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삼의 인권이야기] 북 핵실험, 이 땅의 진보를 다시 생각하다

이계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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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가 일어난 지 벌써 만 5년이 흘렀다. 2001년 9월 11일 출근길에 버스 정류장 매표소 텔레비전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때가 생각난다. 그땐 정말 ‘얼떨떨’했다. 이런 일이 ‘정말로’ 벌어지는구나, 발상과 구도는 너무나 영화 같은데, 이게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란 말이지……. 항공기 두 대가 100층이 넘는 빌딩을 두 채를 들이받고 곧이어 건물이 와르르 무너진다. 내가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무너지는 빌딩 아래로 좁쌀만한 크기의 사람들이 수도 없이 추락하는 장면이다. 만유인력이 그 순간에도 작용을 멈추지 않았다면, 몇 초 뒤 그들의 육신은 현세의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참혹한 육신으로 저 세상으로 떠났을 것이다.

부시와 라덴은 한편?

폭력은 단순하지만 폭력 속에 내장된 회로는 난마처럼 얽혀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9.11 테러에 대해 정리된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단호한 분도 있었다. 내가 성서를 배울 때 마음의 스승으로 모셨던 한 목사님은 “부시와 빈 라덴은 결국 한 편”이라고 어딘가에서 썼다. 나는 동감했지만, 고개 끄덕거릴 자신은 없었다. 그런데 스스로를 ‘B급 좌파’로, ‘주먹 대신에 글을 쓰는 건달’로 규정하면서 필봉을 휘두르던 한 논객이 그 목사님의 발언을 신랄하게 ‘깠다’.

미국사건은… 단지 ‘오랜 일방적 가해자가 당한 뒤늦은 최초의 보복’이다. 그런 분명한 사실 앞에서, 가해자의 무소불위한 권세 덕에 단 한 번도 제대로 인류 앞에 제 억울함을 알릴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한 앞에서, ‘폭력은 모두 나쁘다’는 지당한 말씀이나 읊조리는 일은 동네 양아치의 싸움 앞에서 ‘누가 먼저 때렸는가’를 따지는 파출소 순경보다 한가롭다.(김규항, ‘얼치기 도사들’ 한겨레 2001.11.5)

그는 얼마 뒤 다른 칼럼에서 그 목사님을 포함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두고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기 위해 총체성을 늘어놓는 걸레’로까지 지칭했다. 사실 나는 좀 놀랐다. 표현의 과격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단호할 수 있는지, 9.11 테러를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제대로 인류 앞에 제 억울함을 알릴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한”으로 그렇게 정의해 버려도 괜찮은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한은 9.11 테러로 좀 풀리기는 한 것인지, 영문도 모르고 현세의 지옥으로 떨어진 3,000명 가까운 목숨들은 제 조국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심판을 받은 것인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그렇게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정리할 권리가 우리에게 과연 있는 것인지, 나는 실망스러웠고, 그따위 발언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사람들이 또한 한심스러웠다.

그런데 몇 년 있으니 마이클 무어가 <화씨 911>을 만들고, 좀 있으니 딜런 애버리라는 젊은이가 <루즈 체인지>를 만들었다. “부시와 라덴은 같은 편이다. 그들은 싸우는 척하지만 서로를 돕고 있다.”는 5년 전 목사님의 주장은 지금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데 그 분을 ‘걸레’로 지칭하며 분개하던 그는 그 문제에 대해선 별 말이 없다.

북핵 문제와 김형률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한다. 파국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하는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진보진영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끼리끼리 의논들이 분분하고 민주노동당에는 또다시 해묵은 싸움이 번져가는 모양이다. 사실 좀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의 핵개발을 ‘자위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고 ‘반핵’이라는 단어도 성명서에 쓰지 못하면서 무슨 진보정당이냐고 따지고 드는 사람들이 있다. 예의 그 ‘B급 좌파’도 한몫 거든다. 그는 “주사파는 진보진영의 암이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 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것은 주사파 때문이다. 이제 암을 없애야 한다”면서 기염을 토한다.

