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선의 인권이야기] 삶으로의 초대

이어말하기의 힘을 믿으며

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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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에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화요일 저녁 진행되고 있는 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 준비한 자리다. 저마다의 삶 속에서 부딪혔던 수많은 경험들, 이야기 손님들의 이야기를 이어 듣고 있노라면 구체적인 삶의 궤적은 다르더라도 내가 느꼈던 많은 감정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곤 한다.

대학에서 몸값을 올리기 위해 대거 ‘잘 팔리는’ 학과로 전과하는 친구들을 보며 들었던 먹먹함(난 ‘안 팔리는’ 과였다), 처음 집을 구할 때 이미 어떤 남성이 살고 있는 어두컴컴한 반지하 집을 보며주며 “방은 따로 쓰니 상관없잖아. 이만한 곳 구하기 어려워!” 자신만만한 집주인의 말에 황망했던 그 순간, 목소리도 몸도 바들바들 떨었던 첫 임금협상 후 마신 술의 씁쓸했던 맛, 멋대로 들락거리며 온갖 간섭을 해대는 집주인을 만나 내 집이 내 집이 아니었던 설운 기억...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도 어설픈 자기위안을 하거나 다들 그렇다고 냉소하거나 그 감정에 침몰되지 않게 애써 외면하면서 그냥저냥 넘겨왔던 것 같다. 그렇다고 기억이 화석처럼 굳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순간들과 다시 만나 겹쳐지면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곤 했다.

위 사진:[사진: '을'들의 이어말하기 풍경]

이 사회가 정상적인 것이라 승인해주는 인생의 정규코스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애초부터 정규코스에 진입할 수 없다고 배제되는 사람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정규코스에서 이탈한/된 사람들이 있다. ‘비정상’적인 이들에 대해 가난해서, 이주민이라서, 여성이라서, 장애가 있어서, 게이라서, 자퇴해서, 나이가 어려서, 비정규직이라서, 결혼을 안 해서 등등의 이유를 가져다붙이며 차별은 정당화된다. 내 존재를 부정당한 순간,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먼저 움츠렸던 상황, 부당한 게 분명해도 그냥 참고 넘어간 경험. 사람은 존엄하다는 말은 그저 말일 뿐, 헛헛함을 느껴야 했던 경험은 각자 저 스스로 감내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경험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남아 성토대회라도 된 듯 술자리에서 쏟아내는 레퍼토리가 되곤 한다.

‘내가 ~해서 그렇지’, 이 사회에서 차별의 기제가 되는 딱지를 그대로 가져와 붙이며 순간순간들을 넘겨왔지만, 그렇다고 말끔한 것은 아니었다. ‘을’들의 이어말하기에 함께 한 사람들, 나의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우리의 이야기로 만난 찰라들은 더 자주 더 많이 서로 마주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그렇게 같이 만나는 시간들이 “그저 각자의 경험일 뿐 오롯이 저 혼자 감당할 몫”이라 말하는 이 사회에 날리는 하이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딱 구분되기 쉬운 이 사회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낼 기회를 갖기란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건 약함이나 가벼움으로 치부되는 것 같고 먹고 살기도 팍팍한데 ‘을’로서의 내 위치성을 재확인하는 것 같아 유쾌하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 나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나. 이건 솔직한 마음은 아니었다. 누구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뻔한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문제는 어떤 것을 나누고 싶고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가-였다. 이 사회가 말하는 인생의 정규코스를 내가 밟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원하고 만들고 싶은 관계와 세상에 대한 성찰을 별로 해본 적 또한 없었다.

불리고 싶었던 이름으로 서로 불리고 뭉쳐져 있던 감정의 결들을 펼쳐 보이며 우리의 이야기로 연결하는 것, 평등한 관계에 대한 꿈을 말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그러한 관계를 맺고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다른 질서를 향하게 할 힘이 되는 게 아닐까?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를 건네며 만나는 시간은 서로의 삶으로의 초대이다. 그 시간은 그 자체로 위안이 되기도 하고, 다른 내일을 함께 만들어내자는 다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초대가 곳곳에서 펼쳐지면 좋겠다. 함께 모이고 만나는 순간들이 쌓이면서 맛볼 어떤 환희를 바라본다.

** ‘을’들의 이어말하기에서 나눈 이야기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블로그 http://ad-act.net/에서 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민선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입니다.
인권오름 제 358 호 [기사입력] 2013년 08월 14일 19:5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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