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리] 교문을 넘어선 인권, 지역사회로 향하다

서울특별시 어린이․청소년 인권조례안의 발의에 부쳐

한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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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학생인권조례 제정 때의 악몽이 재현되다

인권을 대놓고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세부적인 권리 항목 혹은 개별 존재들의 권리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쉽게 단서조항을 붙인다. ‘청소년들에게도 당연히 인권이 있다. 그러나 아직 미성숙하기에 어느 정도의 제약이 필요하다’는 궤변 앞에 여전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주춤한다. 그렇기에 청소년들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인정(보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한 사람(사회)의 인권감수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곤 한다.

위 사진:[사진: 9월 24일 열린 「서울특별시 어린이․청소년 인권조례안」 대시민 공청회(출처: 에듀뉴스)]

지난 9월 24일에 있었던 「서울특별시 어린이․청소년 인권조례안」 대시민 공청회는 서울시가 어린이․청소년의 인권에 기반한 시정을 펼치길 약속하는 자리였기에 어린이․청소년들뿐 아니라, 관련 인권활동을 해왔던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자리였다. 또한, 성숙은 나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님이 여실히 드러난 자리이기도 했다. 서울 학생인권조례 제정 당시 차별금지 조항의 임신․출산, 성적지향 항목을 독소조항이라 지적하고 체벌을 교권의 일부로 운운했던 사람들이 또다시 찾아와 종합토론 시간을 방해했다. 청소년들은 ‘차별을 조장하는 발언을 그만하라’고, ‘우리에겐 우리 삶을 스스로 감당하고 지지받을 권리’가 있다며 개념 차게 응수했다. 누가 정말 미성숙하고, 누가 정말 권리를 누리기에 부족한 존재인지 반문하게 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사회자의 중재로 공청회는 마무리되었으나, ‘무서워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못 말했다’고 아쉬워하는 어린이도, 모욕적인 언사를 못 견디고 자리를 떠난 청소년이 있기도 했다. 어린이․청소년들의 인권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더없이 절실함을 반증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시민들에게 회자되는 조례를 만들기 위한 여정

박원순 시장이 후보 시절에 발표한 ‘서울시민 권리선언’(2011.10)을 시작으로 ‘서울인권기본조례’가 제정(2012. 9)되는 등 서울시는 인권의 제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여성, 장애인, 어린이․청소년 등 각 권리 주체별 인권조례들이 용역 사업을 통해 줄지어 추진되어 왔고, 그 중 어린이․청소년 인권조례(이하 어린이 조례)는 2012년 3월 추진위원회 구성(서울시 여성가족재단 용역)을 시작으로 조례안 준비 및 작성에 들어갔다. 인권에 기반을 둔 행정 체계를 잡아가는 것을 목표로 각종 인권조례가 제정되는 것에 원칙적으로 반대할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전국적인 인권조례 제정 바람이 시민들과 괴리된 채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지자체장들의 공적 사업으로 화석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는 늘 남게 마련이다. 인권조례가 살아있는 언어가 되고, 실질적으로 시 행정 및 집행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원칙의 선언을 넘어 사회적 논쟁과 합의의 과정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소수자 인권조례의 경우, 조례를 제정하는 과정 자체가 이들이 시민적 주체로 설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조례 제정 초기 단계부터 추진위원회와 여성가족재단이 어린이․청소년 인권 관련 분야의 단체들과 열린 소통을 진행한 것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지점이다. 조례안을 작성해가는 5개월의 시간 동안 중소규모의 간담회를 10여 차례 가지며 조례안에 담아야 할 내용과 가치를 나눴다. 인권시민사회단체들 역시 학생인권 담론만으로 아우를 수 없는 청소년 인권 영역을 개척하는 것을 목표로 어떤 방향성을 갖고 어린이 조례를 제정할지에 대한 간담회를 자체적으로 기획해 열기도 했다.(2012.6) 청소년 당사자들이 주축으로 꾸려가는 모임 및 단체, 장애/성소수자/탈가정/탈학교 등 소수자 청소년의 인권을 고민하는 모임 및 단체, 어린이․청소년 구호/보호를 목표로 하는 단체 등 광범위한 스펙트럼의 활동가들이 모여 △어린이․청소년을 정책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설정해야 한다 △공론화의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 속도전보다 중요하다 △학생인권만으로 포괄할 수 없는 어린이․청소년 인권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 △조례와 연계할 수 있는 법, 기관, 예산 등에 대한 촘촘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의견서를 작성해 추진위원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아동위원 170여 명이 조례안 도출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고, 기여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정책 결정과정에서 줄곧 배제되던 존재들이 상징적, 장식적 참여를 넘어 자신의 구체적 권리를 고민하고 주장할 기회가 조례 제정을 통해 더욱 열려야 한다. 이를 단순히 좋은 ‘체험’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며, 그 자체가 바로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이번 아동위원회 활동에 대해 무엇이 성과였으며, 어떤 부분이 더 보완되어야 하는지 세밀한 내부 평가를 해야 하며, 그것이 조례 제정 이후 어린이․청소년 참여위원회(조례에 명시된 당사자 참여기구) 활동으로 긴밀히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청소년의 총체적 삶을 재조명하다

