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파장?파장!] 망설이는 인권위에 ‘권고’를 권고한다.

인권위의 선거권 연령기준하향 입장표명에 대하여

검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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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수립 이래 지속적으로 향상해 온 국민의 교육수준, 국가와 사회의 민주화, 그 사이의 엄청난 국가경제의 발전 및 국민의 경제·문화수준의 향상, 현실적으로 보장되는 언론의 자유와 언론매체의 발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이미 18~19세 연령층의 국민은 스스로 정치적 판단을 할 최소한의 능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 96헌마89, 재판관 4인(김문희, 황도연, 이재화, 조승형) 의견


1997년 6월 26일, 헌법재판소는 현행법의 선거권 연령 기준에 대해 제기된 위헌법률소송을 기각하였다. 판결문에서 헌재는 청구인의 취지에는 동감하지만 입법자의 재량으로 해석해야한다는 이유를 들어 기각 결정을 설명하고 있다. 비록 위헌 결정은 아니었지만, 이때의 판결문은 선거권 연령 기준이 어떠한 측면에서 검토되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남았다. 그 중 4인의 재판관은 당시의 선거권 연령(만20세)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피력하기 위하여 위와 같이 논증하였다. 97년 당시의 교육수준과 경제 발전, 국민 수준 향상 등을 근거로 들어 18~19세 연령층이 정치적 판단을 할 능력을 갖추었다는 이들의 주장 앞에서 2013년에 이르기까지 한 살 낮추어진 선거권 연령기준의 현실은 한없이 초라해 보이기만 한다.

권고가 아니라 왜 의견표명인 것일까?

그로부터 정확히 15년 8개월이 지난, 2012년 2월 26일. 국가인권위원회는 “현행 선거권 연령 기준의 하향을 검토하고, 정당가입 연령을 선거권 연령과 분리 및 하향을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국회의장에게 표명하였다. 소식을 듣고 그 내용이 궁금하여 찾아본 결정문의 수준은 생각보다 좋았다. 청소년의 정치적 판단 능력에 대해 검토하고, 교육적 측면에서 제기되는 우려들을 반박하고, 다른 법률과의 모순을 지적하고, 세계적 추세를 들여다 본 결정문의 내용을 보고 나니 환호성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권고로도 손색이 없을, 그런 결정문이었다.

문제는 권고로도 손색이 없지만 정작, 권고는 아니라는 점이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위원회가 정책에 대한 개선 또는 시정을 권고 혹은 의견표명을 할 수 있음을 규정해두고 있다.(제25조 제1항) 선거권 연령 기준 하향에 대한 위의 의견표명 또한 이 조항에 근거한 것임을 인권위는 결정문 말미에서 밝히고 있다. 말미를 읽다보니 의문이 생긴다. 왜 권고가 아니라 의견표명인 것일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권고와 의견표명은 법령에서 규정하고 있는 위원회의 권한이지만, 권고에 대해서는 그 대상의 의무를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권고를 받은 관계기관의 장은 권고를 이행하기 위한 노력을 하여야하며(제25조 제2항)과 90일 이내에 권고사항에 대한 이행계획을 통보하여야하고(제25조 제3항) 권고 내용을 이행하지 않을 시 그 이유를 위원회에 통보할 것(제25조 제4항)을 명시하고 있다. 반대로 의견표명에 대해서는 ‘할 수 있다’ 외의 어떠한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정책에 대한 권고와 의견표명은 정책에 대해 의견을 피력한다는 점에서 같지만 적극성이나 구속력에 있어서 차이를 가지는 것이며, 권고가 보다 적극적인 요구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의견표명’은 결국 선거권 연령 기준 하향에 대하여 국회의장에게 소극적인 요구를 한 셈이다. 논리적으로도 매우 탄탄하고 많은 근거 자료를 제시한 인권위가 어째서 참고사항 정도의 요구 수준으로 그것들을 발표한 것일까.

