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날다] 인물이 살아야 논쟁도 산다

교사들과 함께 인권과 교육 사이의 긴장을 토론하다

한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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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고, 많이 쓰는 말일수록 종종 낯설게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단체 이름은 인권교육센터이고, 나는 인권교육가라 불린다. 내가 주로 하는 일은 인권교육이다. ‘인권교육=인권+교육’이라고 단숨에 정리할 수도 있지만, 인권과 교육 각각의 의미를 떠올려보면 사실 이 두 개념은 그리 쉽게 ‘화해’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교육은 흔히 ‘인간 행동의 계획적 변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활동’으로 정의된다. 인권의 눈으로 볼 때, 이런 의문들이 떠오를 수밖에. 배움이나 성장의 시점은 나 자신이 결정하는 것인데, 미리 누군가 계획할 수 있나? 그렇기에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계획하는) 사람을 이분법으로 가르게 되고, 가르치는 사람 중심으로 교육이 진행되는 것은 아닌가? 인간을 인갑답게 만드는 것이 교육이라면, 교육을 거부하거나 교육 받지 못한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는 건가? 그러니 때려서라도 가르친다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는 것 아닌가? 인간다움은 과연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는 건가? 그렇다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 존엄하다는 인권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 아닌가? 등등. 날을 세우면 세울수록 인권과 교육은 한없이 멀어지기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형적인 교육의 틀에 인권만 살포시 얹어놓는다고 곧바로 인권교육이 되는 건 아니다. 학교에 인권교육이 정착하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의 학교 교육의 관행을 바꾸지 않은 채 ‘인권’이라는 교과가 생긴다면? 아마 세계인권선언을 달달 암기해 시험보고, 때마다 지겨운 인권 포스터를 만드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현실에서 인권교육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면 그만인 걸까? 갑갑한 학교 현실이지만 인권을 고민하는 교사들이 노려볼만한 ‘틈새’는 없는 것일까?

이런 고민들을 나눠보고자 ‘2011 여름 교사인권감수성향상 직무연수’(3일간, 18시간 진행)의 한 꼭지로 ‘인권적으로 교육한다는 것은?’을 기획했다. 굳을 대로 굳어버린 ‘교육’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 살아 숨 쉬는,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육적인 것’을 더듬어보는 여정. 여행길에 오른 배가 암초에 휘말리지 않고 순항하기 위해서는 길잡이가 필요하다. 때로는 소설의 주인공이, 때로는 영화의 주인공이, 때로는 실제 교사가 그 길잡이 역할을 했다.

날개 달기 - ‘교육적인 것’에 다가가기

‘가장 인권적인 것이 가장 교육적인 것이다.’는 학생인권조례 운동을 상징하는 대표 문구다. 연수에 참여한 교사들은 무엇이 가장 교육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까? 서로의 중심 추를 확인할 겸, 생각의 차이를 발견할 겸, 입 트기도 할 겸 ‘가장 ◯◯한 것이 가장 교육적인 것이다.’ 문장을 만들어보고 짤막한 이유를 적는 활동으로 프로그램의 문을 열었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교육적이지요. 교실에 있는 아이들은 똑같지 않아요. 한 명 한 명의 아이들 각자 취향도, 감정도, 원하는 것도 모두 달라요. 교사와 학생이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을 때 아이들도 자기 자신을 보여주기 시작해요. 학교는 지나치게 형식을 강요해요. 자연스러움을 오히려 거스르게 됩니다.”
“가장 한숨 나오는 것이 가장 교육적이지요.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도, 언제나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 한숨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교사가 아닌 기계가 되어 버립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교육적이지요. 교육은 밥이나 공기와 같아요. 모두가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권리여야 합니다.”
“가장 즐거운 것이 가장 교육적이지요.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르면서도, 서로 통하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결국 교육은 관계의 문제라는 것. ‘교사인 나는 학생들과 어떻게 만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만날 것인가’가 고민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참여자들이 품고 있는 교육의 원칙과 방향은 원대하나, 현실적인 조건은 그렇지 않다는 서글픔. 이 서글픔의 실체를 구체화할 수 있는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보고자 학교를 배경으로, 교사가 주인공인 소설과 영화를 토론의 재료로 삼았다.

더불어 날갯짓 1- 매체 속에 등장하는 교사와 나는 얼마나 닮아 있나?