2010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학생인권조례는 어린이․청소년을 바라보는 지배적 관점을 전환시키고, ‘듣보잡’ 취급받던 학생인권을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정착시켰다는 데 의미가 깊다. 그러나 어린이․청소년의 삶의 반경은 학교로만 제한되지 않으며, 그 어떤 시공간에서도 보장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이번 어린이 조례는 학생인권조례가 이뤄낸 성과에 역행하지 않으면서, 그 성과를 다른 삶의 공간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하나의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의 체벌은 문제시하면서도 가정 내 체벌에 대해선 자기 자식 챙기는 일이라 보는 경향이 여전하다. 사적 공간이자 보호자(친권자)의 성역이라 여겨지는 가정을 어린이․청소년의 인권을 기준으로 다시 재구성할 수 있는 근거 조항들이 마련되었다는 점, 시설(각종 아동생활시설, 지역아동센터, 학원 등)이나 기타 지역사회(비인가 대안학교, 일터 포함)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인권침해에 대해 서울시 차원에서 개입할 수 있는 틈새가 열렸다는 점, 학교 안 인권과 관련해 교육감과 시장의 협력을 강조해 학생인권조례를 독려할 수 있는 고리를 만들었다는 점 등을 전반적 성과로 평할 수 있다.

좀 더 눈여겨 볼 조항들을 특기해보면,

▲ 자신의 의사에 반해 자신의 약점이 공개되지 않을 권리(14조 2항) 등 어린이․청소년들의 입말을 살린, 당사자들에게 쉽게 와 닿을 수 있는 권리 목록 포함 ▲ 가정에서 보호자의 역할은 어린이․청소년의 권리를 대리 행사하는 데 있지 않으며, 어린이․청소년의 자기결정권과 참여권을 무시해서 양육해선 안 된다는 것을 강조(26조) 더불어 양육의 책임을 가정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안정적인 양육을 지원할 책임을 시장의 몫으로도 남김(27조) ▲ 학교 밖 어린이․청소년들이 학교를 나왔지만, 학업을 중단한 것은 아니라는 전제하에 교육 공간과 교육비 지원(16조 4항) 아동위원들의 강력한 요구를 바탕으로 쉴 권리 보장을 위해 학원 영업 제한할 수 있는 별도 조례 신설(17조 5항) ▲ 소수자 청소년의 인권보장 구체화. 특히 탈가정 어린이․청소년 지원 원칙으로 자립을 명문화(40조 3항) 청소년 노동자들의 권리 원칙 담음(20조~22조, 39조), 인권교육 중에 차별금지 교육 포함(62조 6항) ▲ 시설에서 안심하고 상담받을 수 있는 체계 마련(33조 1항) 복지를 지원받는 어린이․청소년에게 낙인감을 주지 않도록(19조 5항) 하는 등 정서적 차별의 문제 다룸

