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인(in) 걸?] 여성청소년들의 팬덤시티를 말한다 2

팬클럽의 정치화, 소비자로서의 권력인가? 10대 연예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인가?

한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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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호에 이어 이번 호에서도 10대 여성들의 팬클럽 문화와 관련해 연재를 쓰려고 한다. <페미니즘 인 걸>을 연재하고 있는 우리는 10대 여성주의 운동이 부흥하길 고대하며 운동의 당사자인 10대 여성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한다. 노력의 결과가 곧 바로 결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팀이 만든 “10대 여성주의 온라인 커뮤니티 <깜>”의 회원 수는 95명이다. 그 중에서도 절반은 남성 혹은 비청소년이다. 그 많은 10대 여성들은 도대체 어디에 모여 있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고민하던 중 아이돌 팬클럽이 떠올랐다. 천 단위, 만 단위를 넘어서는 거대한 10대 여성들의 공동체! 다만, 어떻게 손을 건넬 수 있을지는 막연하기만 하다. 일단은 탐구를 해보자. 그리고 글로 써보자. 이 기회에 우연히 검색어라도 걸려 어부지리로 만남의 기회를 얻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앞선 글이 여성 청소년들의 팬질 문화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글에서는 팬클럽의 정치화가 낳는 의미와 한계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취향의 정치, 감수성의 정치

위 사진:2009년 9월 10일자 한겨레 1면에 동방신기 팬클럽이 실은 광고


팬클럽이 꿈틀거린다. 가요 프로그램 녹화장에서 풍선을 흔들며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을 외치는 모습만을 상상한다면, 당신은 상당히 깜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작년 9월, 동방신기의 일부 멤버들이 기획사와의 전속 계약이 부당하다며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을 때도, 슈퍼주니어의 한경이 노예계약을 문제 삼아 기획사와 소송을 벌일 때도, 2PM의 재범이 국가주의 정서에 밀려 한국을 떠났을 때도 팬클럽은 꿈틀거렸다. 그냥 주저앉아 울부짖은 게 아니다. 동방신기의 팬들은 신문 1면에 광고를 내고, 국가인권위와 공정거래위원회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2PM 팬 연합은 재범의 탈퇴 철회를 요구하는 포스터를 전국 곳곳에 붙이고, 이후 기획사가 발매하는 음반에 대한 불매운동과 팬클럽 탈퇴 등의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기획사 사옥 앞에 2000여명이 모여 침묵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하, 참으로 개념 차다. 그리고 조직적이다. 특정 아이돌 스타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모였지만, ‘팬’으로서의 정체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팬클럽 구성의 기본 바탕은 취향이다. ‘그 스타가 좋냐, 나쁘냐’로 팬클럽을 구성하지, ‘그 스타가 옳으냐, 그르냐’를 가지고 팬클럽이 만들어지진 않는다. 그러나 특정 국면에서는 취향의 문제가 가치의 문제로 전환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가 인격적 모독을 당했다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그것은 ‘옳지 못한 일’ 이 되며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2008년 동방신기 팬들은 “우리 오빠들에게 광우병 쇠고기를 먹일 순 없다"며 여러 차례 미국산 쇠고기 반대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정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취향과 감정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고, 그것이 프로의 정치라고 혹자는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4대강 죽이기 사업만 봐도, 기존 남성 중심적인 엘리트 정치판에서 벌이는 부조리한 정책들이 바로 그 이성과 합리에서 출발한 것 아니었던가? 유창한 전문용어를 사용해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해내진 못해도, 바로 그 아마추어리즘에서, 취향과 가치의 문제가 명확히 갈라지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팬클럽들의 감수성의 정치가 탄생한다.

단순 관리의 대상에서 협상력을 가진 주체로

위 사진:2009년 9월 13일 JYP 기획사 사옥 앞에서 진행된 2PM 팬클럽의 집회


팬클럽 활동을 하는 10대 여성들에 대한 세간의 통칭은 ‘빠순이’다. 공부는 안하고 연예인 뒤나 쫓아다니는 광신도라고 폄하한다. 개념 찬 ‘빠순이’들은 스스로를 ‘박순희’라고 부르며 이런 시선을 되레 비꼬아 버린다. ‘빠순이’로 불리던 존재들이 자신들을 ‘박순희’로 호명하는 순간, 이들은 기획사의 단순 관리 대상에서 벗어나 협상력을 가진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철저히 자본의 논리가 통용되는 연예 산업 판에서 지금도 물론 아이돌 스타의 흥망성쇠는 기획사의 손에 달려있다. 재범의 합류 없이 나머지 멤버만으로도 그룹 2PM이 무리 없이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사 입장에서 입만 한 번 쓱 닦고 끝내버릴 일들이 땀을 질질 흘리며 해명할만한 사건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건 팬클럽의 힘 때문이다. 그 실효성은 의심되지만, 팬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협의 하에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한다. 10대 여성 팬들은 단순히 기획사의 상술에 놀아나 이리저리 떼로 몰려다니는 소비 좀비가 아니라,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열심히 줄타기를 하며 ‘좋아하는 스타를 계속해서 볼 권리’, ‘좋아하는 스타가 보다 인간적인 환경에서 일할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팬클럽이 협상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상당히 조직적으로 뭉쳐있기 때문이다. 특정 스타의 팬으로 모이긴 했지만, 그 안에서 유대감을 갖고 공동체 문화를 형성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연예인 그 자체에 대한 열광보다 오히려 또래 문화에 대한 애정이 공간 운영의 핵심 축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온라인,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여러 문화 활동을 기획한다. 상당한 문학적 수준을 자랑하는 ‘팬픽’ 역시 아이돌 팬클럽들이 낳은 독특한 문화 중 하나다. 팬들은 아이돌 그룹 멤버 각자에게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하고, 그것을 변형하며 놀며 소통한다. 물론 모든 10대 여성들이 아이돌 팬클럽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10대 여성들에게 팬클럽이 유일한 소통 공간 또는 문화 공간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10대 여성들이 팬클럽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건 그 공간이 어떤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거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고, 노는 건 대학가서 하라는 학교보다 공통의 기호를 가진 친구들과 함께 생산과 소비를 행하는 팬클럽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별다른 대화 없이 묶여있는 가족보다 ‘오늘 그거 봤어?’로 시작해 일사천리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팬클럽 친구들이 더 편하진 않을까? 팬클럽 문화의 번성은 10대 여성들이 속해있는 학교, 가족, 지역 사회의 소통 부재, 문화 결핍을 반증해주는 한 사례기도 하다.