소설 ‘완득이’(똥주),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키팅), ‘고백’(베르테르), ‘클래스’(마랭)에 등장하는 교사를 토론의 장에 초대했다. 소설은 똥주의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는 대사를 몇 가지 뽑아서 가져갔고, 영화들은 각 영화당 5~10분 정도씩 문제적 장면들을 모은 편집 영상을 준비했다. 작품을 본 참여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참여자도 있어 대략의 줄거리에 대한 간단한 설명도 함께 했다. 한 작품씩 차례로 보며 각 인물들이 어떤 교사인지, 어떤 교육관을 가지고 있는지, 한계는 무엇인지, 이 사람의 교육적 실천이 성공한/실패한 이유는 무엇인지, 정말 성공/실패한 것인지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미리 작품을 공지하고, 참여자들이 작품 전체를 보고 올 수 있도록 안내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본 후 토론의 예>

▶ 키팅은 정의롭고, 개념 있고, 카리스마 있는 전형적인 캡틴형 교사다. 교사를 시작하며 한번 쯤 다들 롤 모델로 삼을 만한 교사다. 다시 봐도 눈물이 난다.
▶ 현실에서 키팅 같은 교사가 있을 수 있나? 고등학교는 특히 교사가 수업을 마음껏 할 수 없다. 게다가 아이들이 예전처럼 교사를 ‘따르지’ 않는다. 교사가 아이들을 카리스마 있게 지도하고, 이끄는 전형적인 구도는 80년대라면 몰라도 지금은 통하지 않는다.
▶ 영화에 등장하는 학생들이 키팅의 교육에 감동받았던 이유는 자유의 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최초의 일탈은 키팅이 제공했을지 몰라도, 보수적인 학교 시스템에 조금씩 저항해 나가는 과정은 아이들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아이들 스스로의 성장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제고사를 거부한 건 학생들이었는데, 교사를 징계하는 것처럼. ‘교사가 말한 대로 애들이 휘둘린다.’고 말하는 건 학생들 스스로 판단하고, 갈등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상상을 전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사가 있는 작품을 재료로 토론 했을 때 가장 큰 장점은 재미가 있다는 것. 살아있는 인물, 생생한 사건을 바탕으로 대화를 하니 몰입도 높은 토론이 이루어진다. 둘째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혹은 사건이 참여자 각자의 감정과 기억을 건드린다는 점이다. 자연스런 감정 이입은 자기 개방으로 이어지고, 각자의 경험을 터놓을 수 있는 장(場)이 펼쳐진다. ‘감성적인’ 토론을 진행하기에 적합한 방식이 아닐까 싶다. 어떤 작품이 참여자들의 경험을 이끌어내는데 효과적일지, 어떤 장면이 토론해볼 만한 문제적 장면인지를 선별하는 작업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

더불어 날갯짓 2- 본격! 두 분 토론

작품을 매개로 발견한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좀 더 밀도 있게 끌어가기 위한 마지막 순서로 <두 분 토론>을 진행했다. 학교 현장에서 느끼는 인권과 교육의 긴장을 솔직하고 선명하게 토론해 보고자 현장 교사 두 명(A, B)을 패널로 모셨다. 일반적인 패널 토론과의 차이는 패널과 객석(청중)의 분리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 패널은 이야기를 트는 길잡이 역할을 할 뿐, 특별히 더 많은 발언 기회와 발언 시간을 갖지 않는다. 다만, 난상 토론이 아니라 쟁점을 명확히 한 토론으로 만들어보고자 A타입 교사와 B타입 교사로 구분했다. 참여자들 역시 아래와 같은 심리 테스트를 통해 자신의 성향을 파악한 후 본격 토론에 들어갔다.

<자기 성향 판단 테스트: 전자가 A 후자가 B>

1) “학창 시절에 어떤 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VS “교사는 학생들이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이다”
2) “아이들 곁에는 좋은 어른이 있어야 한다.” VS “아이들 곁에는 좋은 친구가 있어야 한다.”
3)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을 깨우는 것은 교사로서의 최소한의 예의/의무이다.” VS “수업시간에 잘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잘 수밖에 없는 이유나 상황에 더 마음이 쓰인다.”
4) “어떻게든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사로서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VS "지금의 학교 현실에서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딴 짓’을 하는 것도 학습권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5) “때로는 교사가 악역을 맡아 학생들을 엄하게 꾸짖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VS “교사의 잔소리는 학생과 교사의 거리감을 증폭 시키며, 눈치 보는 습관을 갖게 만들 뿐이다.”
6) “학생이 나의 훈계를 듣고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면 기특하고, 안도감이 든다.” VS “학생에게 훈계하는 내 자신이 꼰대처럼 느껴지며 후회가 밀려든다.”
7) “학생들이 교사나 학교를 상대로 문제제기 할 때,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춰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한다.”(청소년 인권활동가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VS “인권을 접하면 학생들이 ‘싸가지’ 없고, 까칠해진다.“

사전 준비로 미리 A와 B교사에게 현장에서 드는 고민을 정리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이 고민 편지를 곧바로 사례로 활용해 토론을 진행했다.