나는 북한의 핵개발 소식을 들었을 때 두 사람을 떠올렸다. 지난해 하늘나라로 떠난 ‘원폭 2세 환우회’ 회장 故 김형률과 얼마 전 어느 잡지에서 본 그의 아버지 김봉대 씨다. 최초의 원자탄 ‘리틀보이’(꼬마)는 원폭 투하 작업에 참여한 미군 대령 어머니의 이름을 딴 ‘아놀라 게이’의 자궁에 장착되었다. 이 근친상간의 자식은 히로시마 도심 상공 580m에서 터졌고 반경 2㎞내의 모든 건물이 파괴됐다. 폭심지에서 1.2㎞내에 있던 사람은 50%가 그 날로 숨졌고 1945년 말까지 모두 14만 명이 죽었다. 김형률의 어머니는 히로시마 피폭자였다. 그는 ‘선천성 면역 글로블린 결핍증’이라는 희귀병을 앓았다. 그의 성장기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가 이 형극의 나날 속에서 제 고통을 원폭 피폭자 2세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일치시켰을 때 그는 골방을 벗어나 ‘활동’을 시작했다. 원폭 피폭자들과 그 2세들이 누려야할 최소한의 권익을 위해 김형률은 32kg의 체구를 이끌고 폐기능의 70%가 떨어져 나간, 한여름에도 겨울옷을 입고 다녀야하는 최악의 육신으로, 시시각각 죽음을 의식해야하는 나날 속에서 실로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그는 작년 서른다섯의 나이로 숨졌다. 이제 김형률의 아버지 김봉대 씨가 자식이 한 일을 대신한다. 그는 칠순의 나이에 워드프로세서를 배우고 피폭자 증언대에 서고 공청회를 다닌다. 그는 매일 새벽4시에 일어나 김형률이 생전에 쓰던 방으로 가서 기도를 한다고 한다. 아들이 그토록 바라던 특별법 통과를 위해, 아들의 이름 세 글자가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위 사진:원폭 피폭자 2세로서 활동하다가 사망한 김형률 씨의 아버지 김봉대 씨<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말을 하니깐 계속 말이 만들어진다

북핵 문제가 터졌을 때 사람들은 북한 정권의 선택이 옳았는지 그릇된 것이었는지부터 따진다. 나는 9.11 테러 때처럼 정리된 입장은 없지만, 이 시끌한 논란에 대해 할 이야기는 있다. 말을 하니까 계속 말이 만들어진다는 것. 이 논쟁을 통해 기존의 자기 생각을 고칠 사람도 없어 보이고 그런 기대를 갖고 논쟁에 임하는 사람도 없어 보인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논쟁이라기보다 습관적인 ‘싸움’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보는 이런 것이 아니다. 진보는 인간의 구체적 고통에 대한 연민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의 고통, 혹은 약자의 슬픔에서 출발하여 끝내 그 지점으로 되돌아오는 진보를 그린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진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땅의 자칭 진보세력은 무엇인가. 그저 ‘말로 다투기 시작해서 말로 끝나는’, 서서히 동력이 늙고 지쳐가는 두 대의 기관차, 이 정도가 아닌가.

진정으로 평화를 바란다면 우리가 북한 정권의 선택에 대한 입장으로 이렇게 시끌하게 다툴 이유는 없다. 북핵 사태에서 ‘핵 자체’를 걱정하는 진보는 이미 알려진 김형률과 이제 생겨날 ‘잠재적인 김형률’의 고통을 기준으로 행동해야 한다.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이 정말 많다. ‘미국의 악행’에 방점을 찍은 진보는 이것으로 가장 큰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들과 연대해야 한다. 둘 다라면 두 방면에서 행동하면 된다.

다니엘 고든의 다큐멘터리 영화 <어떤 나라>에 나오는 두 평양 소녀, 현순이와 송연이는 내가 텔레비전 뉴스 바깥에서 본 최초의 북한 민간인이다. 백두산에 올라 “천지의 물을 보는 순간, 장군님의 딸로 백두의 딸로 살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하는 열세 살 소녀 현순이를 생각한다. 그 영화에서 실로 드라마틱하게 편집된 집단 체조 장면은 사실 내게는 끔찍했다. 그러나 그 한 순간을 향해 6개월의 강행군을 견뎌가는 소녀들의 일상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사춘기의 흔적들은 애틋했다. 딸 셋을 키우면서 ‘조국 통일에 기여할 아들이 없음’을 한스러워하는 물리학자 송연이 아빠는 사회의식이라고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이 땅 과학자들의 일반적인 모습과 대조되었다. 와다 하루끼의 규정처럼 ‘유격대 국가’를 살아가는 북한 인민들의 집단을 향한 열정, 과잉 결정된 공민의식은 나같은 자유주의자에게는 적이 안타깝고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내가 <어떤 나라>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확인한 것만으로도 그들은 대체로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 땅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순진한 미소들을 가졌고, 그들에게는 아직 떼로 어울려 춤추고 노는 고래의 풍속이 남아 있었다. 그들에게서 이기심과 경쟁심으로 교활해진 눈매는 별로 느낄 수 없었다. 한반도 전체를 범위로 하는 진보의 과제는 이들의 미소를, 그 속에 담긴 순수한 인간성을 옹호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다. 9.11 테러가 남긴 것은 구체적인 죽음과 구체적인 고통이다. 부시니 빈 라덴이니, 시시비비는 결국 ‘말’일 뿐이다. 말을 하니깐 자꾸 말들이 만들어지고 쓸데없는 다툼이 이어진다. 이 땅의 진보는 조금씩 늙어가지만 아직 살롱에서 노닥거리고 있다. 진정으로 전쟁이 두렵고 핵이 두렵다면 고통에서 시작해서 고통으로 되돌아오는 각자의 행동으로 서로 연대하자, 실은 나는 이런 평범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덧붙이는 글
이계삼 님은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입니다.
인권오름 제 28 호 [기사입력] 2006년 11월 08일 3: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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