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문헌읽기] 호흡, 고통을 들이마시며 행동을 내쉬는

‘당신이 이라크인임을 아는 법’ 외

류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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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0일은 미영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지 8년이 된 날이었다. 구실이 됐던 대량살상무기는 없던 것으로 일찌감치 밝혀졌다. 인권을 명분으로 한 전쟁이라는 형용모순으로 석유에 대한 탐욕을 위장하여 지탄받은 전쟁이었다. 4천4백 명 이상의 미군이 죽었고 3만 명 이상이 심각하게 다쳤다. 9․11로 3천여 명이 사망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희생이었다. 더 큰 고통을 받은 것은 미국이 ‘해방’시키겠다고 했던 이라크인들이었다. 정확하게 헤아려지지조차 않은 이라크 민간인들의 희생은 엄청난 것으로 추측된다. 이라크 침공의 직접적인 결과로 적어도 십만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총격으로 사망한 이들도 많지만 의약품과 깨끗한 물의 부족으로 죽어간 이들의 숫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다. 폭격과 경제제재로 인해 전기 시설, 하수처리장, 수도시설, 병원 등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4백만 명 이상의 이라크인이 고향을 떠나야했고 여전히 피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8년이 지난 지금, 이라크의 생활 조건은 사담후세인 시절보다 더 악화됐다고 평가된다. 이라크 포로에 대한 잔인한 고문으로 온 세계가 가슴 데인 기억이 있고, 이라크 땅은 우라늄과 방사능으로 오염되는 등 남겨진 상처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고문후유증과 유아사망률과 암발생률의 증가는 이라크인들이 평생 짊어질 짐이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미군 철수 약속에도 불구하고 완전철수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부끄러운 8년의 기억 위에 비슷한 사건이 재연되고 있다. 등장인물이 달라졌을 뿐 비슷한 시나리오다. 리비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그렇다. ‘인도주의적’ 폭격이란 형용모순, ‘독재’의 축출을 명분으로 한 ‘개입’과 리비아 시민들의 투쟁과의 ‘연대’는 얼마나 미묘하게 다른 것인가. 그 차이 때문에 폭격에 나선 이들의 말도 행동도 이리 새고 저리 새고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살인에는 꾹 감은 눈이 왜 카다피에 대해서는 그리 불끈 떠지는 것인지 대답해 보면 갈팡질팡의 원인을 알게 될 것이다.

정치경제, 국제외교, 군사 전문가 등이 이런 저런 소리를 쏟아낸다. 하지만 그걸 통해 판단할 기회와 통로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멀 뿐 아니라 그걸 일방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내가 전쟁을 겪은 이라크인이라면, 내가 폭격 앞에 놓인 리비아인이라면, 내가 핵 앞에 놓인 일본인이라면, 내가 비정규직으로 쫓겨난 그이라면, 내가 꽃샘추위의 칼바람 한가운데 크레인위의 농성자라면, 내가 직업병으로 고통받다 죽은 젊은이라면……. 우리는 이런 물음 속에 고통을 한 호흡 들이마시며 느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 호흡에 어떤 행동을 같이 토해낸다.

1958년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들의 고통을 마음으로 느끼고 행동으로 옮긴이가 있었다. 그해, 앨버트 비즐로우(Albert Bigelow)란 평화운동가와 그 동료들이 작은 배를 타고 태평양 한복판 비키니 섬으로 향했다. 그곳은 미국의 핵실험 장소였다. 핵실험에 반대하는 서명운동과 당국자 면담 시도가 별반 효과가 없었기에 ‘비폭력직접행동’이 필요하다고 여겨서 내린 결단이었다. 몇 차례의 항해 시도가 당국의 체포와 투옥으로 실패한 끝에 그가 탄 배 ‘불사조 히로시마’는 핵실험에 반대하여 실험지역에 들어간 최초의 배가 됐다. 비즐로우는 미 해군 장교로 2차 대전에 복무했다. 하지만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여됐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평생 연금을 탈 수 있는 자격을 불과 한 달 남겨두고 해군에서 사임하고 평화운동가로 변신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호흡을 위해 두 개의 글을 소개한다. ‘당신이 이라크인임을 아는 것은 이런 때입니다’라는 이라크에서 온 편지는 ‘평화를 위한 여성들’(CODEPINK)사이트에 올려져 있는데 발신자는 이라크의 오마르이고 발신일은 2007년 12월 12일이다. ‘핵실험 장소에 내가 배를 저어가는 이유’란 비즐로우의 글은 앞부분에서 자신의 생에 대한 얘기와 청원과 서명운동 끝에 직접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된 경과를 적고 있다. 아래 소개하는 부분은 이 글의 후반부이다. 지진은 불가항력의 자연재해라면 전쟁과 핵의 위험은 우리가 알면서 저지르는 잘못이라는 것을 일찍이 경고한 사람들을 기억할 이유는 오늘날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당신이 이라크인임을 아는 것은

