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낱의 인권이야기] 태생적 한계

한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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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말 그대로 공부만 하고 살았다. 기구한 노력에 대한 보상은 나쁘지 않았다. 대학입시만큼이나 치열했던 고교입시를 무사히 통과했고, 지역에서 이름난 비평준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경쟁이 경쟁인 줄도 모르고 살았던 시절. 결석했던 친구에게 필기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공책을 두고 왔다 거짓말을 한 건 1학년 때까지였다. 나중에 가서는 거짓말조차 하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살았으니까. 성공은 어떠한 조건에서도 내 갈 길을 가는 사람에게만 돌아오는 거니까. 명확한 목표가 있는 나의 달리기에 거리끼는 마음 따위가 움틀 자리는 없었다. 그렇게 20년을 살아온 것이다.

살아온 삶이 마음의 깜냥을 정한다. 나의 소심함,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 어쭙잖은 완벽주의 등은 그렇게 길러졌다. 나는 내가 ‘밀양’이, ‘강정’이, ‘쌍차’가, ‘장애인’이, ‘청소년’이 되는 게 너무 어렵다. 그 세계에 온 마음으로 접속하고, 공명하고, 분노하는 게 솔직히 잘 안 되는 사람이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늘 곤혹스럽다. 길러진 나를 끊임없이 배반해야하기 때문에. 한 번도 일깨워본 적 없던 감각을 곤두세워야하기 때문에. 내 자신의 한계와 대면해야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과거에 붙들리지 않는 현재를 꿈꾸고, 이미 친구가 되어버린 그/녀들의 삶에 닮아가고자 ‘사람’의 곁을 서성거린다. 세월호 피해자 유가족들을 만나는 대통령의 표정과 복장에 대한 비판이 무성하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 태생적 한계. 그녀는 길러진 대로 살고 있을 뿐이고, 한계를 넘어서는 어떠한 시도도 보인 적이 없다. 완벽히 사물화 된 인간. 그녀는 그저 굳건히 서있는 대한민국이며, 학교이며, 시설일 뿐이다. 그녀에게서 사람 냄새를 기대한 바 없으니, 실망할 겨를도 없다. 물을 수 있는 건 법적 책임이나 정치적 책임일 뿐 인간에 대한 예의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그러한 몸을 만드는 사회이자, 공간들이다. 공간은 사람을 만들고, 한 인간의 태생적 한계보다 더 지독한 건 공간의 태생적 한계다. 인권 친화적 학교라는 말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애초에 ‘착한 노동자’를 생산하려 만든 역사적 공간이 어떻게 인권적일 수 있다는 말인가. 청소년들이 학교와 유사한 곳으로 감옥이나 군대를 떠올리는 건 공간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맞닿아있다. 학생인권의 전통적 권리목록들은 그래서 기묘하다. 내 머리카락을 건드리지 말라, 때리지 말라, 함부로 물건을 뒤지지 말라는 요구는 학교 담장을 넘어서면 대놓고 유보시킬 수 없는 권리들이다. 장애인거주시설 등에서는 식당에서의 메뉴 선택권마저 찬반 논란거리가 된다. 한 사람의 온전한 삶을 지원하는 게 도무지 불가능한 공간들이 강제와 억압을 통해 유지된다. 두발 자유, 체벌 금지 등이 법적으로 보장된다 해도 또 다른 버전의 통제 방식들이 발명될 것이다. 시설의 메뉴선택권이 보장된다고 해서 시설 거주인들이 자유로운 삶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권리를 ‘득템’해도 인권에 도달할 수 없는 미끄러짐. 누군가는 이것을 인권의 한계라 말하기도 했다.

학교나 시설 내 인권교육을 할 때, 학교를 없애야 한다고, 시설을 없애야 한다고 속 시원히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만이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이라고 내지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학생인권을, 시설인권을 논하고 강조한다. 학교나 시설을 필요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공간은 그 스스로 한계를 극복하거나 사라질 수 없다. 공간을 바꾸고 없앨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사람이다. 공간의 무용함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 권리의 역설을 깨달은 사람들, 그래서 그 공간이 인권적으로 운영되는 것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 인권이 완벽한 언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인권과 현실의 불일치가 만들어내는 틈새에서 변화의 가능성은 탄생한다.

어제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비공개 대국민 사과를 진행했다. 사람 냄새 나지 않는 사과문을 통해 그녀는 ‘국가개조’를 천명했다. 그녀가 바꾸려는 것은 무엇이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여전히 과거에 붙들려 자신을, 국가를 지키고자 하는 그녀의 구상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이 비통한 사건을 겪으며 사람들은 국가의 태생적 한계마저 사유하기 시작했다. 국가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러한 세상은 정치 기계 같은 대통령이 발붙일 수 없는 사회일 것임은 분명하다.
덧붙이는 글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들' 상임활동가 입니다.
인권오름 제 391 호 [기사입력] 2014년 05월 01일 7:3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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