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 공룡트림] 청소년 해방구를 만들자

『우리들의 7일 전쟁』과 『열일곱 살의 털』

이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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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개봉한 영화 『여고괴담』은 “한국적 교육현실에 공포영화의 문법을 결합한 수작”이라 평가받는다. 이 영화는 교육현실과 공포영화를 연결하며, 학교를 공포의 공간으로 구현해 냈다. 1980년대 말의 교육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들어 더 확고하게 1등만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달려가는 학교는 점점 더 외부 사회와 차단되고, 그들만의 괴담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학교에 흐르는 싸늘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아 먼지만 쌓여가는 폐가를 닮았다. 영화는 철저히 학교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상만을 프레임 안에 담고 있다. 프레임 바깥의 사회와는 전혀 소통할 기회가 없다. 『여고괴담』의 서늘한 공포는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인 일상과 그 안에서 생기는 원한들이 밖으로 뻗어나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담벼락 안에 갇혀 서서히 팽창하면서 조금의 여백도 보이지 않는 순간 터져 나온다. 학교는 외부와 차단되어 폭력을 일삼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원한과 아픔을 꽁꽁 숨겨 두는 공포의 공간이다. 『여고괴담』은 ‘학교=공포’라는 등식을 하나의 원형으로 구현해냈다.

‘학교괴담’이 ‘학교=공포’라는 등식 속에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 언어를 가지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청소년의 이미지를 생성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근래 청소년들을 말할 때 많은 이들이 ‘무력감’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입시지옥, 강제학습, 성공이냐 실패냐의 갈림길 속에서 그저 묵묵히 순응하며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청소년소설 역시 ‘지금 여기’ 청소년들의 억압받는 현실을 그려내느라 분주한, 매우 의미 있는 문학적 시도이기도 하다.『스프링벅』(배유안, 창비), 『바람이 불어, 네가 원치 않아도』(이상운, 바람의 아이들)와 같은 작품들은 벼랑인지도 모르고 등 떠밀려 달려가는 ‘스프링벅’들, 즉 청소년들의 이미지를 선명히 그리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감동 뒤에 남는 의문점은 청소년을 피해자로서만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피해자-가해자의 이분법 속에서 바라보면, 자칫 ‘피해자’의 여린 수동성들 더 주목하여 바라보게 된다. 폭력과 차별이 발생하는 구조를 탐색하기보다는 피해자의 가녀림을 더 먼저 살핀다. 피해자는 언제나 수동적이고, 미성숙하고, 여리며, 자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로 고착되고야 만다. 바로 오늘날 청소년의 이미지가 그렇다.

‘머리카락’의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나 - 『열일곱 살의 털』

그 중에서도 청소년이 가진 자발적 힘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낸 작품이 있어 살펴볼까 한다. 그 중 하나는 2008년 작 『열일곱 살의 털』(김해원, 사계절)이다. 이 책은 여러 털 중에서도 ‘머리털’에 대한 이야기다. 머리카락 길이를 단속 받고 있는 청소년 현실에 밀착하였다. 주인공 일호는 열일곱이 되던 날, 태성이발소를 대대로 꾸려오고 있는 할아버지 앞에서 머리카락이 잘린다. 사실상 이 작품 속에서 머리카락 길이를 통제하는 억압의 실체는 학교로 그려지고 있지만, 막상 주인공 일호는 할아버지에게 두발 단속을 당한다. 그리고 잘려진 머리카락은 잘려진 욕망으로 묘사된다. 땅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성가신 쓰레기”이자, “사내가 되지 못한 사내아이의 욕망”이며, “도리어 밤마다 자라나고 아침마다 솟아”난다. 다시, 역으로 나이가 들수록 머리카락은 짧아지지만 “용돈은 올라”간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단정한 두발로 나라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굳건한 철학 아래에서, 일호는 본능적 욕망을 거세당하는 방식으로 어른이 되는 과정을 밟는다.