<사례 토론 예시>

[사례 1 요약]
“약육강식의 논리를 철저히 따르며 ‘약한’ 교사나 학생을 괴롭히는 학생이 있다면? 인권에 앞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가르쳐야 하는 것은 아닌가?”

▶ 노골적으로 기간제 교사나 여교사를 괴롭히는 집단이 있다. 교사의 입장에서 그런 아이들의 행동의 변화, 생각의 변화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
▶ 교사가 학생을 훈계해서 예의를 가르치려다보면, 오히려 엇나가는 경우가 많다. 교사도 상처받는 존재임을 학생들이 느끼기 위해서는 교사가 오히려 학생에게 자기감정을 솔직히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오히려 교사도 자유로워진다.
▶ 대개의 경우, 약한 교사를 괴롭히는 학생들은 주변의 다른 친구들을 의식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힘 있는 존재임을 친구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 이를 그냥 예의가 없는 것으로 표현하면, 오히려 더 중요한 학교 안의 약육강식의 구조를 볼 수 없다.
▶ 교사 자신도 ‘힘겨루기’에 참여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아이들과 교사 사이에 끊임없이 긴장이 발생하는 것은 교사가 대등한 인간이 아닌 권력자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 보통 교사들은 학생들이 자신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것조차 예의가 없는 것으로 본다. 말대꾸한다고 혼내는 것이 대표적. 이런 것을 예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예의 없음은 약자를 괴롭히는 것.
▶ 예의라는 말이 워낙 오염되어 있어 헷갈린다. 보통 예의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갖춰야 되는 경우가 많다. 권력이 느껴지는 예의라는 말보다 서로 평등하다는 의미로 존중이라는 말을 써보자. 학생들에게 ‘인간에 대한 존중’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나?
▶ 이는 훈계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학생인권조례 등을 통해) 학생인권이 보장되면, 학생들도 조금씩 구조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자신들의 불만을 교사에 대한 공격으로 푸는 일들이 줄어들 수 있다. 학생과 교사 사이에 힘의 균형이 생기면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교사가 져야 하는 상황도 훨씬 줄어든다.

교사들이 흔히 속으로 생각하지만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신념들, 인권을 고민하지만 가끔씩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들을 솔직히 드러낼 수 있었던 건 A, B 두 길잡이 교사가 ‘방어막’을 치지 않고 치열한 토론의 물꼬를 텄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참여자들도 어느새 함께 고민하는 동료의 위치에서 ‘날 선’ 논쟁을 벌였다. A, B 두 교사가 일상에서 느끼는 딜레마를 토론 사례로 준비한 것 역시 토론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앞선 영화를 활용한 토론과 <두 분 토론>은 둘 다 서사가 있고, 인물이 살아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딱딱한 토론의 방식에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인권교육에서 토론 기법은 다양하게 활용된다. 토론은 서로의 논리를 견주며, 생각의 차이를 발견하고, 자신의 관점을 다시 세워나가는 과정이다. 토론의 재료는 참여자의 삶이어야 하고, 논쟁 끝에 남는 것 역시 서로의 삶이어야 한다. 그런데 때로는 이 과정이 승패 다툼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있다. 찬성과 반대로 나눠 인위적인 그룹 토론을 진행하고, 더 ‘말빨’이 센 팀이 이기는 게임처럼 진행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사람은 없고, 논리만 남는 기이한 말잔치가 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하려 노력하는 교사, 학교 시스템의 ‘부품’으로 자신을 전락시키지 않으려는 교사들은 여전히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학생들을 (입시 관리하지 않고) 방치한다, 화목했던 교무실에 분란을 조장한다’는 혐의를 달고 산다. 그 혐의는 때때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한다. ‘내가 애들을 지금 닦달하는 것(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애들의 미래를 위해서는 더 나은 것 아닐까? 교사라면 애들에 대한 책임감을 더 크게 느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자기 안의 의구심이 수시로 고개를 든다.

3시간의 여정으로 이 모든 흔들림을 멈추게 할 명쾌하고 확실한 정답이 나올 수 있는 건 아니다. 인권은 쉽게 정답을 허용하지 않는 아리송한 것이니까. 그러나 집단 지성/감성의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 토론을 마무리하며 참여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아이들을 나 홀로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그 무한 책임론에서 벗어나자고, 그러면 오히려 아이들과의 인간적인 관계가 열린다고. 교사로서의 윤리와 당위를 내려놓으면 다른 세계가 보인다고. 교육적인 것은 (서로가 고통스럽겠지만) 학생들과 세상의 진실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학생들의 삶은 학생들의 몫으로 남겨둬야 한다고.

덧붙이는 글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266 호 [기사입력] 2011년 09월 07일 13: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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