팬클럽의 놀라운 감수성, 그러나 악어의 눈물

연예인은 상품이자 노동자다. 팬들은 연예 시장에 상품으로 등장한 아이돌을 즐긴다. TV에 나오는, 철저히 관리된 모습으로서의 아이돌을 만나고 그들의 만들어진 캐릭터에 열광한다. 다만, 기획사가 아이돌을 상품으로만 대우할 때, 노골적으로 이윤만을 추구할 때 팬들은 반발한다. 이 순간 상품이었던 아이돌은 인간으로, 노동자로 귀환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귀환이 일시적이라는 데 있고, 팬클럽의 정치가 낳는 한계 또한 여기서 발생한다. 팬들은 이들이 아예 상품의 지위에서 벗어나길 원하지 않는다. 팬들은 ‘잘 팔리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거고, 더 이상 매력이 없으면, 갈아타면 그만이다. 8년에 걸친 연습생 생활 끝에 2AM으로 데뷔한 조권의 이야기에 팬들은 눈시울을 붉히지만, 그 눈물이 대형 기획사의 착취적인 연습생 제도를 없애라는 강력한 탄원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어쨌든 수많은 연습생들의 경쟁 속에서 더욱 대중의 기호에 부합한 아이돌 상품이 생산되는 거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거니까. 소비자로서의 팬들이 성공한 연습생 조권 뒤에 남아있는 수많은 ‘실패한 연습생들’을 고려해야할 이유는 없다.

팬질을 하면 할수록, 기획사의 악행은 번창한다. 팬들의 소비와 열광이 거세질수록 대형 기획사의 기계적인 아이돌 생산 시스템은 계속 번성할 테니까. 팬들이 악의적인 것이 아니라, 상품과 소비자로 엮인 ‘아이돌 - 팬’ 관계 자체가 낳는 모순이다. 상품으로서의 아이돌과 소비자로서의 팬은 서로를 늘 의심할 수밖에 없는 비운의 관계다. 팬들은 폭력이나 사기 사건에 연루된 ‘리얼’ 아이돌을 보며 배신감을 느끼고, 아이돌은 팬들의 뜬구름 같은 애정을 보며 우울증에 시달린다. 결과적으로 연습생이나 아이돌을 부리는 것은 기획사이기도 하지만, 팬들 자신이기도 한 거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별을 준비한다

더불어 팬클럽 활동을 하는 10대 여성들이 정작 자신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모습을 보면 씁쓸한 기분마저 든다. ‘팬질의 기본은 매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획사 매니저나 경호원들에 의한 폭력은 심각한 수준이다. 2007년에 있었던 동방신기 콘서트에서는 콘서트 장면을 휴대전화로 촬영한 몇몇 팬들이 있었다는 이유로 모든 팬들의 휴대전화를 압수하고 새벽 3시가 넘도록 귀가를 금지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가 언론에 불거지는 것 자체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의 이미지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는 이유로 팬들은 스스로 쉬쉬한다.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소수자들의 ‘오지랖’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며, 동시에 ‘소비자’로서의 자신의 권리에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권리에는 주춤하는 우리 사회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풍경과 겹치기도 한다.

팬들이 흘리는 눈물의 본질이 ‘악어의 눈물’임을 직시할 때, 팔리는 것들만 살아남는 연예 시장과 노골적인 문화 자본주의 자체에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기획사는 아이돌 생산을 중지하라!'거나, '팬클럽은 문화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싸움에 앞장서라!'고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견고하고 거대한 연예 시장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10대 여성들이 소비자로서, 고객으로서 누려야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2% 부족하다. 우상이었던 아이돌이 팬클럽의 정치를 통해 인간의 자식, 노동자로 귀환했다. 아이돌이라는 10대 연예 노동자와 팬이라는 10대 여성들 간의 인간적 연대를 좀 더 구체적으로 기획해볼 수는 없을까? 10대 연예 노동자들이 성접대나 노예 계약의 문제를 힘겹게 공론화화고 파업을 시도했을 때, 그이들과 함께 거리 무대를 개설해 공연하는 건 불가능한 상상일까? 팬들에 대한 경호원들의 폭력에 반대해 간지나게 입장을 표명하는 아이돌의 등장을 기대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갑을 열어야만 나의 애정을 증명할 수 있는 그런 만남이 아닌, 진정한 문화 생산자와 향유자로서의 인간적 만남을 꿈꾸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질문들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언제든 이별을 준비해야 사랑도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반복적인 소비패턴으로서의 아이돌 문화와의 이별을 담담히 준비해야 한 인간의 노래도, 춤도, 개그도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한낱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202 호 [기사입력] 2010년 05월 12일 2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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