갑자기 뜻밖의 무장집단이 급습할까봐 집에서 잠옷차림으로 지낼 수 없을 때입니다.
매일 24시간 중에 2시간에서 6시간만 전기가 들어올 때입니다.
집에 필수적인 장치가 고장 났어도 그걸 고칠 수 없는 이유가 한 두 가지가 아닐 때입니다.
당신과 아내가 감정에 대한 관심을 잃을 때입니다.
일상의 스트레스 때문에 당신과 아이들 사이가 엉망이 될 때입니다.
집을 나가면서 다시 귀가할 수 있을지를 확신할 수 없을 때입니다.
자아를 드러내지 못하고 모욕을 꾹꾹 참아낼 것을 강요받을 때입니다.
백주 대낮의 무장 강도가 무서워 몸에 지닐 만큼 이상은 아무것도 사지 못할 때입니다.
목숨을 부지하려 진실해질 수 없는 제 모습을 보게 될 때입니다.
지금보다 과거가 얼마나 좋았던가, 늘 과거만 생각하고 있을 때입니다.
내일은 어찌될지 전혀 알 수 없는 때입니다.
가족이나 내 자신을 지키기에는 자신이 너무 허약하다는 걸 깨달을 때입니다.
기도 장소로 갈 수 없을 때입니다.
거리에서 사랑 노래를 흥얼거릴 수 없을 때입니다.
자기 내면에서 절실히 ‘아니’라고 여기는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때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든 비자를 신청하면 거절 받게 된다는 것을 알 때입니다.
울 수조차 없고 온 세상이 날 잊었다는 두려움에 함몰될 때입니다.
당신이 이 모든 것을 당신 속에 품고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이 이라크인임을 의미합니다.


핵 실험 장소에 내가 보트를 저어가는 이유(Albert Bigelow)

나는 갑니다. 세익스피어가 말했듯이, “행동은 웅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직접 행동이 없다면, 보통 시민에게는 그들의 정부에게 그들을 보게 하고 듣게 하는 힘이 없게 됩니다.
나는 갑니다. 모든 사람들처럼, 내 맘 속 깊이, 모든 핵폭발은 끔찍하고 나쁘며 인간존재에게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갑니다. 전쟁은 더 이상 봉건시대의 마상시합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생각지도 못할 파국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갑니다. 어린 아이들, 우리들 대부분,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이 지금 바로 최전선의 군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과 이 끔찍한 위험 사이를 가로막고 서는 것이 나의 의무입니다.
나는 갑니다. 잔학행위를 더 이상 방관하는 것, 그리고 방관함으로써 동의하는 것, 따라서 잔학행위에 협력하는 것이 나에게는 비겁하고 수치스럽기 때문입니다.
나는 갑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퀘이커교도인 윌리엄 펜은 말했습니다. “선한 목적은 악마적 수단을 신성하게 만들 수 없다. 많은 선이 그 결과로 생긴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악을 행해서는 안된다.” 공산주의자 밀로반 질라스는 말합니다. “목적을 보장한다는 수단이 악한 것으로 보여지자마자, 그 목적은 스스로 실현불가능함을 보이는 것이다.”
나는 갑니다. 간디가 말한 것처럼 “신은 내 반대편 사람 쪽에 앉아 계십니다. 따라서 그를 해치는 것은 신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갑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무력은 정복할 수 있지만 사랑은 얻을 수 있다”는 깊은 본질의 진실에 증인이 되러갑니다.
나는 갑니다. 정부들이 아무리 잘못이고, 옳지 않고, 뉘우칠 줄을 모를지라도, 나는 여전히 모든 사람이 정말로 양심을 품고 있으며 나의 행동이 그 선한 양심에 말할 것이란 걸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갑니다. 정부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의 변화를 돕는다는 희망을 품고 갑니다.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내 목숨을 내놓을 겁니다. 공포와 무력과 파괴의 정책을 신뢰와 친절과 도움의 정책으로 변화시키는 걸 돕기 위해선 말입니다.
나는 말하러 갑니다. “이런 낭비, 이런 무기 경쟁을 멈춥시다. 그 대신에 군비축소 경쟁으로 바꿉시다. 악을 위한 경쟁을 멈추고 선을 위해 경쟁합시다.”
나는 갑니다. 내가 나 자신을 인간이라 부를 수 있으려면 그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걸 당신이 볼 때면, 당신의 본능은 그것에 대해 뭔가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서운 냉담으로 얼어붙을 수도 있고 뭐 그렇게 끔찍한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는 행동해야만 합니다. 이건 너무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행동합시다.
덧붙이는 글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입니다.
인권오름 제 243 호 [기사입력] 2011년 03월 23일 13: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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