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록의 인권이야기] 사람 ‘人’은 두 사람이 기대고 있는 글자라던데?

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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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행정대집행이 발효된 팔당 두물머리에 다녀왔다. 8월 6일 06시에 국토관리청 직원이 법원의 대집행(代執行)영장을 읽은 이후부터 두물머리는 대집행 저지 농성에 돌입했다. 만료 기간도 적시되지 않은 대집행 영장 탓에 농성도 ‘D+숫자’로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과는 달리 일요일 낮에 찾은 두물머리 풍경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천주교 미사터 의자에 앉아 있다가 6번 국도 위를 달리는 낯익은 관광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관광버스가 왜 낯익은 걸까 생각하다가, 바로 작년에 우리를 부산으로 실어 나르던 희망버스와 같은 회사버스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희망버스 출발 준비에 힘을 보탠 것도 작년 이맘때였다. 케발랄한 투쟁을 이어오면서 4년 넘게 끈질긴 투쟁을 하고 있는 두물머리에서 떠오른 희망버스의 기억은 집단적・사회적 연대 투쟁을 이 사회가 규정짓고 소비하는 방식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뭐, 하루 이틀 된 이야기도 아니다. 정부, 회사, 보수언론에서는 ‘연대 투쟁’을 당사자가 아닌 전문시위꾼, 음험한 조직들이 당사자들을 배후조종하기 위해 개입하는 ‘불순한 외부세력의 책동’으로 규정해왔다. 그 유명한 노동쟁의조정법의 ‘제 3자 개입금지’ 조항은 제 3자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방식으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부산 영도에서도, 제주 강정에서도 ‘불순한 외부세력의 책동’이라는 그들의 꼬리표 달기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이 꼬리표는 연대하는 이들이 당사자가 아니므로 투쟁의 ‘자격’이 없음을, 그리고 당사자들의 투쟁을 그들의 투쟁이 아닌 외부세력의 ‘책동’으로 폄훼한다. 그래서 연대했던 이들은 대추리에서, 강정에서, 두물머리에서, 영도에서, ‘지킴이’, ‘날라리 외부세력’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부르고 투쟁을 해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연대 파괴 공작이 소위 ‘당사자’라고 불리는 해당 대책위나 노조 내에서 동일하게 작동하기도 하는 것이다. ‘대책위원장, 노조위원장, 학생회장이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 조직원이라고 하더라’, ‘우리를 이용해 먹는 거다’ 등등. 결국, 조직이 사라지고 ‘개인’으로 남을 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 끊기, 관계 끊기는 지속된다. 그래서 투쟁의 실패는 관계의 단절이라는 기나긴 후유증을 남긴다. 사람들은 이사를 가고, 회사를 옮기고, 연락을 끊는다. 조직, 단체, 사람에 대한 불신은 고독한 ‘개인’을 남긴다.

자율적 개인 VS 조직이라는 부당한 대립구도

흔히 ‘없는 사람들’의 무기는 뭉치는 것, 단결하고 연대하는 것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있는 사람들’은 그게 무섭다는 걸 알기 때문에 ‘없는 사람들’이 ‘무기력한 개인’이 될 때까지 부단히 구획 짓고 분리해나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소위 진보적 언론과 매체들에서 자율적 개인 VS 조직이라는 구도로 ‘없는 사람들’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자율적 개인’, 좀 더 정확히 말해 특정 운동조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2008년 촛불 때 대거 거리투쟁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이 구도는 조직 일반에 대한 거부감을 만들어내고, 마치 조직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존재하는 개인들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왜곡된 인식을 생산한다.

희망버스 투쟁에 대한 진보진영의 관심과 초점도 상당 부분 상큼 발랄한 자율적 개인들의 투쟁에 맞춰졌다. 그리고 언론의 중심은 ‘날라리 외부세력’과 김여진, 김진숙이었다. 사실 김진숙 지도위원이 300일이 넘게 고공농성을 했다는 사실은 정말 슬픈 이야기다. 정리해고라는 엄청난 사안에도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제대로 싸우지 못했던 상황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슬픈 이야기를 공장 밖, 크레인 너머의 연대로, 희망버스라는 ‘조직’으로 반전시킨 즐거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를 진흙탕에 뒹굴게 만들 정도로 케발랄한 두물머리는 또 어떤가. ‘팔당 대책위’, ‘두물머리 밭전위원회’, ‘에코토피아’, ‘록빠 작목반’, ‘두물머리 지킴이들’과 같은 다양한 조직들이 두물머리에 모여 4대강 공사를 막는 활동을 함께하며 서로 연대하고 사람들을 조직하고 있다. 물론 ‘조직’에 대한 비판은 그 나름의 역사성과 근거들이 있다. 하지만 그 비판들이 더욱 풍부하고 유연하고 강력한 조직, 연대, 관계망을 만드는 게 아니라 고립된 개인을 만들어낼 뿐이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자율적 개인’이라는 강박

어떤 자리에서 군대 이야기가 나오고 내가 병역거부를 했다고 하면, 자동적으로 나오는 질문이 종교가 있는지 여부다. 그리고 종교가 없는 내가 왜 병역거부를 했는지 궁금해 한다. 만약 내가 종교가 있거나, 여호와의 증인이었다면 추가 질문은 없었을 것이다.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신념이 그렇게 다른가? 잘 모르겠다. 종교 역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일진데 말이다. 그리고 내가 만난 여호와의 증인들은 당연히 많은 고민과 결단 속에서 병역거부를 했었다. 그런데 사회가 운동가들을 비슷한 방식으로 매도한다. 종교 대신 이념이라는 말로. 마치 순수한 개인이 있고, 거기에 종교가 덧씌워지는 것처럼, 이념이 개인을 덧씌운다는 것이다. 나의 병역거부를 궁금해했던 사람들 중에도 ‘골수 운동권이었네’라며 대화를 그만둔 사람들도 분명 있었으리라. 지금까지는 이런 일들을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사이비 종교와 골수 운동권의 문제로 주로 봤었는데, 오히려 이 사회가 세상의 사물, 타인과 독립적인 순수한 ‘자율적 개인’이라는 상상물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효과가 무엇인지 면밀히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정록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310 호 [기사입력] 2012년 08월 14일 17: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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