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청소년=쯧쯧쯧?] 상식선을 넘어서면 무엇이 보일까?

빈곤/여성/청소년의 성(性)적 권리를 위하여(1)

한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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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의 성, 비행이거나 폭력이거나 둘 다 거나

웃지 못할 농담으로 글을 열어볼까 한다. 올겨울, 보수단체들이 서울학생인권조례안의 차별금지 항목 중 유독 ‘성적지향’을 문제 삼고 조례를 흔들어댔을 때, 많은 활동가들은 의문을 가졌다. 1년 전에 통과된 경기학생인권조례의 차별금지 조항에도 성적지향이 포함되어있는데, 왜 지금에 와서 총공세를 펼치는 걸까. 수도 서울을 수호하기 위함인가? 경기보다 서울이 ‘동성연애’에 더 취약한 공간인가? 이들의 사고회로를 추적하다 ‘아마도 경기도 때는 성적(性的)지향을 성적(成績)지향으로 오인한 것이 분명하다’는 제법 납득할 만한 가설이 제기됐다.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겪는 차별의 대표항목으로는 언제나 ‘성적(成績)차별’만이 꼽히는 현실, 한낱 머리카락 길이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완연한 무권리 상태에서 청소년의 성적(性的) 권리는 ‘듣보잡’ 수준을 넘어설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어디 청소년뿐이랴. 한국 사회에서 성적 권리, 아니 성적 권력을 ‘제대로’ 부릴 수 있는 존재는 경제력을 갖춘/이성애자/비장애/성인/남성 정도 아닌가. 임신-출산-양육의 틀을 벗어난 여성의 성에 대해서는 그토록 손가락질하면서도, 친족성폭력 가해 사실이 밝혀져도 모르쇠로 일관한 남성 정치인을 버젓이 국회의원으로 당선시키는 것이 한국 사회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10대의 성/연애/섹스 역시 ‘변태적인’ 성욕의 대상이 될지언정 그들 스스로의 성적 실천은 최대한 미뤄야할 것, 난감한 것, 위험한 것으로 줄곧 여겨진다. 그렇기에 어른들은 청소년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성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하거나 애써 밀어낸다. 청소년의 성은 비행이거나, 폭력이거나, 그 둘 사이의 경계 정도쯤에 위치할 뿐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권리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인권교육 워크숍에서 만난 한 교사가 들려준 이야기는 청소년(특히, 여성 청소년)의 성적 실천이 어떻게 제3자(보통, 교사나 부모)에 의해 헝클어지고, 뭉개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 학교 여학생이 남자 친구와 자기 집(정확히 말해, 그녀 아버지의 집)에서 섹스를 했어요. 서로가 원해서 결정한 일이었고, 피임 준비도 확실히 했지요. 그런데 일찍 귀가한 아버지가 이 둘이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노발대발하며 ‘현장 사진’을 찍고, 남학생을 성폭력 가해자로 신고했어요. 강간이 아니라는 오해는 풀렸지만, 두 학생 모두 학교에서 징계를 받았습니다. 학생들은 여러 교사들을 거치며 자신의 ‘죄’를 반복해서 진술해야 하는 모욕을 견뎌야 했습니다.”

연인인 두 청소년이 안전한 섹스를 위해 준비한 콘돔은 자신이 본 장면이 강간이었다고 ‘믿고 싶었던’ 아버지의 시선을 통과해 치밀한 범죄도구가 되었다. 문제설정의 주도권을 쥔 아버지는 둘의 관계를 폭력으로, 여성 청소년을 무력한 피해자로, 남성 청소년을 무도한 가해자로 자리매김했다. 모욕적인 과정을 통해 둘은 자신들의 행위가 자발적이었음을 입증해야만 했다. 그러나 10대의 성은 자발적이어도 문제다. ‘학생의 신분에 어긋나는 짓’을 행한 이들은 ‘비행’을 범한 것이므로. 학교는 도덕의 이름으로 이들을 비난했고, 징계로 사건을 마무리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도덕의 탈을 쓴 야만과 폭력

‘성은 문란한 것, 학교와 사회의 기강을 해치는 것’이라는 도덕적 관점은 청소년을 보호하기는커녕 그 자체가 폭력을 낳는다는 점에서 일단 문제다. 10대의 성적 권리에 대한 논쟁을 할 때, 반드시 불거지는 문제가 바로 ‘임신’ 인데, 다음의 대화 흐름을 살펴보자.

A: 애들이 성을 즐기고 섹스를 한다니. 지금, 임신을 조장하려는 겁니까?
B: 10대 여성의 임신이 문제라는 것이죠? 왜 문제인가요?
A: 어린 나이에 결혼도 안하고 임신하면 몸 버리고 인생 망치는 거지요. 그리고 애가 애를 키우는 게 말이 됩니까?
B: 그렇다면 10대 비혼모에 대한 낙인과 차별을 없애고, 출산과 양육을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고,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 것 아닌가요?
A: 아니, 그게 무슨 자랑할 일이라고 학교에 계속 다니게 합니까? 다른 애들까지 물들이면 어떡하려고.
B: 흠... 그리고 모든 섹스가 임신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요. 원치 않는 임신이 문제라면, 효과적인 성교육(관계교육, 피임교육)을 활성화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임신이 가장 걱정되시는 거라면, 동성애자 청소년들의 섹스는 괜찮다는 거지요?
A: 한창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에 성 쪽으로 눈을 뜨게 하자는 겁니까? 지금 애들을 타락시키자는 거요? 동성애라니, 에이즈를 창궐하게 할 거요?
B: 눈을 감을지, 뜰지, 반만 뜰지는 본인이 결정할 수 있어야지요. 그걸 누가 동의하고, 허락하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동성애를 에이즈와 바로 연결시키는 건 무슨 근거를 갖고 그러시는 건가요?
A: 근거는 무슨 근거요! 성경에서도............................

