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당신의 거리] 너무 먼 것처럼 느낄 뿐이다

첫째날 차별_저항_거리

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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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주> 5월 19일부터 22일까지 나흘 동안 15회 인권영화제가 열린다. <인권오름>은 15회 인권영화제가 내건 ‘나와 당신의 거리’라는 슬로건으로 각 상영일의 주제와 연관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나와 당신 사이의 거리, 나와 당신이 함께 서 있는 거리, 그리고 더욱 다양한 거리들. [나와 당신의 거리]를 읽고 마음이 술렁이는 당신, 마로니에 공원에서 펼쳐질 ‘나와 당신의 거리’로 나오시라.


01 거리가 좁혀질수록 밀려나는 사람들

지난 4월 7일, 비가 내렸다. 라디오에선 난리였다. 우산을 꼭 챙겨야 한다고 했다. 교육청은 교장에게 휴교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이유는 많은 이들이 짐작하는 한 가지, 방사능 때문이다. 지난 3월 일본에서 지진이 나고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서 다들 방사능 ‘전문가’가 되었다. 방사능 위험을 얘기하고,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를 환기하며 불안을 가중했다.

사고 초기 가까운 거리의 일본 거주민을 걱정하던 반응은 사라졌다. 방사능의 위험만 부각되었다. 사람은 사라지고 위험만 남았다. 그 위험은 질병공포, 장애공포에서 출발했고, 질병공포와 장애공포를 촉발했다. 나의 기억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여파는 언제나 병과 장애인을 전시하는 방법으로 설명되었다. 암 발병률이 몇 % 증가한다고, 신생아 중 장애인이 몇 %라고 말하며 원전의 위험을 알렸다.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어떤 신문에선 “기형아 낳을까 무서워요 … 둘째 포기”란 제목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포털 메인에 실린 어느 기사는 일본을 “민폐국”으로 불렀다. 물리적 거리는 그대로인데, 공포와 위험은 그 거리를 좁혔다. 물론 사람 간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내’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땐 다 괜찮았다.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불안과 혐오가 터져 나왔다. 장애를 ‘비정상’과 고통으로 치환하며 규범적이고 ‘건강’한 몸에 강박적인 반응이 보편적 정서로 유통되었다. 이런 반응에 나는 나의 몸을 떠올렸다. 트랜스젠더의 몸,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의 몸, 에이즈 감염인의 몸을 향한 사회적 혐오가 떠올랐다. 사회가 ‘다르다’고 가정하는 몸을 향한 혐오와 차별이 떠올랐다.

위 사진:15회 인권영화제 포스터

02 나를 불러낸 거리, 나를 밀쳐낸 거리

몇 달 전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 걸리면 SBS가 책임져라!”는 광고가 일간지에 실려 화제였다.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 ‘오염’되고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질병공포는 방사능 공포와 다르지 않다. 물론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것은 ‘망상’이라고 누군가는 구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망상’일까? 어떤 사람에겐 방사능 위험이 현실이겠지만, 내겐 광고가 구체적 현실이다.

광고를 게재했던 집단과 관련 있을 누군가는 한동안 동성애를 “반대”하는 1인 시위를 했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을 찬반으로 논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의 세상에서 퀴어는 사람이 아니란 뜻일까? 나는 우연히 1인 시위를 하는 사람 앞을 지나간 적 있다. 판넬에 적혀 있는 문구를 읽으며, 약간의 분노와 실소와 어이없음과 연민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실, 분노보다는 그저 그가 불쌍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가 느끼는 근거 없는 불안, 그 불안을 퀴어에게 덤터기 씌울 수밖에 없는 그의 취약함에 그가 조금 불쌍했다.

그 사람 앞을 지나가며 나는 연민과는 또 다른 어떤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와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고, 또 너무 멀었다. 내가 트랜스젠더 활동가란 사실을 안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욕을 했을까? 아님 그저 얼어붙었을까? 내게 안전하지도 않지만 위험하지도 않은 그 거리를 걸으며 나 혼자 조금 심란했다. 그가 인간의 범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지나가는 그 자리, 나만 혼자 미묘한 기류를 느꼈다. 1인 시위자, 1인 시위자에게 무관심한 사람, 그리고 1인 시위자가 신경 쓰이는 나는 서로 다른 공간을, 현실을 겪고 있었다.

