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날다] 허깨비 같은 나이주의, 개념으로 잡아내다

꼰대와 동지사이, 나이주의를 고민하다 1, 2 워크숍을 마치고

한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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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과업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중 무언가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고 그것을 담론으로 엮어내는 작업은 중요한 일이면서도 놓치고 가기 쉬운 부분이다. 연구 활동을 진득하게 펼치기엔 활동가들이 너무 바쁘다는 것이 첫째 요인이겠고, 이미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 재생하도록 만드는 좀처럼 진전 없는 반인권적 현실이 담론을 정체시키는 데 한 몫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힘든 것인지, 무엇이 자유롭고 평등한 삶과 연대를 가로막는지 제대로 살필 수 있는 눈을 길러내는 것은 늘 중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청소년인권활동가들에게 ‘나이주의’를 규명하는 작업은 묵직하면서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과제라 할 수 있다.

‘나이주의’(Ageism, 에이지즘) 즉 연령차별은 특정 연령대의 개인 또는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과 차별을 일컫는다.(위키백과) 나이주의라는 개념은 애초에 노인에 대한 차별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청소년(어린 존재)을 향한 차별만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같은 연령대라고 할지라도 성별, 장애 여부 등에 따라 나이주의는 다른 가면을 쓰고 차별을 유발시킨다. 남성의 나이듦이 경험과 연륜의 증거로 여겨지는 반면, 여성의 나이듦은 ‘시들어버린 꽃’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장애인의 경우 나이와 상관없이 늘 ‘어린 애’ 취급을 받곤 한다. ‘그 나이 때는 ○○을 해야 정상이지’라고 명령을 해대는 고정된 생애 주기는 사실 모든 연령대를 구속하는 힘이 되곤 한다. 더불어 나이주의의 친구들이라고 부를 만한 유사한 주의(-ism)들도 많이 있다. 청소년을 향한 나이주의와 관련해서 권위주의, 보호주의, 경험주의(연장자의 경험, 연륜을 절대시하는 것), 능력주의 등은 늘 함께 작동해 나이에 따른 위계와 차별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쓰인다.

이 복잡다단한 나이주의의 결을 뭉뚱그려 읽어내기 이전에 먼저 청소년을 향한 나이주의부터 밑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청소년인권운동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명제를 늘 강조해왔다. 특히 청소년 활동가들이 운동을 하면서 겪게 되는 가장 일상적인 모욕인 ‘보자마자 반말’ 문화는 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문제라는 진단은 있으나, 어떻게 집단적인 해결을 할 수 있을지 그 길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청소년 활동가들이 나이주의로 인해 운동사회 안에서 겪게 되는 서러움은 많은 부분 성폭력을 폭력이라 이르지 못했던 여성 활동가들의 그것과 닮아 있다. ‘친해지려고’, ‘자식 같아서’, ‘뭐 그리 까칠해’라는 반응은 문제제기를 무색하게 만들기 일쑤다. 기지를 발휘해 그 상황을 모면하거나, 공통의 경험을 가진 활동가들과의 뒷담으로 액땜하거나, 속으로 삭이거나. 개인적으로 감당해오던 일을 조직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말하기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청소년 활동기상청 활기(이하 활기)에서는 그 노력의 일환으로 나이주의 관련 워크숍을 개최하기로 했다.

워크숍을 준비하면서 활기 구성원들은 나이주의의 정의 자체가 비어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일단은 워크숍 참여자들의 경험을 귀납적으로 추출해 나이주의 사전을 만들어보기로 했고, 우리가 뽑아낸 정의를 바탕으로 운동사회 안에서부터 나이주의를 깨나가는 운동을 기획해보기로 했다. 본래 1회로 기획했던 워크숍이 두 번으로 쪼개진 건 예상보다 나이주의 사전을 만드는 작업이 고도의 집중력과 장시간 논의를 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10월에는 정의를 만들어보는 워크숍을, 11월에는 실천을 기획하는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 글에서는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나이주의 사전 만들기: 청소년 나이주의를 정의하라

참여자들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뽑아내면서도, 너무 늘어지지 않게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9칸 빙고(*) 놀이 방식을 활용하기로 했다. 5-6명이 한 모둠을 이루고, 전지에 크게 9칸 빙고를 그린다. 그리고 각각의 칸마다 모둠원들이 토론을 거쳐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나이주의의 장면을 적어둔다. 빙고 놀이에서 우세를 잡기 위해서는 희소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다른 모둠이 못 찾을 것 같은 희귀한 예를 찾음과 동시에 다른 모둠에서 부를 것 같은 보편적 예 또한 골고루 담아내야 한다. 귀납적으로 사전을 만들어가는 것이 워크숍의 목표인 만큼 빙고 놀이를 통한 예시 찾기는 참으로 적절하게 맞아들었다.