A의 이야기는 전형적이며, 익숙하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 신문의 사설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논조이며, 도덕을 방패 삼아 인권적 질문을 원천봉쇄하는 이들이 주로 쓰는 화법이기도 하니까. 이들이 기실 걱정하고 있는 건 청소년들이 아니다. 지켜야 할 것은 차별적인 질서일 뿐 그 차별적 질서가 밀어낸 존재들에게는 좀처럼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지켜야 할 ‘상식선’이 있고, 청소년이 넘어서면 안 되는 울타리가 있다는 전제는 그 기준선과 울타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정말 필요한 것인지를 질문할 수 없게끔 만든다. 미성숙하며,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간주되는 청소년을 향해서는 이 울타리가 더욱 촘촘하고 높게 쳐진다. 어른과 청소년을 가르는 울타리의 대들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성/연애/섹스다. 울타리가 무서운 건 우리 스스로 합의한 적 없는 그 기준들이 너무도 자연스레 우리 몸과 마음에 스며든다는 점이다. “A와 같은 견해에는 반대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청소년과 성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색하고 위험해 보인다. ‘밝히는 애들’ 보면, 솔직히 불편하다.” 고 마음을 터놓는 교사, 학생, 부모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청소년이 ‘해서는 안 될 짓’을 정해놓고, 청소년의 ‘비행’을 단죄하는 것은 국가가 사회를 통제하고 관리하는데 유용하게 이용되기도 한다. 청소년 비행의 상징물로 흔히 꼽히는 것이 술, 담배, 섹스다. 술, 담배, 섹스가 서로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 그것이 청소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정말 비행인지는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비행을 행한 청소년을 맞닥뜨렸을 때의 우리의 감정적 반응이며, 그것이 우리의 사고를 압도한다는 점이다. 이는 언론의 보도 태도와도 직결되는데, ‘쟤들이 저러고 다니니까 밑바닥 인생인 거야.’라는 식의 접근법은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총체적 어려움을 개인화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완전한 문제설정의 바꿔치기가 일어나기도 한다. ‘쟤들 때문에 세상이 어수선한 거야.’처럼 사회악으로 ‘무서운 10대’를 지목하고,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청소년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혼란과 갈등을 일으키는 10대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국가의 중요 시책으로 떠오르며, 버릇없고 폭력적인 요즘 애들에게 필요한 건 인권이 아니라 권위를 가진 교사와 부모라는 식의 대책들이 서슴없이 추진되고 있다. 이 공포정치가 목표로 하는 것은 ‘애들만 잡는 것’이 아닐 테다.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성찰할 수 있는 사고를 마비시키는 것, 인권과 민주주의처럼 ‘잡음’을 일으킬 수 있는 가치들을 질서 앞에 억누르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무서운 일 아닐까.

무엇이 진짜 문제인가

여기에 빈곤축이 더해지면 어떤 그림이 펼쳐질까? 빈곤 역시 인권이 아닌 도덕적 관점의 수준으로 해석되곤 한다. 가난의 원인도 개인의 게으름과 무능력에서 찾고, 가난을 극복할 책임 역시 개인에게 있다고 여겨지지 않나.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받게 될 모욕과 상처, 어려움에 덧붙여 빈곤의 프리즘을 통과한 차별의 양상은 한층 더 두텁고, 따갑다. ‘(여성 청소년을 향해) 부모님이 먹고 사느라 애 키우는 데 관심이 없으니 치마가 저 꼴이지.’ 라든가, ‘가난한 집에서 애는 왜 저렇게 많이 나은 거야. 그런 것만 보고 배워서 벌써부터 남자애들 만나고 다니나 보지?’와 같은 인식론적 폭력이 쏟아지기도 하고, ‘가난한 니들끼리 지금 연애하고, 결혼하면 평생 지금처럼 살아야 되는 거야. 그러고 싶어? 쫌만 참고 공부하고 노력하라’는 조언을 빙자한 협박이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조건들을 ‘쌩 까고’ 사랑하고, 연애하고, 섹스하려해도 갈 곳이 없고, 쓸 돈이 없기 때문에 부딪히는 현실의 벽도 높다.

빈곤은 경제적 어려움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돈이 없다’는 것만으로 빈곤을 경유한 삶을 설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자원들로부터 소외되거나, 타인과의 관계망 바깥으로 밀려나기 쉬운 조건에 놓여있다는 점을 들여다볼 때 정말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얼핏이라도 그 상이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빈곤을 경유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성적 권리를 드러내고,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민들이 심화되어야 할지 짚어보려고 한다.
덧붙이는 글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298 호 [기사입력] 2012년 05월 16일 14: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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