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 공룡트림] 청개구리와 베짱이의 슬픔?!

괜찮아, 『하퀸-골짜기로 내려간 여우』도 있고, 『프레드릭』도 있어.

이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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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던 옛이야기나 우화가 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흥부 놀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금도끼 은도끼’, 다소곳이 말 잘 듣고 살다보면 복이 온다는 ‘콩쥐팥쥐’ 등등. 대부분, 아이들에게 들려줄 때는 구전문화가 가진 재미는 쏙 빠지고, 교훈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각색된 경우들이 많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를 책으로, 만화로, 영화로, 연극으로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고, 듣고 또 듣다보면, 어느 순간 몸에 자체에 각인되어 버린다. 이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아도 누군가 옆에서 훈계하지 않아도, 스스로 몸을 조절하는 ‘순응의 기술’을 갖추게 된다.

이들 대부분은 권선징악을 바탕으로 한 해피엔딩인데 가끔 불행한 결말을 맺는 새드앤딩 스토리일 때는 공포감까지 더해 훈계효과가 극대화되기도 한다. 엄마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비가 올 때마다 냇가에 있는 엄마 무덤가에서 개골개골 슬피 우는 청개구리, 열심히 일하지 않아 추운 겨울날 배를 곯으며 살아야 하는 베짱이는 어떠한가. 청개구리와 베짱이는 다른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보다도 어린이들의 모습을 닮았기에, 그들이 맞이하는 슬픈 결말은 더 잔인하게 다가온다. 엄마 말을 듣지 않으면, 공부하기보다 놀이에 치중한다면, “너희들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다”라고 하는 무서운 경고로 들리기 때문이다.

자, 이런 이야기에 상처받은 우리에게는 치유가 필요하다. 엄마 말을 듣지 않아도 돼, 네가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배를 곯는 것이 아니야, 너의 노래가 우리의 영혼을 배불리 먹여줄 수 있잖아, 네가 원하는 것을 해…….

여기, 이렇게 그런 우리의 마음을 지지해 주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존버닝햄의 『하퀸-골짜기로 내려간 여우』와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이 바로 그것이다.

엄마 말을 듣지 않아도 돼, 『하퀸-골짜기로 내려간 여우』(존 버닝햄)


“얘들아, 산 위에서만 놀고 골짜기에는 절대로 내려가지 마.” 라고 타일러도 기어코 골짜기로 내려간 여우 한 마리가 있다. 바로 하퀸이다. 청개구리도 동쪽에서 놀라면 서쪽으로 가고, 산기슭에 가라면 강기슭에 간다. 그저, 아무 이유 없이 엄마가 하는 말에 반대로 행동하는 고약한 녀석으로 그려져 있다. 동쪽이 아닌 서쪽에 가는 이유, 산기슭이 아닌 강기슭에 가는 이유가 뭔지. 그 내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퀸의 경우엔 아주 간단하다. 심심했기 때문이다. 금지된 세계를 직접 가보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사냥꾼들이 보고 쫓아오면, 다들 위험해질” 것이라고 말해도, 사냥꾼에 붙잡혀 죽은 삼촌의 사진을 보여주며 겁을 주어도 하퀸을 막을 수는 없다. 오히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더 조심할 뿐이다. 청개구리와 하퀸의 부모는 어린이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경계를 만들어 내고,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우리 부모(어른)의 모습을 닮았다. 찻길보다야 인도가 낫겠지만, 그것을 뛰어 넘어 안전을 만들어내는 기준과 영역이 삶 전체로 확장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으니 문제다. 그래서일까. 청개구리의 행동에서 강조되는 바는 무엇인가. 부모는 언제나 안전한 곳을 잘 알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린 아이는 그의 말을 순종할 때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미지의 세계를 가고 싶은 호기심과 떨림. 숲에서 헤매일 자유는 모조리 박탈되어 있다.

경고를 무시한 청개구리는 결국 엄마의 시체를 부여잡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하퀸에게도 위협의 순간이 다가온다. 사냥꾼의 눈에 띄고 만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여우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잡히는 일만 남았다. 가족 모두 겁에 질린다. 어떤 행동을 취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우리 집을 못 찾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집 안에 꼭꼭 숨어 버린다. 그들 삶의 영역이 ‘산’에서 작은 집안으로 좁혀지는 순간이다. '안‘은 안전하고, ’밖‘은 위험하다는 생각으로 둘러친 보호막은 이렇게 점점 더 삶을 비좁게 만든다. 청개구리 이야기가 부모가 마련해 주는 안전한 세계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다면, 존버닝햄의 『하퀸』은 사고날 염려 없이 평온한 세계를 추구하는 일에 의문을 던진다. 안전하기 위해 굴 속에 머물래? 너른 들판을 달릴 자유를 선택할래?

