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리] 피임약과 피임 정책의 기본을 되짚어야

함정에 빠진 피임약 재분류 논쟁

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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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약청의 피임약 재분류 안 발표가 파장을 일으킨 지 어느덧 1개월이 다 되어간다. 지난 6월 7일 의약품 재분류 방안을 발표하면서 현재 일반의약품으로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사전 경구피임약을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으로, 전문의약품인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한 식약청은 이제 7월 6일까지 의견을 받고 중앙약사심의위원회 회의를 거쳐 7월 말이면 방침을 확정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피임약 재분류 논의는 올해 처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난해 의약품 재분류 심의 때에도 응급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 여부가 논의대상에 올랐으나 당시 식약청은 각계의 첨예한 의견대립에 부딪혀 심의를 보류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 발표가 이전에 비해 더욱 큰 논쟁이 된 건 지난해에는 논의대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사전 경구피임약의 전문의약품 전환 안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식약청의 발표 전인 지난 3월부터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가 갑자기 사전 경구피임약의 전문의약품 전환 필요성에 대해 공청회를 여는 등 이와 관련한 여론화를 시작했던 사실을 상기해볼 때, 식약청의 이번 재분류 안이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면서 의사회에 대한 타협안으로 준비된 것은 아닌지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식약청은 이번 재분류 안이 철저히 의학적 알고리즘에 의해 분석된 것이며 과학적 근거 외에는 어떠한 의도도 개입되지 않았다고 해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된 피임약의 부작용 가능성을 고려해 볼 때 응급피임약의 복용은 1회에 불과한 반면, 사전 경구피임약은 장기간 복용해야 하는 특성상 사전 경구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하여 의사의 상담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단순히 부작용 여부만으로 여성의 건강권을 운운하며 이 사안을 논의하는 것이 얼마나 궁색한 논의인지는 금방 드러나게 된다. 이 결정 과정에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피임약 재분류 안 논쟁이 빠져있는 몇 가지 함정들을 짚어본다.

첫 번째 함정, 부작용에 대한 ‘과학적 근거’와 ‘해외 사례’의 함정

위 사진:[사진: 6월 15일 경구피임약 전문의약품 전환 반대 보건복지부 앞 기자회견(출처: 참세상)]

이번 재분류 안에 대한 논쟁에서 끊임없이 강조되고 인용되는 것은 부작용에 대한 ‘과학적 근거’와 ‘해외 사례’이다. 그러나 이렇게 부작용의 위험성이나 해외 사례만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피임약이 실제로 여성들에게 미칠 영향을 판단하는 데 설득력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피임약의 사용에는 사회, 문화적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임약 재분류의 실효성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부작용의 위험도나 해외 사례를 근거로 한 판단뿐만 아니라 실제 우리나라 여성들의 피임약 복용률, 피임 외의 목적(생리주기 조절, 여드름 치료 등)으로 피임약을 이용하는 비율, 복용 기간과 주기, 부작용 경험률과 그 정도, 복용 시 주의사항과 의약품 정보에 대한 인지도, 피임약에 대한 인식, 복용하기 어려운 이유, 연령/소득/장애/혼인여부 등에 따른 피임약 접근성 등 피임약 복용에 관련한 여성들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연구 자료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뒷받침되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 여성들의 건강과 삶을 위해 필요한 피임약의 처방, 판매 방법이 무엇인지, 그에 따른 정책적, 의료적 기반은 무엇인지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재분류 안의 결정과정과 부작용을 둘러싼 주장들에는 실제 우리나라에서의 피임약 사용 현황에 대한 사회, 문화적 분석은 거의 빠져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여성들의 피임약 이용 실태 조사가 출산력이나 인공임신중절 실태 등을 파악하는 연구에서만 분석의 대상이 되어왔을 뿐, 여성들의 건강과 삶을 고려한 입장에서 현실적인 이용 실태를 분석하는 연구는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동안 정부와 의약계가 여성들을 얼마나 도구적으로만 인식해 왔는지를 방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두 번째 함정, 병원이나 약국 단 두 개의 선택지만을 생각하게 하는 함정

