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진의 인권이야기] 가난한 사랑 노래

구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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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가 왜 인권운동을 하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가끔 그런 걸 묻는 사람들도 있었고 스스로도 뭔가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할 것 같아서 몇 번이나 기억하려 애써봤는데, 도저히 기억나질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 진로를 고민할 즈음 나는 서울의 ○○동에 살았다. 그때 ○○동에 살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때 우리가(사실은 형이) 갖고 있었던 전세금으로는 서울에서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동은 참 ‘서민적인(이 말은 사실 ‘가난하다’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동네였다. 집에 갈 때면 전철역 출구 계단에서부터 야채 몇 가지를 늘어놓고 파는 아주머니들을 지나서 출구를 나서자마자 바로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시장을 지나갔다. 그 시장은 물가도 싸고 먹을 것도 많았다. 시장을 가로 질러 20분 정도 걸어가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마지막 10분은 완만하지만 쉼 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내가 인권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그 동네에 살면서 이후 진로에 대해 내리게 된 자연스러운 결론이 아니었나 싶다. ‘나 혼자 잘 살면 행복해질까?’ 같은 생각을 얼핏 했던 것 같다. 취직해서 돈 벌면 잘살게 될 거라는 생각도 착각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알지만.

그러다가 형이 취직을 하면서 △△동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내가 살던 △△동 집은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와 오래된 ‘서민적인’ 동네의 확연한 경계에 위치한 재미있는 곳이었다. 몇 걸음만 옆으로 가면 이주노동자들이 먹고 자면서 일하는 철공소와 주로 중국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중국집 등을 볼 수 있었지만, 내가 주로 다니던 길은 그 반대쪽에 있던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있었다. 그즈음 나는 인권운동에 지쳐갔다. 하루하루가 마냥 반복되는 것만 같았고, 내가 왜 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건지 내가 세상을 좋게 바꾸는 일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하고 있는 건지 뭔지 점점 알 수가 없었다. 가끔은 하나의 ‘직업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인권은 점점 모호해졌고 인권운동은 추상적으로만 생각되었다(물론 이렇게 단순하게만 말하기는 힘들지만). 가끔은, 콘크리트만으로 존재하는 이 공간이 나를 일상의 안락함에 가둬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슬쩍 들기는 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것에 저항하지도 못했다.

문득 ‘인권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 사진:[그림: 윤필]

내 친구는 ××동에 살았다. 한 번은 택시 기사 아저씨가 “서울에서도 해방촌보다 더 가난한 동네”라고 했던 곳. 길도 좁고 오르막이 너무 높아서 택시를 타면 ‘조금 더 올라가자’는 게 종종 실랑이가 되는 곳.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곳. 그곳에는 여름과 겨울이 있었다. 그 동네에서 지금도 재미있게 생각되는 것 중의 하나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고만고만한 집 앞에 신발들이 쪼로록 나와 있는 집이 가끔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골목길 가에 신발들이 뜬금없이 밖으로 나와 건물을 향해 나란히 늘어져 있는 것이다. 원래는 1층을 가게로 만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가게로 쓰지 않고 일반 가정집으로 쓰면서 가게문이 바로 대문이자 방문이 되어 버린 듯했다. 지나가다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신발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 이 가족은 안에서 뭘 하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괜히 일었다. 누가 신발을 갖고 가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도 됐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겨울인 것 같았다. 그 집은 겨울철 준비가 대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방문이 원래는 가게문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얇은 유리로 만든 문이 전면에 가득 차서 겨울의 찬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일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겨울에는 방문이자 대문인 유리문 앞에 이중 삼중의 비닐이 씌워진다. 다행히 길가에 모여 있던 신발은 비닐 속으로 숨어든다. 눈을 맞거나 밤새 꽁꽁 얼 일은 없을 테니 다행이다. 문제는 이곳만이 아니었다. 친구 집 역시 겨울이 오기 전에 모든 창문을 비닐이나 커튼, 아니면 아무 천으로라도 꽁꽁 싸매야 했다. 아니면 외풍이 너무 심해서 보일러를 아무리 높여도 코가 시릴 정도였다. 더 큰 문제는 윗집 옥탑방이었다. 몇 년 전 연이은 강추위로 보름 이상 온 나라가 꽁꽁 얼었던 적이 있었다. 옥탑방에 딸려 있던 화장실이 당연히 그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다. 화장실이 얼어버려 사용할 수가 없는데 이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보름 이상 지속되니 그 집 사람들도 엄청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 집 아주머니께서 친구에게 부탁을 해 화장실이 얼어있는 동안 친구네 집 화장실을 함께 쓰게 되었다. 다행히 친구네 화장실은 문밖에 있었다. 친구는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고 하는데, 한 번은 밤에 자다 일어나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실 안에 옥탑방 아주머니께서 불을 끄고 앉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 집 아저씨는 엄청난 술주정꾼이었는데, 종종 술에 취해서 친구네 집 문 앞에서 자거나 아니면 반대로 밤늦게 들어오는 아주머니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고 한다. 살인적으로 추웠던 그날 밤은 불행히도 후자의 경우였던 것 같다. 나도 친구와 함께 아저씨를 엄청 저주해줬다.