서울인권기본조례가 시 차원에서 설치․운영할 기구들을 명시한 조례라고 한다면, 어린이 조례는 설치 기구뿐만 아니라 가치 논쟁을 벌일 수 있는 ‘권리장전’을 뽑아냈기에 조례 자체가 시민들의 인권감수성을 훈련하고, 어린이․청소년 인권에 대해 토론하는 텍스트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난 10월 4일 발의된 조례가 원안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심의․제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서울시 집행부와 서울시 의회가 어린이․청소년 인권의 더 나은 실현을 약속하고, 그 실행 의지를 확고히 하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법적 근거 확보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법률보다 구속력이 낮기에 집행할 수 있는 구체적 기구와 인력확보가 되지 않으면 실효성을 발휘하기 어려운 것이 조례다. 어린이․청소년들이 참여하고 권리를 회복할 수 있는 창구가 다양하게 열려있어야 하고, 서울시 차원에서의 참여기구뿐 아니라 학교, 시설, 지역사회 등 실제 삶이 이루어지는 작은 공간들에서 참여와 권리 회복을 이룰 수 있는 제도적 통로가 확보되어야 한다. 현재 제출된 조례 원안의 경우 권리 회복(구제) 절차의 통로가 시민인권보호관으로 일원화되어 있다는 점, 인권 보호 체계로 인권위원회-참여위원회-시민인권보호관을 명시하고 있으나 집행력 담보에 가장 핵심적인 행정 체계가 비어 있어 있다는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제정 이후 실효성 있는 정책협의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 추가적인 노력이 더욱 요청된다.

조례 원안의 훼손은 어린이․청소년 인권을 후퇴시키는 일

의회 심의를 앞두고 또다시 서울시 의회 홈페이지에는 어린이․청소년인권 조례를 반대한다는 보수 세력의 협박성 글들이 폭주하고 있다. 제대로 된 논리를 갖추고 있다면 토론이라도 한 번 해볼 법한데, 인간에 대한 몰이해와 교권에 대한 구시대적 발상만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들의 말과 글 자체가 혐오 폭력이자 어린이․청소년들을 향한 인권침해다.

지난 조례 공청회 때 정책 제안에 나선 두 어린이․청소년분들의 이야기는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남겼다. 어린이 아동위원은 “선생님들의 임용고시에 아동인권 과목을 넣거나, 아동인권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만 학원을 세울 수 있게 하여, 아동인권 존중을 교육자의 첫 번째 자격 조건으로 정해 주세요.”라고 강조했다. 청소년 아동위원은 “여태까지의 삶에서 어른이 정해주는 대로 행동하는 수동적 존재로서의 방식에 익숙해져서, 권리의 침해에조차 무감각해진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책임을 지고 갈 테니 우리의 권리를 돌려주세요. 다만 그 변화를 위해 어린이․청소년이 자신의 권리와 스스로의 삶을 감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인식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합니다.”라고 발표했다. 어린이․청소년 인권을 보장하기엔 아직은 준비가 부족하고,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혼란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을 이제는 거두어야 한다. ‘이것마저 조례로서 보장해야 한단 말인가’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나이 어린 존재들의 인권 밥상은 여전히 초라하기만 하다. 만약 준비가 부족하다면, 그것 자체를 반성하고 지금부터라도 준비에 나설 일이다. 당사자들의 권리를 끊임없이 유예하면서 인권이 무르익은 그 어떤 좋은 날을 상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조례에 명시된 권리만이 어린이․청소년들의 권리 목록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떠한 법도 인권을 모두 아우를 수 없으며, 법과 제도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어린이․청소년들의 인권은 ‘원래’ 있었다는 점을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제도를 바꿔나가는 것과 함께 일상에서의 익숙한 관계를 되짚어 보는 과정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사랑이라고, 교육이라고, 돌봄이라고 행해졌던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폭력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 것이 인권의 몫이다. 이번 조례 제정이 학생인권조례에 이어 다시금 어린이․청소년 인권에 대한 성찰의 장이 열리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317 호 [기사입력] 2012년 10월 10일 1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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