『열일곱 살의 털』에서 일호의 머리카락은 아버지와의 건강한 대결이 없기 때문에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아이로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호는 어린 시절 홀연히 가방 하나 메고 떠나 버린 아버지의 부재를 끊임없이 의식한다. 어린 시절에는 제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을 옆에서 봐주는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어른이 되지 못할 것을 걱정한다. 사춘기 10대에 들어서는, 머리카락을 자를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로 함께 싸우고 대결할 아버지가 없어서 성장하지 못할 거라 걱정한다. 『열일곱 살의 털』에서 머리카락은 잘려나간 본능적 욕망이고 아버지와의 대결이 부재하여 성장하지 못한 열일곱 살 소년의 웅크린 자아를 상징한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잘려나간 본능적 욕망에 대한 성취를, 부재한 아버지가 남기고간 다락방 물건을 통해 해결한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물건으로 일호는 자신의 본능적 욕망을 채운다. 일호의 진짜 결핍은 ‘잘려나간 본능’에 있기보다는, ‘아버지의 부재’에 있다는 것을 강력히 호소한다. 머리카락의 길이가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부재가 문제다.

본능의 발산이 잘려나간 공간이자 아버지와의 대결도 가능하지 않은 결핍의 공간인 머리카락이 느닷없이 학교의 교문을 통과하자 모범의 상징으로 격상된다. 학교 규정인 ‘오삼삼’보다 더 짧은 ‘삼삼삼’의 머리카락이, 학교에서는 모범의 상징이고, 성공을 담보할 미래의 표상이며, 성장의 주인공이 된다. 학교 통제의 욕망이 원하는 머리길이와 일호의 결핍된 머리카락 길이가 일치하는 것은 묘한 아이러니를 만들어 낸다.

‘학교의 통제 규정’이 주인공 결핍의 상징을 모범으로 끌어 올리면서, 주인공 일호는 모순적 현실을 자각한다. ‘두발규제’의 의미를 몸소 자각해 나가고, 행동의 힘을 얻는다. 물컹하던 일호가 오히려 단단해지는 계기가 된다. 게다가 모범적인 아이로 인정받으면서 친구들과는 거리가 생긴다. “반 아이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묵묵히” 견뎌야 했으며, 갑작스럽게 친절해진 선생님들의 이중성도 목격한다. 자신의 두발이 모범적인 것으로 인정받는 순간, 학교의 불합리를 몸소 깨달아가는 일호는 제 머리카락이 아닌, 친구의 머리카락을 지켜주고 싶은 욕망까지 생긴다. 그리고 결국, 학생의 머리카락을 라이터를 위협하는 ‘매독’ 선생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달려가서 라이터를 빼앗아 든다. 일호는 이제 인터넷을 뒤져 ‘두발자유화’에 대한 정보를 찾고 문건을 작성하고 친구들을 모아 시위를 벌이려 계획한다. 학교의 통제가 결핍을 만들어내기 보다, 새로운 욕망을 생성하고 힘을 부여해 주는 것으로 작용했다.

일호의 진짜 결핍, 아버지의 부재 문제로 돌아가 보자. 문건을 빼앗기고 상담실에 있는 순간,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가족들에게 연락도 없이 홀연히 사라진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와 그 동안 미뤄 두었던 아버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권력을 제멋대로 부리는 권위주의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민주적인 면모를 지닌 모습을 갖췄다. 아버지는 상담실에 면담을 와서는 일호의 행동이 얼마나 정당한 요구인가를 조목조목 밝히며 그의 편을 들어준다. 결국, 일호는 ‘무기정학’ 통지서를 받게 되지만, 일호의 정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돌아온 아버지가 자신의 오래된 ‘아버지 있음’의 소망들을 채워주게 되니 오히려 만족감을 느낀다. 게다가, 사실상 학교에서 일호의 ‘무기정학’과 ‘피켓 시위’는 일호가 완벽하게 가족 구성원의 구도를 갖추는 데에 기여하게 된다. 일호가 ‘무기정학’을 맞는 것에 아버지가 일조했음을 엄마가 알게 된 사태는, 오히려 두 사람 사이가 다시 잘 시작될 수 있음을 예언해주는 계기점이 됐다. 일호의 피켓시위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가슴에 품었던 원한을 뿜어내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이렇게 단단히 엮어진 일호네 가족은 막강한 힘을 갖추고 학교로 들어와 두발자유화의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 준다. 삼대의 결합은 학교의 힘보다 막강했으며, 학교는 결국 무릎을 꿇는다.

