의 논리에 말려드는 꼴이 된다. “그 분석에는 문제가 있어. 여학생들이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야.” “우리 여학생들이 너무 공부를 잘하고 있나? 좀 못하도록 노력해 볼게.” 얼마나 우스꽝스런 답변인가. 왜 여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높은 것은 ‘문제’가 되는 걸까? 여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되 남학생들 보다는 살짝 못하는 오묘한 성적 관리 기술을 익혀야 하는 걸까? 이러한 현상이 정말 ‘문제’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남학생들이 공부를 못하는데 어떤 사회적 장벽이나 차별이 있고, 그것이 성적에 영향을 미침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성적으로만 학생의 능력을 판단하는 평가제도 자체에 이의제기를 해야 한다. 애꿎은 여학생들의 성적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차별이 낳은 역설적 상황

여학생들의 학업 성적이 좋은 것은, 그만큼 그녀들이 성적 관리에 필사적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차별의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에 성적도 뛰어나다는 거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훨씬 뛰어나야 비로소 출발점에 설 수 있다. 따놓을 수 있는 데서 점수를 충분히 따놓지 않으면, 도저히 게임이 안 된다. 비슷한 조건을 가진 상태에서,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잠재적인’ 능력자로 인정받는 현실이기 때문에 여성들은 항시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어야 한다. 대학 진학 후, 20대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어학 공부에 더 많이 열중한다는 통계는 그런 점에서 의미 있다. 여성 할당제 등 여남 간의 실질적 평등을 보완하려는 정책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을 해소시켜 줄만큼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는 못한다. 특히나 실업률이 높고, 고용이 불안한 시기에는 그마저도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다. 여성들이 공직에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공무원 시험 합격률이 높은 이유는 다른 선택지가 없거나, 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임용고시 합격률이 높은 이유는 암암리에 사립학교에서 남교사를 선호하고, 우선 채용하기 때문이다. 씁쓸한 일이지만, 군가산점제가 부활하면 이런 ‘여초 현상’ 조차 사라지겠지만 말이다.


정말 여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는가?

다시 돌아와서, “정말 여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져보고 싶다. 평균이라는 통계의 가장 큰 함정은 변량들의 차이를 무화시키고 중간 값으로 환원시켜버린다는 점이다. 모든 여학생들이 공부를 잘하지는 않는다. 다만, 공부를 잘하는 일부 여학생들이 있고, 그녀들이 한국 사회의 여학생을 대표한다. 많은 여학생들이 힐러리나 박근혜, 나경원을 동경할 순 있지만 모두가 그녀들처럼 소위 ‘성공’하는 여성이 될 수는 없다. 여학생들이 내신관리 능력이 뛰어난 건 학교에서 요구하는 인간형에 부합함으로써 생존하려는 전략이다. 그냥 여성이 아닌, ‘똑똑한 여성’들은 사회에서 남성과 비등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우리는 그녀들을 ‘명예 남성’이라고 부른다.

어떤 교사들은 ‘참한 여학생이 반장이 되어야 교실이 안정적이다.’라고 말한다. ‘참한 여학생’이 교실을 주도해야 교실 안 폭력도 줄어든다는 거다. 참한 여학생은 누구인가? 성격은 기본이고 성적도 좋아야 한다. 학생과 교사의 갈등을 조절하고, 교실 안을 침착하게 돌보는 ‘조용한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순간,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훅 느껴진다. 이제는 기술과 가정을 분리하지 않고 여남이 함께 배운다고 한다. 출석부에 남학생 이름이 먼저 기재되어 있던 문화도 사라졌다고 한다. 학교가 옛날보다는 많이 변화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여학생의 ‘능력’을 바라보는 기준은 획일적이다.

평균을 갉아먹는 존재들의 반란

이러한 학교 안의 능력주의가 깨지지 않으면, 통계에 보이지 않는 다수의 여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소외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끊임없는 열등감에 괴로워하는 여학생들, 학교의 기준을 비웃으며 학교가 아닌 거리를 택하는 여학생들에게 “그러니깐, 공부를 좀 더 하라니깐!”을 계속해서 외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한 명, 한 명 천천히 빛나는 사람들. 그이들이 자기만의 존재감을 인정받을 수 없는 학교에서 성평등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연재 글들이 청소년 인권에 여성주의적 상상력을 불어넣는 시도였다면, 이번 글은 청소년인권을 통해 자칫 페미니즘이 놓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학교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능력주의(성적 제일주의)’다. 학교에서는 못생겨도 공부를 잘하면 일단 인정받는다.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고 좋은 성적을 내면 역시나 인정받는다. 소수성에 기반한 다양한 차별들이 능력주의라는 거대한 프리즘을 통과해 그 빛깔을 낸다. 여성주의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학교 평균을 갉아먹는 존재들’의 반란을 기획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한낱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174 호 [기사입력] 2009년 10월 14일 12:51:46
뒤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