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날다] 공경 받을 노인 vs 폭주노인의 이분법

우대와 보호의 비틀린 경계에서 노인 ‘인권’을 말하다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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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선언(1948년)은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타고난 존엄성과 평등하고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전 세계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기초이다"라 말한다. 굳이 이 문장을 들먹이지 않아도 노인도 인권의 당사자인 것은 생각할 것도 없이 당연하다. 그런데 묘하게 낯선 느낌은 이 사회가 나이의 위계를 철저히 유지하고 있으며, ‘노인을 우대하라’, ‘어르신을 공경하자’와 같은 말이 우리 귀에 익숙하게 들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이 하나를 무기로 반말을 넘어 막말, 거기에 어디서나 훈계조의 말을 내뱉는 노인 분들의 모습을 목격하는 것이 심심치 않은 일인 것도 한몫을 한다. 매체가 그리는 노인은 어떠한가? 노인의 어려운 사정은 가려지고, 드라마 속 노인들은 고집스럽고 자기 뜻대로만 하려는 이로 모사된다. 현실과 실로 거리가 먼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보니 많은 경우 노인은 인권의 당사자라는 인식보다는 인권을 침해하는 사람으로 비춰진다.

더욱이 최근 언론기사들은 노인들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내용을 자주 다루고 있다. 기사는 이런 식이다.

"노인들이 난폭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건 ‘선배 고령화 국가’ 일본에서는 이미 상식이다. 일본은 1989~2005년 노령 인구가 2배 늘어나는 동안 범죄자는 5배 폭증하는 혼란을 겪었다. 그래서 생긴 신조어가 ‘폭주(暴走) 노인’이다. ‘망주(妄走) 노인’이란 말도 쓴다. 미쳐 날뛴다는 뜻이다. ....... 이제 이것은 일본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노인범죄율이 노령인구 증가율보다 훨씬 빠르게 높아지고 있으며 노인들이 전반적으로 난폭해지고 있다. (후략)..."

씁쓸한 내용의 글이다. 왜 노인들이 폭주하고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없고 폭주노인을 구속하고, 이 같은 현상을 노령화시대의 어두운 단면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노인을 공경할 대상과 나이를 무기로 공격하는 대상으로만 나누는 이분법 이상이 아니다.

학교폭력이 사회적 이슈가 된 요즘, 교육신청문의를 받다보면 학생대상 인권교육이 인성교육 위주로 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노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사실 노인인권교육이라는 것이 요청된 적도 없다. 그나마 이런 교육 요청이 있다는 것도 나아진 것이겠지만, 노인대상 인권교육도 복지관을 이용할 때의 예의를 교육해달라는 요청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학생인권교육과 별반 다르지 않다. 노인의 폭력이 자존감은 떨어지고 분노가 쌓이고 ‘나도 있다, 나를 봐 달라, 나를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는 비뚤어진 호소이자 위악적 절규일 수 있다는 고려가 없을 때 노인은 공경 받았으나, 그로 인해 공경만을 당연시 여기는 염치없는 노인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공경과 우대는 사실은 현실에서 노인 자신의 의사는 무시되고 사회의 일방적인 처우에 감사해야 하는 것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경만 받고 가만히 있지 않고 폭주하는 노인들은 몰염치한 존재이자, 사회의 관리대상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보호’의 함정이 노인에게도 여실히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노인인권교육은 노인에 대한 사회적 표준에 대한 균열과 경로우대라는 보호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날개 달기 - 노인들, 자신에 대한 편견을 흔들다

노인들 자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할까? 우선 노인에 대한 사회적 기준에 의해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당당한 권리마저 놓치고 있다면 노인인권의 시작은 바로 그러한 사회적 기준에 스스로 균열을 내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몇 가지 사진을 준비해보았다. 스킨십을 하는 노인 커플, 얼마 전 지하철에서 막말하고 폭력을 휘두른 노인, 젊은이처럼 입고 다니는 노인, 거리에서 폐지를 모으는 노인, 잘 차려입고 자녀들과 함께 웃으며 나들이 나온 노인, 스킨십 하는 젊은 커플, 경로석에 앉아있는 젊은 사람 등. 늘어놓은 사진 중에 자신의 시선에서 이상하거나 싫은 사진과 좋아 보이는 사진에 스티커를 붙이는 것으로부터 노인 스스로가 보는 이상적인 노인상과 부정적인 노인상을 이야기하며 시작했다.