두 번째로 지적할 것은 마치 피임약의 처방과 판매가 반드시 병원 아니면 약국 두 개의 선택지 사이에서만 결정되어야 하는 것처럼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의사들은 피임약의 부작용을 강조하면서도 피임약 이용률이 낮은 이유가 ‘여성들이 피임약의 올바른 복용법과 부작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처방을 받으면 부작용에 대한 걱정 없이 가장 효과가 높은 피임을 실천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전문의약품으로의 분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약사들은 여성들의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이유로 일반의약품 판매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피임약이 어떻게 처방되고 판매됐는지를 생각하면 의사, 약사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모두 무책임한 주장들에 불과하다. 지금껏 병원에서든 약국에서든 자신의 생활과 건강상태에 대해 마음 편히 상담하고 피임약에 대한 정보와 부작용을 구체적으로 안내받은 후 피임약을 복용할 수 있었던 여성들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관행에 대한 반성과 개선책 없이 의사나 약사, 병원과 약국 중 어느 쪽이 여성들을 위한 것인지를 판단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전문가주의의 오만일 뿐이다. 게다가 장애 여성이나 10대 여성들, 비혼 여성들, 저소득층의 여성들은 현실적으로 산부인과를 찾아가는 것조차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런 현실들을 고려할 때, 실질적인 방안은 여성들이 약국에서 피임약을 구입하게 되더라도 구체적인 상담과 정보, 복약 안내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병원에 대한 접근성과 의사들의 책임감을 높임으로써 여성들이 가능한 한 병원에 편하게 찾아가서 본인의 건강상태에 대한 상담과 함께 피임약 처방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 방향은 전혀 논의되지 않은 채 단지 피임약의 처방과 판매만을 둘러싸고 전문의약품이냐 일반의약품이냐 만을 논의하는 것은 이 논의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세 번째 함정, 여성들의 피임실천과 판단력에 대한 과도한 우려의 함정

마지막으로 현재의 논의에서 반복되고 있는 여성들의 피임실천과 판단력에 대한 과도한 우려의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피임약의 오남용이나 재분류에 따른 사회적 영향을 우려하는 주장들을 보면 마치 여성들은 영원히 스스로 피임약의 복용에 대해 판단하고 실천할 수 있는 판단력과 힘을 전혀 가질 수 없고, 남성들이나 사회적 시선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주체인 것처럼 인식된다. 또한, 반드시 의사들의 도움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피임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서술되기도 한다. 그러나 응급피임약을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응급피임약에만 의존하게 되는 여성들의 수가 갑자기 급증할 리도 없고, 사전 경구피임약이 일반의약품으로 남아있는다고 해서 여성들이 피임약을 무작정 오남용하지만도 않을 것이다. 또한, 사전 경구피임약이 일반의약품으로, 응급피임약이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있는 지금도 사전 경구피임약의 복용률보다 응급피임약의 복용률이 높다는 사실은 실제 일반의약품이냐 전문의약품이냐의 여부가 피임약의 복용 여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전문의약품으로의 전환을 주장하기 위해 피임약의 약국 판매 시 여성들에게 미칠 사회적 위험을 과도하게 강조하거나, 여성들의 건강을 위해서는 의사의 판단과 지도만이 절대적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앞으로도 여성들이 주체적인 힘을 가지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더욱 중요한 것은, 실제로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고, 피임 실천과 피임 방법에 대해 남녀노소 누구나 올바른 인식과 정보를 가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여성들이 자신의 삶과 건강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구체적인 방안들을 모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진정 여성들의 건강과 삶을 고려한 피임약 정책이 제대로 검토되길 바라며

피임약의 역사는 사실 여성들에게 딜레마를 준 역사였다. 피임약의 개발로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자신의 몸과 삶을 지킬 수 있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피임약 개발자들이나 의사들의 의학적 실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피임약의 부작용이 지금보다 훨씬 심각하던 시기에도 국가는 가족계획 정책의 실행을 위해 정확한 정보도 없이 피임약을 배포했고, 콘돔 대신 피임약 복용을 요구하는 남성들의 요구에 부작용과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피임약을 매일 복용해야 하기도 했다. 피임약 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마거릿 생어나 마리 스토프스는 여성의 임신출산 결정권을 높이는 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만, 피임약 보급을 통해 우생학적 목표를 실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한편, 우리나라 산부인과 의료수가가 낮다며 피임에 대한 상담료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대한산부인과학회 주최의 토론 내용들을 보면 과연 현재 사전 경구피임약, 응급피임약 모두를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산부인과 의사들의 목적이 진정 여성 건강을 우려한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피임약이 실질적으로 여성들의 건강과 삶에 도움이 될 수 있으려면 피임약의 이용에 대한 주도권을 여성들이 가질 수 있어야 하며, 단순히 피임약의 판매와 보급뿐만 아니라 제반의 사회・경제적인 정책들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피임의 실천이 여성만의 책임이 되지 않도록 학교와 보건소, 병원과 그 외 다양한 공공기관 등에서 전 연령대를 대상으로 한 성교육을 일반화하는 일, 필요한 때에 누구나 쉽고 안전하게 피임약을 구입하고 복용할 수 있도록 피임약에 대한 올바른 정보와 복약 안내를 약국과 병원 모두에서 의무화하는 일, 병원을 가는 일이 어려운 일이 되지 않도록 병원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일, 그리고 이를 위해 공공의료 정책을 제대로 개편하는 일 등이 지금 피임약 재분류 안 논의와 함께 근본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나영 님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사무국장입니다.
인권오름 제 305 호 [기사입력] 2012년 07월 04일 14: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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