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리] 넷문디알

인권을 인터넷 거버넌스의 원칙으로 선언하다

오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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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거버넌스

이제 인터넷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고 우리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인터넷을 사용하지만, 모든 사회가 그렇듯 인터넷의 안정적인 작동을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하고, 어떠한 규칙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것이 설사 기술적인 문제라고 해도, 항상 정치적이다.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로서 전 세계를 연결하는 인터넷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우선 컴퓨터의 주소인 IP주소와 이를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도메인 네임이 필요하다. 진보네트워크센터의 도메인 네임은 www.jinbo.net 이다. 이미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이 이름을 계속 쓰기는 하지만, 이제 ‘진보네트워크센터.한국'이라는 도메인 네임도 등록가능하다. 왜 도메인은 처음에 영어로 만들어졌을까? 물론 인터넷이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한글, 일본어, 중국어, 아랍어 등 다른 언어로도 도메인 이름을 등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용자의 접근권과 문화적 다양성을 위해 다국어 도메인이 필요하다는 누군가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터넷의 안정적인 운영, 이용과 관련된 공공정책의 결정, 그리고 그러한 정책의 원칙들과 정책결정 과정 등을 ‘인터넷 거버넌스(Internet governance)'라고 한다.
위 사진:<인터넷 거버넌스를 말하다> 전자책을 자유롭게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

‘거버먼트(Government)’가 아니라 ‘거버넌스(Governance)’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정부의 책임과 역할만은 아니고, 다양한 영역의 참여자들 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초창기에는 이러한 규칙들이 인터넷 기술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국이 .kr 이라는 국가도메인을 갖게 된 것도 정부 간 기구, 예를 들어 UN에서 합의한 것이 아니라, 초기 인터넷 기술자들이 기존의 국가식별기호 표준을 인터넷 국가도메인을 위해 사용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라는 곳에서 도메인 네임과 관련된 결정-예를 들어, 어떤 새로운 도메인을 만들 것인지, 도메인 관리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와 같은-을 하는데, 이 역시 국제기구이기는 하지만 정부 간 기구는 아니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물론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 분도 관심이 있다면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인터넷 관련 공공정책이 ‘규제 정책'이나 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프로토콜(기술적인 규약)은 기술 표준이라고 할 수 있다. 전화나 주파수와 같은 기존의 통신 영역에 대한 규칙을 UN 산하 국제기구인 국제통신연합(ITU)이 만들어왔던 것에 비해, 인터넷 기술표준은 기술자들의 자발적인 커뮤니티에서 만들어 왔다. 물론 강제력은 없다. 다만, 개방적인 참여와 논의를 통해 가장 효과적인 기술이 표준으로 채택되기 때문에 ‘사실상 표준’의 역할을 할 뿐이다. 기술 표준뿐만 아니라, 규범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인터넷 보안과 관련하여 기업의 기술적 조치나 정부의 규제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보안을 위한 이용자의 행동지침 같은 것도 필요하다. 이는 법이 아니며, 다만 바람직한 행위의 규범을 누군가 정리해서 인터넷을 통해 확산시킨다. 이와 같이 인터넷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법이나 공적 규제뿐만 아니라, 기술표준, 시장, 규범과 같은 것이 필요하며, 이것이 현실에서 효과적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정부뿐만 아니라, 다양한 참여자의 협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다양한 참여자의 협력은 국내에 머물지 않는다. 인터넷은 세계적 네트워크이지만, 인터넷 공간이 각 국 인터넷 영토의 합은 아니다. 한 국가나 지역의 행위나 정책은 다른 국가나 지역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스팸메일이나 해킹이 국내에서만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작년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해외 사이트인 그루브샤크에 대해 접속차단 조치를 했는데, 그루브샤크는 영문도 모른채 특정 지역으로부터 차단당한 것이다. 우린 미국의 이용자와 다름없는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이용자이지만, 미국 국가정보원(NSA)의 입장에서는 외국인일 뿐이다. 왜 똑같은 이용자인데, 미국의 이용자에 비해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이와 같이 인터넷의 세계적인 성격 때문에, 인터넷은 세계적 차원의 협력과 조정을 필요로 한다. 이에 따라, 이를 위한 과정도 비단 정부만이 아니라, 다양한 비정부 참여자들의 참여에 기반을 두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이해나 관점을 가진 참여자들을 이해당사자(stakeholder)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양한 이해당사자의 참여와 협력 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인터넷 거버넌스 모델을 멀티스테이크홀더(multi-stakeholder) 모델이라고 부른다. (한국어로 이를 다중이해당사자 모델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정부중심 vs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