- 스킨십하는 노인 커플 vs 스킨십하는 젊은 커플 사진에 대해서는 대체로 후자는 이상하지 않다가 대부분이었다면 스킨십하는 노인 커플에 대해서는 "망측하다”, “노망이다”라는 의견이 많았다. 괜찮다는 의견에도 “그래도 밖에서 그러면 안되지, 아이들이 따라해~”라는 주의의 말씀이 따랐다.

- 막말과 폭력을 휘두른 노인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견해가 주를 이뤘다. “노인이 체면이 있지. 아무리 요즘 애들이 막해도 노인이 참아야지”, “저런 노인은 돌아다니지 못하게 교통비 지원 같은 거 하면 안돼”라는 말도 나왔다.

- 젊은이처럼 입은 노인에 대해서는 “좀 이상하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반응이 가장 많았다. “늙는 것이 서럽지, 우리도 저렇게 입고 다니는 시절을 다시 살고 싶다”는 반응도 심심찮게 나왔다.

- 경로석에 앉아있는 젊은 사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은 적고, 젊은이들이 얼마나 힘들면 그러겠냐는 반응과 함께 노인들이 젊은이들 돌아다닐 때는 좀 피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몇몇 분은 “우리도 바쁠 때가 있다구!” “우리라고 시간 정해 낮에만 다닐 순 없지”라는 의견을 내놓으셨다.

- 거리에서 폐지 줍는 노인에 대해서는 “늙어 고생이 많다”며 안타까워하는 분들과 “젊어서 열심히 했어야지” 하는 반응이 반반으로 갈렸다.

-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는 역시나 자녀들에 둘러싸여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나들이 나온 노인의 사진이었다. 교육 전날이 어버이날이어서인지 이 사진이 나오자 각자의 자랑도 한바닥 늘어놓으셨다.

예상대로 노인들이 가진 자신들에 대한 기준은 오랜 사회적 고정관념과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재밌는 것은 스킨십하는 노인 커플에 대해서 부정적이셨던 분들이 시작할 때 했던 게임에서 세분 밖에 안되는 남성 노인 분들과 짝이 지어지면 까르르까르르 웃으시거나, ‘누구는 좋겄네’ 추임새를 던졌다는 것. 그 때를 떠올리게 하자 “그건 우리는 친하니까 그렇지”라는 답변으로 눙치려 하신다. 그래서일까? 다시 질문을 던지니, “우리도 사람인데 옆에 누가 있고 없고에 따라 등에 찬기운이 난다”며 “당연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이 이렇게 어렵게 나오다니. 노인도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왜 이렇게 낯설고 이상한 것이 될까? 사진을 통해 우리들 안에서 노인에 대해 가진 기준들을 정리해보고 그것이 우리를 불편하게 한 순간은 없는지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그러자 사진을 대할 때의 사회적, 도덕적 기준은 털어내고 불만들이 조금씩 나왔다. 서울서 은퇴 후에 내려오셨다는 70대 노인부부는 “우리도 아직 기운 있는데 할 게 없어”라며 탄식하셨고, 복지관에서 해주는 것에 감사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원하는 교육은 별로 안 해준다며 일방적으로 수혜의 대상이 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 분들도 나왔다.

더불어 날개짓 - 경로우대를 다시 생각해보다

노인인권교육에서 만나는 분들은 대체로 과거에 비해 복지가 나아졌다며 불만보다는 “고맙지”라는 말씀들을 많이 하신다. 각 지역, 동네마다 노인복지관이 생기고,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되고, 노령연금도 나오고(비록 적은 수가 거의 생활이 안 되는 수준의 연금을 지급 받더라도), 경로우대가 되는 것들도 많으니 그렇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는 노인이 되면 집도 주고 연금도 생활이 풍부하게 될 만큼 준다는 사실을 말해도 “에구, 그래도 우리 젊은이들 살 것도 생각해야지. 다 늙은 노인에게 너무 많은 걸 쓰면 되나”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들과 긴밀히 관련된 구체적 복지 내용에 대해서는 아주 세밀하게 불만을 토로하시기도 한다. 이 이중적 모습 중 어느 것이 노인들의 진정한 마음일까. 사실 이것은 가려내지 않아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첫 번째 거시적 주장은 노인에게 요구된 사회적 기준을 내면화하고 거기에 보릿고개 세대의 정서가 결부된 만족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구체적 권리와 만났을 때는 확연히 달라진다. 경로우대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조목조목 원하는 바가 많다. 이 경우 경로우대에 대한 요구도 존중보다는 구체적 이해관계가 중심이다. 그래서 많이 주는 것은 좋은 우대라고 여기는 반면, 우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방적인 수혜의 대상이 되어 의견도 배제되고 참여도 배제되는 경우에 대해서는 약간의 불쾌감을 갖지만 처음에는 크게 민감함을 보이진 않으신다.