그 동네는 여름도 만만치 않았다. 그나마 여름이 겨울보다 나았지만, 여름에는 집집마다 비밀이 없을 듯했다. 집들이 워낙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창문을 활짝 열어놓을 수밖에 없는 여름이면 옆집, 뒷집, 앞집에서 이야기하는 소리, 텔레비전 보는 소리 등이 다 들렸다. 벽을 넘어 같이 동네 반상회를 해봐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아무래도 오래된 집들이 많다 보니 장마철이면 비가 새어 들어오는 집들이 많은 것이었다. 한 번은 골목길을 걸어가다 우연히 보게 된 이층집 창문 너머 방 벽이 거의 까만색이어서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원래 벽이 까만색이 아니라 방안 가득히 물이 새어 들어와 곰팡이가 피어 그렇게 보인 것이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는데, 정말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불행히도 친구네 집에도 어김없이 물이 새어 들었다. 이걸 어쩌냐며 함께 발을 동동 굴렀지만 별 방법이 없었다. 비가 그치기를, 물이 그만 새어 들기를, 가급적 새어 들어온 물이 빨리 말라서 곰팡이만은 슬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평소 자신의 집과 동네에 대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부심까지 갖고 있는 듯 보였던 친구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나는 왠지 ‘인권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거기 함께 있는 것이 좋았고, 나 자신과 그들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발 가는 데 머리 간다

나는 그렇다. 내가 어디 있는지가 좀 중요한 것 같다. ‘발 가는 데 머리 간다’는 신영복 선생의 말이 나에겐 중요한 삶의 지침이다. 그런데 요즘엔 좀 헷갈리는 경우들도 있다. ‘자발적 가난’과 ‘인권 변호사/교수’님들이 그렇다. 난 한때 ‘자발적 가난’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을 들으면 오히려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과 선택이 아니라 그냥 가난한(가난이 주어진) 사람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물론 탐욕스러운 속물보다 ‘자발적 가난’이 더 낫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리고 ‘인권 변호사/교수’님들. 실제로 훌륭한 인권 변호사와 교수들도 적지 않지만, 언젠가 아주 낡은 승용차를 타고 사랑방 선배와 함께 나간 자리에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나온 인권 변호사를 만났을 때의 그 괴리감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와 우리가 같은 ‘인권활동가’라는 게 참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것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지만, 발 가는 데 머리 간다는데 그의 발은 어디에 가 있을지 궁금해지긴 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때의 그 느낌만큼은 오롯이 남아 있다. ‘우리’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같은 곳에 발을 디디고 있나. 나는 지금 어디에 발을 디디고 있나.
덧붙이는 글
구석진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306 호 [기사입력] 2012년 07월 11일 11:3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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