9칸 빙고는 후딱 채워졌다. 차별의 경험이 그만큼 많다는 점에서 씁쓸하긴 했지만, 놀이는 열띠게 진행됐다. 각 모둠에서 돌아가며 예시를 부를 때마다 진행자는 칠판에 요약해서 상황을 적어둔다. 3줄 빙고가 완성된 모둠이 나올 때까지 놀이를 진행했고, 승리한 모둠이 나온 이후에는 남아있는 예시들을 모둠마다 돌아가며 발표했다. 그렇게 사례들을 적어 보니 대략 30여 가지가 뽑혀 나왔다. 비슷한 예시끼리 유형별로 묶어서 분류하고, 분류된 사례들을 추상화시켜 정의로 가다듬었다. 가다듬은 정의와 용례들을 쭉 살펴보니, 과정은 빡셌지만 모두들 벅찬 감정이 일렁였다는 후문이다.

1.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동등한 인격체로 간주하지 않는 것. 비 청소년들 사이에서 관계를 맺는 순서와 예의를 어린이․청소년들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것.

2. 청소년들이 법률적 무능력자라는 사실을 악용하여 폭력(범죄)의 대상으로 삼거나 이것을 정당화하는 것.
ex1. 학교, 학원, 가정 등에서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체벌은 폭력이 아니라 교육이라고 정당화 함.

3. 청소년을 대표성이 없는 존재로 취급하고, 청소년을 누군가에게 딸린 존재로 판단하는 것. 그래서 정당한 존재의 무게를 부여하지 않는 것.
ex.1 (회의 등 공식적인 자리에서) "너 누구 따라왔니?"
ex.2 "부모님은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아시니?"

4. 청소년을 자신의 의지로 자라기보다는 부모나 교사 등에 의해 키워지는 존재로 표현하거나 취급하는 것.
ex.1 [우리 아이 1등 만들기]와 같은 서적

5. 청소년의 의견에 정당한 비중을 부여하지 않는 것.
ex.1 토론회 등의 행사에서 청소년은 사례 발표 등의 역할만 주어지고, 발제나 토론 등을 비 청소년인 ‘청소년 전문가’ 패널이 독점하는 경우

6. 청소년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수 없거나 무책임한 존재, 미성숙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
ex.1 "자유를 누리려면 책임을 져야지!"
(* 비 청소년의 자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ex.2 청소년에게 금전관리나 대표 등 책임 있는 역할을 맞기지 않는 경우

7. 청소년 일반이 무능력하다는 전제 하에서 그들의 능력 있음을 예외적인 상황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ex.1 "그 나이에 벌써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기특하네!"

8. 청소년기를 생물학적으로 지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아는 체하거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ex.1 "나도 너만 할 때 너랑 똑같은 생각 했어. 그런데……. (훈계)"

9. 청소년이 겪고 있는 고통이나 감정을 하찮게 취급하는 경우.
ex.1 "지나고 나면 다 별거 아냐.", "너희 나이 때가 제일 좋은 거야."

10. 청소년을 독립적인 결정권이나 방어력이 없는 존재로 생각해버리는 것

11. 청소년을 미래의 인적자원으로만 생각하고 지금 현재 살아가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청소년의 ‘삶’을 ‘체험’으로 치부하고 직접적인 결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

12. 청소년 일반을 수동적인,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이미지로 고정시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를 청소년들에게 강요하는 것.

13. 나이에 따라 정해진 역할, 위치, 허용되는 지식과 정보를 달리하는 것.

14. 기성세대의 가치기준에 따라서 청소년들의 변화된 문화를 평가절하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혐오하는 것.

15. 청소년을 분석의 대상으로 타자화하는 것.

16. 청소년의 범위를 나이와 생물학적인 개념만으로 고정시키는 것.

