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 공룡트림] 학교에 동물이 간다면(2)

이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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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된 동물들

김나무의 『뻥쟁이 왕털이』(사계절, 2008)의 여우 왕털이와 권영품의 『꼬리 잘린 생쥐』(창비, 2010)의 생쥐 빠른발은 아예 공부를 하거나, 살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인간들의 영역"으로 ‘겁없이’ 걸어 들어간다. 왕털이는 “숲속까지 휘젓고 댕기”는 “대단한 종족”인 인간들이랑 살다보면 “나중에 호랭이를 만나도 겁 안 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빠른발은 “낮에는 아이들이 지내는 곳이지만 밤에는 쥐들의 세상”이기 때문에, “고양이 걱정은 전혀 없다”는 말을 믿었다. 왕털이와 빠른발이 학교로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은 아주 힘차다. 마치 우리가 처음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의 ‘설렘’처럼. 그러나 그 ‘설렘’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왕털이는 친구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온갖 뻥을 치느라 힘이 빠져가고, 빠른발은 잘난 쥐들만 살 수 있다는 학교쥐법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

여기서 왕털이와 빠른발은 어린이의 은유가 된다. 일상에 축제를 만들어 주는 존재를 자청하여 학교로 들어간 김기정의 두꺼비가 교사 역할을 한 것과는 차이가 난다. 왕털이와 빠른발은 어린이처럼 산다. 학교에 들어간 왕털이는 어린이의 행동양식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꼬리가 있고, 언젠가 둔갑술을 부릴 수 있는 대왕여우로 자랄 것이라는 점에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빠른발은 교실에서 햄스터인 척 얌전히 웅크리고 있다. 물론 아무도 없는 밤이 되면 기지개를 켜고 상자 밖으로 나오지만 ‘학교쥐법’ 때문에 편하지 않다. 우월한 존재와 열등한 존재를 나누고 차별하는 우리의 학교 제도를 닮았다.

왕털이와 빠른발이 학교로 걸어 들어간 목적은 개돌이, 두껍선생과는 사뭇 다르다. 축제와도 같은 새로움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들어온 낯선 존재 덕에 일상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는 현실주의의 지향을 적극적으로 내포하게 된다. 숲에 사는 여우가 학교에 들어간 덕에 ‘숲’을 기준으로 ‘학교’를 바라보게 만들고, 밤에 활개를 치고 다니는 쥐가 교실 속에 햄스터인 척 보살핌을 받게 된다는 설정 덕에 표상에 드러나지 않는 낮 동안의 진실을 밤의 이야기를 통해 심층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된다. 재미와 교훈이라고 하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충족하기 위한 서사전략이다. 하지만 두 작품이 그 전략을 풀어가는 방식은 극적 차이를 보인다.

『뻥쟁이 왕털이』의 경우에는 노고단에 살고 있는 왕털이가 인간이 살고 있는 곳에 가기까지의 탄력 있는 도입이 마지막까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왕털이가 ‘겁쟁이’로 설정되어 있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존재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털이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인간의 질서다. 선생님은 “사람들은 고개 숙여 인사”한다고 가르치지만, “여우는 고개를 숙이면 안”된다. 그래도 왕털이는 학교에 온 이상 “머리를 꾸벅 숙였”다. “딱 한 번인데 어때”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 딱 한 번의 고개 숙인 인사가 왕털이의 학교생활의 전부를 좌우하는 틀이 된다. 아이들은 왕털이를 반가워하기 보다는 “대왕여우도 별 거 아닌가”보다며 왕털이를 따돌린다. 왕털이는 숲에 살고 있는 여우의 생명력을 잃게 됐다. 그저 어느 날 전학 온 낯선 아이에 다름없게 됐다. 그리고 아이들과 친하기 위해 혹은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뻥쟁이’가 되고, 학교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전환된다. 아이들이 왕털이를 이해하게 되고 함께 놀기 위해 숲으로 놀러 올 것을 약속한다. 왕털이는 학교에서 실패했지만, 결국 아이들을 숲으로 끌어낸 것이다. 결말의 극적 반전이 앞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의 틀을 뒤흔드는 탐정물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결말에 이르러서 만나게 되는 전환은 작품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독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반전은 왕털이가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에 방점이 찍혀 있다. 여우가 학교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가지게 되는 기대치가 있다. 일상 속으로 떳떳이 걸어 들어간 적극적 시도가 소심한 여우 왕털이의 거짓말이라고 하는 설정 때문에 큰 빛을 보지 못한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다.

