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의 인권이야기] 친구가 될 수 없었던 친구에 대한 기억

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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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신나게 TV를 보고 있는 나에게 자주 등을 긁으라고 했다. 피부가 건조해서 자주 가려움을 느끼던 아버지였다. 군말 없이 아버지의 등을 긁던 나는 1분도 안 돼 그 일이 지겹게 느껴졌다. "아빠 손으로 긁으면 되잖아." 툭 내뱉고 내 방으로 내빼곤 했다. 보던 TV가 너무 재미있어서 방으로 도망치는 게 어려울 때에는 손에 온갖 짜증을 실어 아버지의 등을 긁곤 했다. 아버지는 짜증을 낸다며 나를 혼냈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왜 도대체 자기 손으로 안 긁는 거야.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내가 재미있게 노는 걸 훼방 놓고 싶어 아버지가 그러는 것 같았다.

나는 유독 키가 컸다. 어릴 때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을 만큼 컸던 나는 큰 키가 거추장스러웠다. 별로 원치 않던 큰 키는 원치 않게 나를 튀게 만들었고 주위 사람들에게 원치 않는 기대도 받도록 했다. 큰 키와 말이 없는 내성적인 성격은 ‘어른스러움’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냈고 결국 거짓 어른스러움으로 포장한 아이가 완성되었다. 선생님들은 나의 포장된 어른스러움을 믿었던지,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짝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 선 넘어오면 안돼." 초등학교 3학년 때 J와 첫 짝이 된 날 내가 내뱉은 말이었다. J가 아닌 누구와 짝이 되었을 때에는 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J는 나를 귀찮게 했다. 말도 안하고 내 연필을 만졌고, 내 공책에 알 수 없는 그림도 그렸다. 수업시간에는 신경에 거슬리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일쑤였다. "조용히 좀 하라고!" 일 년 동안 J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었다. J는 지적 장애를 가진 친구였다. 남학생들에게는 놀림의 대상이었고 여학생들에게는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준 임무는 짝이 되어 J를 아이들의 괴롭힘으로부터 지키고 친구가 되어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J의 편을 들면 같은 놀림을 당할까봐 두려웠다. 친구가 되면 똑같은 취급을 받을까봐 무서웠다. 무엇보다 나는 짜증이 났다. 왜 내가 그런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담임선생님에게 아이답게 항변하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어른스러워야 했으니까. 나는 그 모든 짜증을 J에게 쏟아냈다. 옆에 있으면 귀찮다가도 학교 밖으로 견학을 가면 J가 어디로 가버릴까 불안했다. 견학을 가도 나는 견학은커녕 견학 내내 J를 살펴야 했다. 소풍가던 날, 맞벌이로 일하느라 오지 못한 어머니 대신 상냥한 J의 어머니가 나를 챙겨줬지만, ‘고맙습니다’ 한 마디도 안 하고 뾰로퉁하게 있었다. 떨칠 수 없는 짐이 된 J가 너무 싫었다. 그러다가 나는 갑자기 전학을 가게 됐다. 기뻤다. 해방되었으니까.

전학을 가서 4학년이 되었을 때 Y를 만났다. Y는 보청기를 끼고 있었고 말을 어눌하게 했다. Y는 착하고 똑똑하고 성실한 친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큰 ‘훈남’이었다. 인기가 많았을 것 같지만 청각장애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반 전체에서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남자 아이들은 그의 보청기를 빼앗아 도망가기도 하고 어눌한 말투를 따라 하며 놀리기도 했다. Y의 짝인 나는 아이들이 놀릴 때마다 "그만해"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한 번도 그 아이들을 저지한 적이 없었다. Y의 편을 들면 아이들이 이제 나를 놀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때 나는, 비겁했다. Y는 보청기를 하고 있었지만 청력이 나빠 모든 대화를 잘 듣진 못하였다. Y가 나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때면 나는 온갖 짜증을 담아 신경질을 내곤 했다. 두 번 말하는 일이 그리도 짜증났던 걸까. 어느 날, 이번엔 Y가 서울로 전학을 갔다. Y가 전학 가던 날 나의 감정을 기억한다. 3학년 때보다 조금 더 커버린 내가 느낀 것은 미안함이었다.


생각해보면 J와 Y는 초등학교 3~4학년 시절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다른 친구들의 얼굴은 생각이 안 나지만 J와 Y는 또렷이 기억난다. 우정보다는 짜증뿐인 폭력으로 대한 친구지만 그들은 어린 시절 내 기억의 전부다. 그리고 그 기억은 지우고 싶지만 지워지지 않는, 지울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죄책감이기도 하다. 나는 왜 그들과 진짜 친구가 되지 못했을까. 왜 같이 떠들고 웃고 즐겁게 놀지 못한 걸까. 어느 누구도, 그들은 다르다며 멀리하라고 몰아세우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떤 기준으로 그들을 구분하고 멀리한 걸까.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한참 후 내가 철이 들었을 때였다. 아버지는 사고로 왼팔을 구부리지 못했다. 쉽게 말하면, 오른손으로만 세수를 할 수 있었다. 그의 왼손은 그의 등에 닿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긴 시간 동안 그 사실을 몰랐다. 같이 사는 상황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눈치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알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그의 장애를 알고 나서 나는 자식으로서 죄책감을 느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장애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왜 장애를 자식에게도 숨겼냐고 물었더니 그는 병신이라 손가락질 받는 것이 두려웠다고 했다. 그때 J와 Y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무엇보다 나 같은 사람이 무섭지 않았을까. 나와 같이 그의 다름을 구분하고 멀리하는 사람들, 그의 다름을 빌미로 폭력을 휘두를 사람들, 그가 다름으로 인해 겪는 차별을 못 본 체하고 방관하는 사람들.

그런데 내 죄책감의 이유는 뭘까.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 인권활동가로서 자격이 의심되는 과거의 차별 전력? 한 글자 한 글자가 변명이 될까 무겁지만, 사실 변명을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J와 Y의 다름이 친구가 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회에서 내가 자랐다면, J와 Y의 학교생활이 열 살짜리 아이의 짐이 되지 않는 사회에 살았다면, 그때도 내 죄책감의 크기가 이렇게 클까. 지금 다시 그들과 만난다면 나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은진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215 호 [기사입력] 2010년 08월 11일 20: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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