생각해보니, 장애인에게 배려가 강자의 베풂이라면 동시에 장애인 스스로 배려 받는 것을 당연시함으로써 자신을 당당한 권리주체로 세우지 않는 것에 길들여지는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생각의 균열점을 발견하기 위해서 각자가 이용하는 공간에서 느끼는 불만과 얻고 싶은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체로 복지관에 대한 불만이 많이 나왔다.(물론 불만 이전에 이런 공간을 준 사회에 아낌없는 감사를 던지신 후) 지방이다 보니 복지관에 오는 버스를 운영하는데 그 횟수가 적은 것, 밥과 간식을 주지만 아이들도 아닌데 간식은 과자만 주로 준다는 것, 교육프로그램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잘 안 해준다는 것, 요양보조인을 빨리 배치해주지 않는다는 것 등등. 진행자가 복지관장이 되어 이런저런 항변을 해보았다. “교육프로그램 참여하시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제가 참여하라하라 하면 억지로 하시면서 이러시면 곤란하죠”, “요양보조인을 제가 안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젊은 사람이 적어서 어쩔 수 없는 거라구요”. 처음엔 주춤하시더니 곧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안 해주니깐 그렇지”, “언제 우리한테 의견 물어봤어?”, “버스가 자주 안 오니 오기 힘들어 참여 못한 거지”, “저번엔 산에 구경 가는 것은 따라가려했더니 70세 이상은 오지 말라고 하더구만”... 깨알 같은 불만들이 나오신다. 한번 봇물이 터지자 이곳저곳에서 웅성웅성... 이미 진행자의 손을 떠났다. 잠시 불만을 자유롭게 털어놓은 시간을 가진 후 지금까지 표현한 불만 속에 담긴 ‘우대’가 사실은 보호주의의 맥락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기 위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청소년에 대한 보호가 어떻게 보호주의로 전환되는가의 사례를 통해 노인에 대한 ‘우대’와 비교해 보았다.

* 어떤 맥락에서 보호가 동원될 때, 보호주의로 전환될까?

1) 사람이 가진 보편적 욕구를 청소년에게는 인정하지 않을 때
2) 청소년을 너무 특별한 존재로 일반화할 때(일반화는 대상화와 같은 말)
3) 청소년 당사자의 의사가 존중되지 않을 때
4) 청소년에게 기회 자체를 차단할 때
5) 어떤 부족함 또는 어떤 실수를 청소년이란 존재 전체의 무능력, 미숙함으로 곧장 등치시킬 때

이것을 노인으로 바꾸어 읽어보았더니 참여자들의 반응이 대체로 그렇다는 쪽이었다. 그렇다면 보호주의는 어떤 문제가 있나에 대해서 짚어보고, 노인에게 진정한 ‘우대’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생각해보자는 이야기를 남기며 정리했다.

머리를 맞대어 - 늙어도 살맛은 여전하단다!

“늙은이 너무 불쌍해 마라, 늙어도 살맛은 여전하단다” - <너무도 쓸쓸한 당신> 서문 中에서, 박완서

노인 분들이라 1시간 이상 교육이 어렵다는 것을 적어도 1시간 30분은 해야 한다고 해서 늘렸는데, 그 시간도 훌쩍 넘어 2시간 동안 넋두리, 토론, 논쟁이 이어지다가 끝내야할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오래전 봤던 영화 “죽어도 좋아” 포스터 사진을 보여드리고, 이 영화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전히 노인의 애정에 낯간지러워하셨지만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의 영어제목이 “Too young to die", 우리말로 하면 죽기엔 너무 젊다는 뜻이라고 하자, ”맞아맞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그 호응의 소리가 잊혀져온 자신의 욕망과 벽장 속에 둔 박제된 노인인권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길 희망하며, 조금 더 솔직한 자기 이해에 다가가는 시간이었기를 희망하며 교육을 정리했다.
덧붙이는 글
루트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302 호 [기사입력] 2012년 06월 13일 17: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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