-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주최 ‘꼰대와 동지사이, 나이주의를 고민하다 1’ 워크숍 기록 일부 발췌

실천 기획: 청소년 나이주의를 넘어선 운동을 상상하다

위의 나이주의 사전을 서로 공유한 상태에서 운동 전략과 실천을 기획해보는 시간을 이어갔다. 역시 모둠 활동으로 진행했고, 운동사회 내 나이주의 깨기 운동본부를 결성한다는 가상의 전제 아래 캠페인/게릴라/정책/조직 4가지 파트로 분류해 전략을 짜보는 시간을 가졌다. 캠페인 팀은 나이주의 깨기 담론을 밖으로 어떻게 외화할지 고민하고, 게릴라 팀은 차별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모았다. 정책 팀은 나이주의와 작별하기 위해 필요한 대안적 실천을 짰고, 조직 팀은 나이주의를 매개로 연대할 수 있는 다른 존재들을 찾아보았다. 워크숍에 모인 참여자들이 대부분 인권활동가들이었기에 가능한 프로그램이었고, 회의 테이블에서 일상적으로 수행하던 일을 프로그램으로 활용하니 익숙하게 내용을 생산할 수 있었다.

캠페인 팀은 그간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면서 진행했던 캠페인들을 패러디한 재치 있는 방식들을 제안했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10가지 약속’ 캠페인 벌이기, 나이주의 철폐를 위한 조직 컨설팅, 나이주의 감별 체크리스트 발행 , 나이주의 반대 선언 등이 구체적으로 기획되었다. 게릴라 팀은 ‘치고 빠지기’ 컨셉으로 반말을 듣거나 무시를 경험할 때 상대방의 허를 찌를 수 있는 짤막한 노래를 만들었다. 조직 팀은 청소년과 비청소년들이 함께 활동하지만, 의사결정이나 집행 단계에서 청소년들이 대상화될 것이라 예상되는 몇몇 공간을 적극 조직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책 팀은 일상 문화 (회의, 뒤풀이, 회원모임 등)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 조직 구조 개편, 청소년들과 연대 사업할 때 주의해야 할 점 등을 구체적 예시로 제시하면서 대안을 구상했다.

나이주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모든 반차별 운동이 그렇듯 청소년을 향한 나이주의를 넘어서자는 것은 단순히 청소년을 비 청소년과 ‘똑같이’ 대하라는 것은 아닐 게다. 청소년을 향한 특별한 걱정, 특별한 칭찬, 특별한 대우가 사실은 무시를 전제한, 혹은 통제하기 위한 조치는 아닐지 세밀히 살펴보길 요청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든 혼자 살 수 없고, 어느 정도는 의존적이다. 그럼에도 유독 청소년들만이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혼자 결정할 수 없고, 그이들의 실천은 무언가 미완성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엄연한 차별이다. 완벽할 수 없는 개인에게 필요한 지원을 적절히 행하는 것(반드시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볼 것!)과 그 사람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는 것은 너무나도 다른 실천이다.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이 운동사회 내부부터 바꿔보자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그만큼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동지라 생각하고 연대를 청했을 때, 동정과 비웃음을 산 경험이 켜켜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꼰대’를 감별하는 동물적 감각은 더욱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고, 낯선 비 청소년들이 많은 곳에서는 더더욱 까칠하게 행동하게 되었으리라.

운동 사회에서 여성 활동가들이 갖은 고초를 겪으며 운동사회 가부장성에 대해 싸워왔던 것처럼, 이제는 청소년 활동가들이 골수부터 꽉꽉 들어찬 나이 차별을 적극 문제화하려는 움직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문제(trouble)가 정말 문제(issue)가 되는 것은 함께 풀어나갈 사람을 만날 때다. 청소년인권운동이 앞으로 만들어 낼 소란과 잡음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린다.

(*)빙고 놀이: 주로 5X5 형태의 칸에 숫자나 단어 등을 적어놓고 서로 불러가면서 가로 세로 대각선 형태의 직선을 만들어나가는 형식의 게임. 먼저 5줄의 직선을 그린 사람이 승리함. 워크숍에서는 시간 관계상 3X3 형태의 칸을 만들었고, 3줄의 직선을 먼저 그린 모둠이 승리하는 것으로 함.)

덧붙이는 글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과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326 호 [기사입력] 2012년 12월 12일 2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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