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리] 여성주의로 다시 엮어가는 의료와 건강

시타
print
여성주의, 의료, 협동조합. 3년 전까지 이 세 가지는 나에게 별다른 연관성을 갖지 않는 별개의 단어들이었다. 물론 각각의 단어 자체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떠올릴 수는 있었다. 또 어떤 책에선가, 1970년대 미국에서 ‘여성 건강 운동’이 벌어졌다는 얘기를 읽기도 했었다. (대표적인 예가 ‘보스턴 여성 건강서 모임’이다. 다양한 여성들이 모여 의료 지식/권력을 상대화하며 여성의 몸에 대한 집단 지성을 구축했고, 그 결과물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우리 몸 우리 자신>(또하나의 문화)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하지만 그건 미국 얘기다. 지금 여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페미니스트인 나는, 누구와 함께, 어떤 형태의 모임을 통해, 몸과 건강과 의료에 대해 여성주의적으로 의논할 수 있단 말인가?

외로운 투병과 고독한 죽음의 협박에 맞서

마흔을 바라보는 비혼 페미니스트인 나에게, 이제 부모 가족의 협박(“지금은 젊어서 괜찮지만, 나중에 나이 들면 어쩌려고?!”)이나 결혼이 불행한 여자들의 비아냥(“싱글들은 좋겠어. 혼자니까 얼마나 편해?”)은 별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내게 찾아올 다양한 질병들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문득 “내가 나중에 치매에 걸린다면?”이라는 질문에 이르면, 어쩔 수 없이 말문이 막혔다. 공포는 지배를 유지시키는 효과적인 기제이며, 늙음, 질병,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일상적으로 조장되는 사회에서 나 혼자 그러한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던 와중, 3년 전 두 명의 비혼 페미니스트가 의기투합하여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그리고 그들이 나의 친구이자 동지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가를 깨닫게 되기까지는 3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살림의료생협은 올해 초에 창립하고 올해 여름에 사업소(살림 의원)를 개원한 ‘여성주의 의료생협’이다. 의료생협은 의료인과 지역주민이 협동하여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조직이다. 한국에서 자발적 주민조직이자 대안적 보건의료운동으로서의 의료생협이 출발한 지는 이미 20년이 가까워져 가며, 살림의료생협은 그 막내 격이다. 하지만 살림의료생협이 서울 은평구라는 지역적 기반 외에 한 가지 새로운 점이 있다면, ‘여성주의’라는 지향이 살림의료생협의 출발점이자 역사였으며 또한 총회를 통해 인준된 단체 정관에 명시된 가치라는 데 있다.

환자로서의 여성에서, 건강 주체로서의 여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근대 서구에서 출발한 의과학은 몸/정신의 위계적 이분법에 기초하여 ‘자연’으로서의 몸을 ‘문명’으로서의 의학이 ‘정복’하는 구도로 발전해왔다(“암 정복”, “생로병사의 비밀을 밝히다” 같은 수사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이때 ‘전문가’로 특권화된 앎의 주체로서의 의료인은 남성젠더로, ‘환자’로 무력화된 앎의 대상은 여성젠더로 성별화 되면서, 여성의 몸-경험은 끊임없이 ‘비정상 상태’로 다루어져 왔다. 가령 여성은 월경을 해도 환자 취급 받으며(“PMS(월경 전 증후군)”) 월경이 끝나도 환자 취급 받는다(“갱년기는 에스트로겐 결핍증”). 환자/몸에 대한 공격적 치료와 개입이 ‘과학’으로 정당화되고 많은 사람들은 몸을 지닌 개별적 권리주체라기보다 의료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런 식의 의료지식/제도 안에서, 늙음, 질병, 죽음, 의존 등은 모든 인간의 조건이 아니라 의료를 통해 ‘극복’해야 할 것으로 인식된다.