03 ‘정상’만 가득한 거리, ‘정상’의 것이 아닌 거리

방사능 위험 운운하는 언설을 통해 유포하는 장애혐오, 질병혐오는 장애인을 인간 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광고 구절과 1인 시위 내용은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양성애자, 에이즈(HIV/AIDS) 감염인을 인간 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그 현실에서 장애인이나 퀴어가 존재하지 않느냐면 그렇지 않다. 배제한 존재에게 환기되며 늘 그 존재와 함께한다. 방사능 공포가 유발하는 혐오는 장애인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는다. 광고를 게재한 이들은 퀴어와 에이즈 감염인을 강박처럼 떠올리며 불안에 떤다. 타인을 배제하는 이는 자신의 규범성, 자신은 ‘정상’이라는 항변을 입증하는 근거로서 배제할 대상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배제는 그 대상이 세상에 두루 존재하도록 하며, 세상을 이루는 토대로 만든다. 불안과 배제는, 결국 이 세상을 이루는 토대가 소위 말하는 ‘정상’/규범이 아니라 배제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말로, 이 세상은 소위 규범적/‘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내가 1인 시위자 앞을 지나간 것처럼, 내가 간과하고 있는 이들이 어디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간과해서 그저 없는 것처럼, 나와 너무 먼 것처럼 느낄 뿐이다.

15회 인권영화제 첫째 날(5.19. 목) 차별_저항_거리

12:00 [추모재상영] 아나의 아이들 Arna′s Children
줄리아노 멀 카미스, 다니엘 다니엘 | 2003 | 다큐 | 84분 | KS 화 더빙
이스라엘 군대가 수차례 침공했던 주닌 지역. 그 폐허 위에 싹튼 아나의 연극학교는 주닌 지역 아이들의 꿈과 염원을 노래하는 희망의 공간이다. 하지만 수년간 끊이지 않는 폭력 앞에 결국 연극학교는 빛바랜 흔적으로 사라지고 아이들은 하나 둘 숨을 거둔다.

13:50 시민 마틴 루터 킹 Citizen King
노랜드 왈커, 올란도 바그웰 | 2004 | 다큐 | 120분 | E KS
마틴 루터 킹과 인종차별 반대운동의 발자취를 담은 영화. 역사학자, 인권운동가, 친구, 가족 등 마틴 루터 킹과 함께 했던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모은 인터뷰와 역사적 자료들이 이어진다. 인종차별에 반대했던 한 개인에 대한 영웅주의적 시각을 뛰어넘어 ‘흑인 인권 운동’의 역사와 가치에 집중한다.

16:00 선철규의 자립이야기 ‘지렁이 꿈틀’ Earthworm Squirm
장애in소리 | 2010 | 다큐 | 25분 35초 | K KS TA
장애인에게 진정한 자립은 무엇인가. 자립과정에서 부딪치게 되는 어려움과 고단함 등 다양한 질문들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 주인공 선철규 씨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모여 영상을 제작하는 동아리 장애in 소리 회원으로 자신이 겪은 자립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았다.

17:00 8:모르몬 발의안 8:The Mormon Proposition
리드 코완 | 2010 | 다큐 | 78분 | E KS TA
2008년 11월 캘리포니아. 모르몬 교는 결혼을 이성간의 결합으로 정의하는 주민 발의안을 52%의 지지율로 통과시켰고 이 발의안으로 인해 합법이었던 동성 결혼이 무효화되었다. 영화는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인, 게이 젊은이들의 증언을 번갈아 보여주며 모르몬 교회가 이 발의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어떻게 대규모의 자금과 인력, 미디어를 동원하는 지를 보여준다.

19:00 개막식

20:00 [개막작] 종로의 기적 Miracle on Jongno Street
이혁상 | 2010 | 다큐 | 117분 | K KS
‘특히’ 서울 종로구 낙원동은 게이들의 고단한 삶과 유쾌한 용기가 살아 날뛴다 한다. 궁금하다면 종로의 기적을 보시라. 네 명 게이들의 삶을 기록한 이 영화는 동성애자의 기적 같은 커밍아웃을 담았다. 그러나 기적은 이성애자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타자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차별 없는 ‘낙원’에 도착하는 당당한 자신을 발견할 것이므로.

원어 K한국어 E영어 S스페인어 Q퀘추아어 B버마어 T티베트어 L라다크어
자막 KS한글자막 ES영어자막
장애인 접급권 화 화면해설 더빙 한국어녹음
TA 관객과의 대화
덧붙이는 글
루인 님은 트랜스젠더 연구활동가(runtoruin@gmail.com)입니다.
인권오름 제 247 호 [기사입력] 2011년 04월 19일 22: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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