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희의 인권이야기] 그래서 ‘제도’가 필요하다

김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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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침에 가는 할머니네 뒤에 밭이 있어요. 그래서 고추 50포기도 심어드리고... 저도 밭일은 안 해봤거든요. 근데 거기다 고랑 내서 그거 심고 콩 심고, 깨 심고, 상추도... 큰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해드렸거든요. 할머니가 구십이에요. 허리가 꼬부라져서 기어 다니시는데, 요구를 하니까 안 해드릴 수 없어서 거절 못하고 해드렸어요. 그리고 거기는 할머니하고 아드님하고 손주하고 세 분이 살고, 옆에 네 집이 세 들어 살거든요. 그 세 받아서 할머니가 사시는데, 아들, 손주 다 남자잖아요. 그래서 그분들 빨래 해주고... 옛날집이라 공동 화장실이 있어요. 세 들어 사는 사람들 같이 쓰는... 그래서 거기 화장실 휴지 같은 거 다 처리해야 하고 뭐 거의 그렇거든요”

작년에 경기도 농촌 지역에서 만난 요양보호사의 하소연이다.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났다. 그게 요양보호사가 할 일은 아니지 않나! 관리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주나 물었다. 관리자는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단다. “그거 해줄 수 있는 건데 왜 안 해주나? 맨날 하는 것도 아닌데...”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면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각자의 입장들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꼬부랑 할머니는 이렇게 생각하셨을 게다. 어디 다른 데 딱히 도와달라고 말할 사람도 없고, 저 사람 나라에서 돈도 받는다는데, 노인네가 이런 것 좀 해달라는 게 뭐 큰일이겠어?
파견업체의 관리자는 노동자의 불평이 마뜩치 않았을 것이다. 지금 업체 간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데 뭘 그 정도 가지고... 괜히 할머니 속 긁어서 다른 업체로 옮긴다 그러면 어쩌려구...
내가 당시의 요양보호사였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규정된 업무가 아니라면서 그 ‘힘없는 노인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었을까?

이런 난감한 경우 말고도, 요양보호사들이 겪는 치사하고 자존심 상하는 상황은 부지기수다. 멀쩡한 세탁기를 놔두고 수돗물 아낀다며 손빨래를 강요당하거나, 잠시 숨이라도 돌릴라치면 돈 받고 일하면서 왜 놀고 있냐는 타박을 받기도 한다.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요양시설은 ‘봉사’라며 휴일 무보수 근무를 시키는 경우도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요양보호사들은 이런 상황을 모두 감내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은 비단 장기요양 뿐 아니라, 돌봄 노동의 많은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난다.
때로는 ‘정(情)’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약간의 이기주의와 탐욕, 아니면 그저 악의 없는 무신경함이 이러한 문제들을 낳는다. 엄청난 검은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해도, 어쨌든 노동자들에게는 고통이다.

이들은 우연히 재수가 없었던 것일까? 정말 가족처럼 대해주는 환자와 가족들, 또 성심껏 노동자들을 챙겨주는 업체들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보면 ‘재수 이론’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 싶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그저 우연히 착한 고객을 만나길, 우연히 마음 좋은 고용주 밑에서 일하기를 기도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위 사진:[사진: 돌봄노동자들의 권리 찾기 캠페인(출처:프로메테우스)]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요양서비스를 예로 들자면, 예컨대 환자 머리 수 당 매출이 결정되고, 노동자의 인건비 절감을 통해서만 수익이 창출되는 지금의 무한경쟁 시장구조가 완전히 변해야 한다. 또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을 결성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고용 지속성이 보장되고 의견전달 통로가 마련되어야 한다. 즉 제도의 변화, 체계의 변화가 필요하다. 현장은 투전판을 만들어놓고 참가자들한테 선의의 경쟁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흔히들 우리사회의 의식 개혁이 중요하다고, 민주적인 시민의식 성장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감정노동자, 돌봄노동자들이 경험하는 악행 사례들이 전해지면 사람들은 공분하고 인간성의 타락을 질타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또 ‘알고 보면’ 이해 못할 일도 없는 게 세상살이다. 착한 고용주냐 악질 고용주냐에 관계없이, 개념 충만한 고객을 만나느냐 무개념 진상 고객을 만나느냐에 관계없이 건강과 안전을 보장받으며 일할 수 있으려면, 딱딱하게 들리지만, 배려 이전에 시민의식 이전에,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김명희 님은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입니다.
인권오름 제 290 호 [기사입력] 2012년 03월 21일 18: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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