이런 상황은 구체적인 의료체계와 관행 속에서도 관철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여성에 대한 과잉진료나 불필요한 의학적 처치가(높은 제왕절개 시술, 골다공증 진단 범위의 확대, 소위 ‘이쁜이 수술’ 등),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이 겪는 다양한 질병들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무관심이 공존한다. 성폭력과 그 여파로 인한 피해, 감정노동의 격화에 따른 스트레스와 정신질환, (육아와 가사, 간병 등) 보살핌의 대부분을 담당하는데서 오는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의료계의 관심은커녕 제대로 된 의료통계조차 희박하다. 젊고 아름다운 몸을 유지해야 한다는 성별규범은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적(敵)으로 여기게 만들고 평생 건강을 심각히 위협하는데도, 이에 대한 보건의료정책과 의료계의 적극적 대응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성의 평균수명은 남성보다 6~7년가량 길지만, 건강수명은 남성보다 오히려 짧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건강이 개인의 타고난 자산이 아니라 성별불평등 구조 속에 놓인 사회적 결과임을 잘 드러낸다.

여성주의 의료생협은 이러한 상황이 역사적이고 구조적으로 누적된 성별권력관계의 문제임을 인식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여성을 비롯한 정치적 약자들이 의료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되는 보건의료체계, 의료가 돈벌이가 아니라 윤리적이고 호혜적인 공동체의 일부가 될 수 있게 하는 구조, 몸을 적대시하거나 죽음을 공포스러워하기보다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건강을 일구는 협력자로서의 의료, 의존이 인간의 조건임을 수용하고 보살핌이 모든 사람의 권리이자 의무가 되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자 한다. 그러니까 여성주의 의료생협은 결국 새로운 주체, 새로운 관계, 새로운 의료를 만들어내려는 사람들이 힘을 모으고 삶을 나누는 터전인 셈이다.

가장 ‘현실적’인 노후 준비, 또 하나의 여성운동

여성주의는 내가 만나본 중에서 가장 많은 현실들을 설명해주고, 또 더 나은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세계관이다. 하지만 여성주의의 이 ‘훌륭함’과 ‘매력’을 사람들에게 설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꼴페미’에 대한 혐오는 매년 그 수위를 높여가고 있고,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고 말한 후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디 가서 자신을 ‘여성주의자’라고 소개했다가 분위기 싸해지거나 ‘사납고 시끄럽고 피곤한 여자’로 낙인찍힌 경험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살림의료생협에서 활동하면서 나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누군가가 단상에서, 인터넷 게시판에서, 뒤풀이 식사자리에서, “여성주의자들이 우리 동네에 와서 참 좋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주의자여서 환영받다니. 정말이지 ‘세상에 이런 일이!’하는 기분이었다.

여성주의 의료생협은 소위 ‘정상 가족’ 안에서 기본적 보살핌을 해결하도록 격리하고 방치해온 사회에서 미래와 노후를 다르게 준비해보고자 했던 비혼 페미니스트들의 절실한 꿈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리고 3년의 준비, 창립과 개원에 이어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면서, 절실했지만 ‘꿈’에 불과했던 것이 다양한 사람, 경험, 마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가는 구체적인 ‘현실’이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여성주의 의료생협은 많은 개인들에게 가장 현실적인 노후준비이면서, 또한 협동과 자치를 통해 느리고 끈질기게 만들어 가는 또 하나의 여성운동이라고 믿는다.

절실한 꿈을 느리게 현실로 만들어가는 이 움직임이, 걷고 걸어 어디까지 다다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여성주의라는 세계관이 지역의 구체성과 만나 이루는 다채로운 협동의 화학작용들 속에는 삶과 죽음, 몸과 마음, 시간과 관계의 문제들이 구석구석 담겨질 것이다. 여성주의 의료생협에 일찌감치 가입한 것이 참 다행이고, 아마 앞으로 더욱 자랑스러워질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시타 님은 살림의료생협 여성학 전문이사입니다.
인권오름 제 325 호 [기사입력] 2012년 12월 05일 14:47:03
뒤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