그에 반해『꼬리 잘린 생쥐』의 빠른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천진하다. 고양이에게서 도망치다 꼬리가 잘렸어도 “꼬리를 내주고 도망친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라며 즐거워 한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이다. 빠른발은 밤의 쥐라는 습성을 그대로 가지고 학교에 들어가기 때문에 어린이에게는 ‘동물’로서 발견된다. 왕털이가 교실 속에 들어가 하나의 어린이가 되어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과는 다르지만, ‘어린이’의 은유를 내포하고 있음엔 분명하다. 서로의 말은 못 알아듣지만 교실에서 지내기 위해 선생님 앞에 “교실, 교실”이라고 함께 외치는 장면은 학급 안의 어린이와 빠른발을 동일한 지점 위에 올려놓게 된다. 이야기 속의 어린이는 알아채지 못하지만, 독자만이 목격하고 있는 서로 다른 두 존재의 같은 외침이 주는 재미가 만만찮다. 그렇게 해서 결국 교실에서 살게 된 빠른발은 밤에는 홀로 남겨진다. 이 때 교실 속을 돌아다니는 빠른발은 몰래 교실에 들어와 장난치는 어린이를 닮았다. 선생님의 책상 속에 숨겨진 물건들을 꺼내어 갉아먹기도 하고, 분필로 칠판에 낙서를 하기도 한다. 잘난 쥐만이 살 수 있다고 가로막는 보초쥐들 앞에서도 기죽는 법이 없다. “나야말로 잘났다는 거지. 발 빠르지, 뭐든 잘 먹지! 노래도 잘 부른다고, 이 정도면 됐지?” 그리하여 결국 빠른발을 포함한 다수의 못난쥐들은 힘을 모아 소수의 잘난쥐들이 폭력을 멈추도록 이끄는 것으로 끝이 난다. 승리의 즐거움은 ‘구슬차기’ 놀이로 나눈다. 근대 교육에 대한 비판적 접근과 은유인지라 자칫 무겁게 가라앉을 수도 있는 지점을 즐겁게 마무리 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밤의 혼란이 잠잠해지고 그제서야 빠른발은 잠이 든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침에 학교에 와서 테이프에 잔뜩 묻은 털,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바둑알과 사탕, 부러진 이쑤시개를 본다. 빠른발과 함께 살고 있는 어린이는 모르지만 독자들은 알고 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런 장난기 어린 흔적들은 밤의 우화적 세계를 사실감 넘치는 세계로 느껴지도록 만들어 준다.

이미 모든 것이 규격화되고 프로그래밍된 틀 안에 살면서 자신의 본성을 거절당하며 사는 어린이들에게 ‘자유’는 없다. 어린이들에게 지금 가장 큰 소원이 뭐냐고 하니 이렇게 답한다. “24시간 놀고 싶다” “자유시간을 달라” “딱 일주일만 내 맘대로 살아보고 싶다”... 따라서 동물의 동물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어린이의 자유의지에 기반한 욕구를 긍정한다는 것과 일치할 수 있다. 게다가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일상 속으로 개돌이, 두꺼비, 매미, 고양이, 참새, 여우, 쥐가 직접 들어 왔지 않는가. 우에노 료는 어린이 일상에서 일어나는 환상 이야기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어린이는 자기가 참가할 수 있는 재미”를 원하며 “적어도 자기가 있는 곳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재미를 기대”한다고 설명한다. 일상에서 환상과 모험을 겪는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 생긴 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이 속한 “일상 세계에서 기대하던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동물이 일상 속에 들어와 벌이는 갖가지 사고들을 통해 즐거움을 만끽한다는 것은, 마치 현실로 겪는 것과 다를 바 없이 강력한 체험이 될 것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춤추는 재미로 단련된 몸과 마음을 차곡차곡 쌓아나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에 자유의 감각을 익힌 이들이 하나둘 모여, 도저히 이 억압을 견딜 수 없다고 용기 내어 일어날 수만 있다면!!
덧붙이는 글
이선주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입니다.
인권오름 제 290 호 [기사입력] 2012년 03월 21일 14: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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