『열일곱 살의 털』은 분명 일호의 아버지 부재에 대한 결핍과 욕망 충족이라는 구조에 더 큰 힘이 실려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의기투합하여 학교에 들어와 도발을 벌일 수 있었던 용기는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그것은 아버지가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옴으로써, 삼대의 축이 결함이 없는 완전한 형태로 빚어져 확고한 자기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할아버지가 도발할 수 있었던 근거는 학생의 두발자유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보다도, 삼대의 결합이 빚어낸 가부장제의 강력한 힘에 근거하여 자신의 힘을 발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발자유화를 이룩하는 순간은 학교 통제에 대항해 자유를 이룩한 순간이라기보다는 일호 자신이 내면에 가지고 있던 아버지 부재로 인한 결핍을 충족시키는 소망 실현에 가깝다. ‘머리카락’을 통해 다루어야 할 지점을 명확히 관통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맞설 준비 되셨습니까! 해방구를 만들자. - 『우리들의 7일 전쟁』

한국의 청소년 소설을 보는 것에 좀 지쳐 있었다. 피해자에 머물러 있는 수동적인 내면을 읽는 것은 그렇게 즐거운 일이 아니다. 소설 속에서 읽고 싶은 것은 폭력과 차별의 구조 속에서도 그것을 당장 바꾸어내지 못할지언정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움직이고 있는 살아 있는 내면이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속 제제가 여전히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이유는 가족이 내휘두르는 폭력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실험하기 위해 끝없이 움직였던 주인공의 심리에 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그런 것 말이다. 지금 청소년 현실에서 진짜 필요한 이야기가 뭘까 고민하고 있을 때 『우리들의 7일 전쟁』(소다 오사무, 양철북)이 가진 유쾌한 도전이 반갑게 느껴졌다.

『우리들의 7일 전쟁』은 2011년 양철북에서 번역했는데, 일본에서는 1985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라고 한다. 어른권력에 대항하여 중학생들이 스스로 해방구를 만들어 저항한다는 내용이다. 읽다보면 배경이 1985년 일본인지, 2011년 한국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현실과 꼭 닮아 있다. 일본 역시 성적으로 서열화하여 일류 대학에 가서 좋은 곳에 취직하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하여 어린이, 청소년을 달달 볶고 있다. 먼 일본 땅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권력의 힘으로 자율권을 빼앗기고 무조건 복종하는 청소년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현실이다.

이 작품에서는 청소년들이 ‘해방구’를 만들기까지 동기가 된 특별한 사건이 그려지지 않는다. 소설은 약 스무 명의 청소년들이 사라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어른들이 우왕좌왕 한다. 어른들이 모여 긴급회의를 벌인다. “납치되었을 거야!” 부모의 허락 없이 아이들끼리 모여 어딘가를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밤늦도록 연락 없이 오지 않는 아이들은 분명 자기 힘으로 어딘가를 갔을 것이란 상상을 할 수 없다. 걱정에 가슴을 끓고 있을 때 해방구 지역 방송이 나올 것이란 예고를 듣고 귀를 기울인다. “여기는 해방구! 해방구에서 뭐하느냐고요? 그건 어른들하고는 상관없는 일. 어른들은 각오하고 기다리는 게 좋을걸요.” 청소년들이 사라지고, 해방구를 만들었다는 선전포고. 그것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이 소설 자체가 세상 속에 던지는 해방선포선언문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야기 자체가 힘을 가지려면 해방구라는 것을 만들기까지의 주인공의 내적 동기가 생성되는 과정이 세밀하게 그려져야 했을 수 있다. 과도하게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는 부분은 거칠게 느껴진다. 소설로 보자면 단점이 많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힘을 가지는 것은 책 밖 현실로 ‘강한’ 이야기 하나를 과감하게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어린이, 청소년을 권력으로 구속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 그 사실을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일단 맞서고 보자!

해방구는 학교를 벗어나 버려진 건물 속에 차려진다. 해방구에 오래 남아 살 생각도 없다. 딱 며칠만 해방구에 살며 어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어른한테 방해받지 않는 아이들만의 성!” 그것을 구축하고 경험하고 충분히 향유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었다. 순간적인 결정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으로 이루어졌다. 미리 미리 음식을 비축하여 두는 계획도 잊지 않는다.

“우리가 싸울 상대는 어른이란 걸 잊으면 곤란해.”
“그래 아이는 어른의 꼭두각시가 아니야. 자기들 뜻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지. 그걸 똑똑히 알게 해주겠어.”
“누구의 명령도 아니에요. 중학교에 들어온 지 네 달이 지났어요. 규칙과 명령은 진짜 지긋지긋하다고요. 그래서 아무한테도 명 받지 않는 장소를 만든 거예요. 그것이 바로 해방구예요.”