내막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인권위는 이번 의견표명에 있어서 신중했던 건 확실하다.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의 회의 공고 기록에 따르면, 본 의견표명에 대한 안건은 약 한 달 동안, 총 3차례에 걸쳐서 상임위원회에 상정되었다. 안건이 두 번째로 상정되었던 ‘2012년 제42차 상임위원회’의 회의록은 본 안건에 대한 결정을 “선거권 등의 연령기준은 사안의 내용이 중요하므로 관련 법령에 대한 심도 있는 검토 및 논의를 위해 재상정 할 것.”이라고 서술해 두었다. 두 번의 토론 끝에 합의를 도출해낸 것일까. 마지막으로 안건을 상정한 ‘2013년 제2차 상임위원회’에서 드디어 구체적 연령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중앙선관위를 권고 대상에 넣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세 차례 논의를 통해 도출해낸 결과가 구체적인 연령기준을 제시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간의 논의가 구체적 연령기준을 제시하느냐 마느냐에 초점 둔 것이었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회의록과 회의 공고 기록을 살펴보니, 애당초 상임위원회에 상정된 안건은 ‘권고안’이었다. 회의 공고 기록에 따르면 2012년 제42차 상임위와 이듬해 제2차 상임위까지 안건의 공식 명칭은 ‘선거권 등 연령기준 관련 정치관계법 개정 권고의 건’이었다. 혹시나 권고안과 의견표명안 모두를 묶어 ‘권고의 건’이라 표기하는 것인지 확인해보았지만 이전까지 회의 공고들을 확인해본 결과, 그 두 가지를 명확히 구분하여 표기하고 있었다. 따라서 권고안으로 상정된 안건이 의견표명안으로 후퇴하여 결정된 것이다. 도대체 구체적 연령기준 제시를 두고 한 달에 가까운 시간동안 논의하고, 권고안으로 제출된 안건을 의견표명안으로 후퇴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추측하건데, 이유는 부담이다. 국회의장에게 권고를 하여 정책 입안에 대해 영향력을 가하는 것이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90일 이내에 이행계획을 통보하고, 이행치 않을시 그 이유를 통보하는 일을 국회의장에게 시키기에는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또 한편으로는 대외적으로 보이는 실적에 대한 부담이었을 수도 있다. 연말이면 국정감사기간에 권고수용률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권고수용률이 현병철 체제로 들어와서 낮아졌다는 비판이 많아서, 항상 이를 신경써온 것이 사실이다. 권고를 하고 그것에 대한 답변을 구하는 과정이 그리 순탄치 않은 것은 이전 위원장 체제에서도 당연한 것이지만 애당초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책임 방기가 아닐까? 뿐만 아니라 선거권 연령에 대해 적극적인 의견 피력을 함으로써 휘말리게 될 논쟁 또한 부담의 원인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원인이 무엇이건, 현병철 위원장과 상임위원들은 선거권 연령 기준 하향에 대하여 권고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껴 권고가 아닌 의견표명으로 입장을 후퇴한 것은 분명하다.

위 사진:작년 대통령 선거일에 벌였던 청소년 선거권 관련 1인 시위를 홍보하는 웹자보

인권위, 더 이상 인권위가 아니기를 망설이나

약 16년 전 그 날, 헌재는 선거권 연령 기준을 하향하라는 ‘의견표명’을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반복되는 선거권 연령 위헌법률소송에 대하여 헌재의 입장은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의견표명은 ‘질릴 만큼’ 헌재가 다 해줬다는 뜻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다시피 이미 97년도에 선거권 연령 기준을 18세까지 낮추어도 무방하다는 헌재의 의견도 있었다. 구체적인 연령 기준을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낮출 필요성에 동감한다는 이야기는 선거권 연령 기준에 대해선 어딜 가도 빠지질 않는다. 헌재가 하나의 권력기관으로서 의견 표명이라는 눈치게임을 하고 있을 때, 인권위가 해야 하는 역할은 눈치를 보고 숫자나 외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인권위는 기존의 선거권 연령기준에 대한 입장을 재탕하며 소임을 다한 척 할 것이 아니라, 선거권 연령기준 하향을 보다 적극적으로 권고해야 했다.

분명 소수자의 편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중요하다. 혹자는 이번 의견 표명을 그러한 ‘목소리’에 빗대어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권위의 의견표명 하나가 정말로 엄청난 힘이 되는 경우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거권 문제가 당면한 현실은 다르다. 이미 많은 기관들이 지난 16년 동안 고만고만하게 의견표명을 해주었기에 단순한 의견표명은 실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선거권 연령 의제는 이제 응원할 관객이 아니라 직접 뛸 선수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인권위는 기존보다 더욱 강하게 선거권 연령 기준 하향을 요구하여 실행을 촉진시켰어야 했지만, 겁에 질려 소극적인 요구에 그쳤다. 인권위는 16년 전 헌재의 의견표명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스스로 택한 것이다

인권위는 인권에 대하여 어떠한 국가기관보다 의미 있는 행동을 취해야한다. 인권 보장을 위해 고민하고 행동해야 하며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사고해야한다. 그렇기에 이리저리 눈치보고, 재는 사이에 제 역할을 망각하는 지금 인권위의 모습은 참으로 실망스럽고 걱정된다. 이리저리 눈치 보는 사이 더 이상 ‘인권’위가 아니게 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그것을 가장 두려워해야한다는 걸 인권위가 하루 빨리 깨닫길 바란다.


* 끝으로 글의 논지와는 별도로 회의록 찾기가 정말 힘든 인권위의 운영방식에 불만을 토로해본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조금이라도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자 회의록을 이리저리 요청했지만, 어찌 공공기관 회의록이 이리도 간결하며, 이리도 받기가 힘든지…. 공적인 기관에서 법으로 규정된 회의의 기록조차 이리 접근하기 힘들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을뿐더러, 최소한의 발언 기록조차 없는 기록 방식은 정말 난감하다. 간결하게 써진 회의 결과부터 홈페이지에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공개 방식까지. 연간 250억 원 가량의 예산을 운용하는 기관치고는 좀 너무하지 않은가. 작년 감사원의 지적이나 국정감사 때의 지적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책임감 없는 운영의 소산인지, 아님 합당한 근거가 있는 것인지 기회가 있다면 언젠가 꼭 묻고 싶다.
덧붙이는 글
검은빛 님은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내놔라’ 운동본부에서 활동하십니다.
인권오름 제 339 호 [기사입력] 2013년 03월 27일 15: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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