만일 하퀸이 밖으로 나와 사냥꾼을 늪으로 유인해 내지 않았다면, 하퀸의 가족들은 평생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며 살아야했을 것이다. 또 만일, 청개구리 이야기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면 가족 모두 사냥꾼의 총에 죽음을 맞이하고 하퀸 홀로 숲에 머물며 구슬피 울었다는 이야기로 막을 내렸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하퀸은 살아 있고 가족 모두 행복하다. 오히려 골짜기 까지 삶의 영역이 확장됐다. 작가 존버닝햄은 하퀸의 호기심, 하퀸의 삐딱함을 지지해 주고 있다. 그에 반해 지금의 어린이들은 자신의 호기심과 욕구를 실험할 삶의 너른 들판을 박탈당하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청개구리 보다는 하퀸을 소개해 주는 것이 어떨까. 삐딱한 호기심을 응원할 수 있도록!

너의 노래가 우리의 영혼을, 『프레드릭』(레오 리오니)


‘개미와 베짱이’는 이솝우화의 하나다. 원래는 열 줄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이야기인데, 아이들이 읽을 책으로 만들어지면서 여러 가지 버전을 가지고 있다. 기본 토대는 모두 비슷하다. 노래를 부르고 놀던 베짱이가 겨울이 되자 개미에게 음식을 얻어먹으려 하지만 매몰차게 쫓겨나거나 비웃음을 산다는 이야기다. 요즘엔 베짱이가 노래를 불러 가수가 되고 돈을 더 잘 벌었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떠돈다지만 그런 전복이 재미있지만은 않다. 노래를 부르는 것 역시 일이 될 수 있다는 문화산업시대 논리의 반영이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 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돈’을 벌어 ‘배불리’ 먹고 살기 위해선 뭐든 열심히 해야 한다는 논리는 변함이 없으니까.

『프레드릭』에는 다섯 마리의 생쥐가 나온다. 네 마리의 생쥐는 열심히 일하지만, 단 한 마리의 생쥐 프레드릭만이 꿈을 꾸듯 앉아 있다. 친구가 뭐하냐고 물으면 그저, 햇살을 모으고, 색을 모으고 있다고 대답할 뿐이다. 그리고 어느새 겨울이 왔다. 다섯 마리의 생쥐들은 그동안 모아 두었던 곡식을 가지고 와서 다정하게 나누어 먹는다. 물론 프레드릭도 함께한다. 너는 일하지 않았으니 먹지도 말라고 비웃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일했어도 물질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시간이 지나자 창고가 텅텅 비어 한 톨의 쌀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먹을 것이 없어지자, 네 마리의 친구들이 프레드릭에게 묻는다. 네가 모은 것은 어떻게 됐니?

프레드릭은 지쳐있는 친구들에게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지나오며 모아온 이야기들을 하나 둘 풀어 놓기 시작한다. 잿빛의 추운 겨울날, 프레드릭은 햇살 한줌, 초록, 빨강, 노랑의 아름다운 색깔을 한 편의 시로 그려 보여준다. 생쥐들은 눈을 감고 허기진 영혼을 채운다. 봄, 여름, 가을의 잊혀졌던 풍경들이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다시 피어나고 살아나듯, 생쥐 친구들의 마음도 풍요롭다.

『프레드릭』은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살기 위해 빵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만, 장미 없는 빵이라면 그것도 아름다운 삶일 수 없다고 말해준다. 어린이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더 큰 빵을 얻기 위해 경쟁 속에 내 몰린다. 프레드릭 처럼 ‘딴짓’을 하고 있는 어린이는 허용되지 않는다. 경쟁의 칼보다 영혼의 장미’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불온한 것이 된다. 성적과 관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런 그들에게 넌지시 프레드릭을 만나게 해주자. 장미 꽃을 손에 쥐고 활짝 웃을 수 있도록!

덧붙이는 글
이선주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의 활동회원입니다.
인권오름 제 214 호 [기사입력] 2010년 08월 04일 15: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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