학교 안에서 저항하지 않고 따로 해방구를 만들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학교는 거대한 힘으로 청소년을 즉각적으로 짓누르는 공간이다. 여고괴담처럼 공포에 질린 스토리만 상상하게 될지 모른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학교 자체를 바꾸는 즐겁고 유쾌한 상상력이 만들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한편에 들기도 한다. 그 길로 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으로 ‘해방구’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 소설 속에서 ‘해방구’는 어른들 몰래 만들어지고, 선전포고 하듯 그 속으로 밀려들어간다. 어른들은 절대 ‘출입금지’. 누구의 명령이 아니라 청소년 스스로의 요구와 생각대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무권력 상태. 아니, 다중 권력 상태라고 해야 할 수도 있겠다. 이 안에 있는 청소년들이 각자 자신이 가진 절실한 이유와 목적으로 모여 있기 때문이다. 단, 빠져나갈 쥐구멍 같은 맨홀통로를 알려 주거나, 배고플 때 먹거리를 지원해 줄 수 있는, 권력을 가지지 않은 최소한의 원조를 제공해주는 어른들과는 소통한다. 약 열흘의 시간이 흐르고 이들은 해방구를 빠져나온다. 들어갈 때 몰래 들어갔듯이 나올 때도 맨홀 구멍을 통해 몰래 빠져나온다. 어른들은 청소년이 사라진 해방구에 몰려 들어가 이 안에 있던 아이들이 블랙홀로 빠졌다고 아비규환이다.

‘해방구’의 공간은 어른의 권력과 소망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청소년이라는 개개인의 인간들이 독자적으로 권한을 가지고 있기에 침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치라고 생각된다. 해방구까지 문제집을 들고 와서 올려다 줄 테니 공부하라는 어른들에게 무슨 말이 통하랴. 아무리 말하고 외쳐도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 어른들이 만든 규칙과 명령이 아니라 지기 자신의 소망과 욕구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일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해방구에 있던 청소년들은 해방구를 빠져나오면서 해방구를 잃었지만 슬프지 않다. “야아. 해방구~ 안녕!”이라고 “더는 크게 소리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소리친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건물로서 해방구는 ‘어른’들에게 점령당했지만, 짧지만 강렬하게 그들 가슴 속에 남은 ‘해방구의 경험’은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해방구를 가슴에 품은 청소년들. 그들의 뒷이야기가 몹시 궁금하다. 학교 밖이 아니라 학교 안에, 집 밖이 아니라 집 안에 해방구를 만들어 당당히 맞서 나갈 그들이 나는 몹시도 궁금하다.

왜 부모님께 대들지 않아야 합니까!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가 던진 말이다. 왜 대들지 않아야 합니까. 왜 학원에 다녀야 합니까. 왜 학교에 다녀야 합니까. 왜 공부해야 합니까. 어린이, 청소년들은 도무지 “왜” 하는지도 모르고 등 떠밀리듯 길을 가고 있다. 어린이, 청소년의 입장에 서서 어른들을 바라보면 어른들이 참 너무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누군가는 왜 어른과 어린이, 청소년 사이를 대립적으로만 보냐고 따져 물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과도하게 한 쪽으로만 권력이 몰려 있기 때문에 어린이, 청소년 스스로 크게 맞서 저항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보지 못한다.

아직 우리 청소년소설에서는 이런 ‘권력’의 문제, ‘권위주의’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도전한 이야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열일곱 살의 털』에서 그런 부분을 어느 정도 기대했지만 그 부분까지 뚫고 가지 못하고 ‘머리카락의 이야기’에만 머물렀다.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 청소년의 문제를 ‘권위주의’라고 하는 문제의식으로 바라보고 성찰한 경험이 너무 적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청소년 삶을 ‘무기력’, ‘피해자’의 프레임으로만 바라보던 관점을 벗고 새롭게 도전할 필요가 있다. 비록 소설 속 사건이긴 하지만 소설이 만들어 낸 해방구를 경험하며 내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야기’가 가진 진짜 힘 아니겠는가. 청소년소설에 그래도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제도권이 몰아붙이고 있는 청소년의 현실에 강렬한 문제의식을 지니는 것에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더 많고 다양한 해방구를 경험할 수 있는 청소년소설이 만들어지길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이선주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입니다.
인권오름 제 274 호 [기사입력] 2011년 11월 08일 16: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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