초기 인터넷 거버넌스의 대상은 주로 IP 주소나 도메인 네임과 같은 주소자원 문제였다. 그러나 인터넷 이용자가 급속하게 증가하면서, 인터넷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온라인 사기, 도박, 음란물, 저작권 문제, 게임,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 등이다. 이런 문제들은 주로 인터넷 ‘콘텐츠’와 관련된 것들이고, 저작권이나 감시 문제와 같이 인터넷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 이슈와 연결된 경우도 많다. 지금까지 이런 이슈들은 한국의 인터넷 실명제와 같이 한 국가 내의 정책에 의해 다루어져 오거나, 저작권 문제와 같이 세계지적재산권기구 등 국제기구에 의해 다루어져 오거나, 혹은 스팸에 대한 대응과 같이 세계 각 단체의 협력에 의해 다루어져 왔다.

전통적으로 통신망과 같은 인프라가 정부의 규제 영역이었던데 반해, 인터넷의 표준이나 콘텐츠, 서비스 영역은 상대적으로 비규제 영역이었으나, 인터넷의 사회적인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인터넷 관련 공공정책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개입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세계적인 인터넷 거버넌스를 UN 산하의 국제통신연합(ITU)과 같은 정부간 기구에서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러시아, 중국, 인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정부가 이를 주장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들 나라들은 정부의 인터넷 통제가 강력한 나라들이다. 그래서 세계 시민사회단체들은 정부간 기구 중심의 인터넷 거버넌스가 이루어질 경우, 인터넷 통제가 강화되어 표현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이 침해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정부간 기구의 협상 과정이 주로 비공개적으로, 비민주적으로 이루어져 온 것에 대해 비판해 왔다. 그래서 보다 다양한 참여자들이 동등하게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을 주장하고 있다.

인터넷 거버넌스를 ‘정부간 모델’로 할 것인지,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로 할 것인지는 최근 몇 년 간 인터넷 거버넌스와 관련된 세계적인 논쟁에서 핵심적인 쟁점이고, 아직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 논쟁에는 국가간 이해관계도 관련되어 있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은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을 지지하고 있는데 이는 선진국의 기업이나 시민사회의 참여도가 훨씬 높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미국이나 유럽 국가 역시 비밀스런 정부 간 협상을 하는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 반대로 개발도상국 입장에서는 국가 대표들 간 협상이 자국에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세계 시민사회단체 입장에서는 인터넷 거버넌스가 국가 간 이해관계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을 우려하며, 인터넷에서의 인권 보호나 인터넷 개방성과 같은 가치가 옹호되기를 바란다.

미국 대량감시의 폭로와 인터넷 주소관리의 세계화

지난 4월 23-24일, 상파울루에서 개최된 넷문디알(‘넷 세계’라는 의미) 회의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이 회의의 공식 명칭은 ‘인터넷 거버넌스의 미래에 대한 세계 멀티스테이크홀더 회의’이다. 통상 정부 대표가 참여하는 회의가 ‘정상회의’라고 표현되는 것과는 제목부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회의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에드워드 스노든에 의해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대량감청 프로그램이 폭로된 것이다. 감청의 피해자인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은 지난 2013년 9월 24일 UN 총회에서 미국의 대량감청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이 문제를 해결할 거버넌스 체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미국의 대량감청 행위는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기술 커뮤니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인터넷소사이어티(ISOC)를 비롯한 전 세계 기술 커뮤니티 대표들은 10월 7일 ‘몬테비데오 선언’을 발표했는데, 그 핵심은 ‘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와 루트서버 관리 역할인 IANA 기능을 세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는 인터넷 주소정책을 위한 국제기구이지만, 여전히 미국 정부와 ‘헌신 확약(AoC, Affirmation of Committment)’이라는 계약 하에 있다. 또한 ‘인터넷주소관리기구’와의 계약 하에 미국 정부는 루트 서버 관리에 대한 감독 권한을 가지고 있다. 비록 인터넷이 미국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가 된 현재 미국 정부만이 이러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불공정한 것이며, 오랫동안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몬테비데오 선언 이후, ‘인터넷주소관리기구’의 대표는 브라질 대통령을 만나 멀티스테이크홀더 방식의 인터넷 거버넌스 국제회의를 제안했고, 브라질 대통령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넷문디알 회의가 개최되게 된 것이다.

상파울루 넷문디알 선언문 - 인터넷 권리장전

넷문디알 회의는 그 준비 과정에서부터 멀티스테이크홀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넷문디알 조직위원회는 정부, 기업영역, 시민사회, 학계 및 기술 커뮤니티 등 각 이해당사자 대표로 구성되었다. 누구나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열려있었고, 선언문 초안의 각 절에 대해 온라인을 통해 의견 수렴을 받았다. 회의 당일에는 4개의 마이크가 준비되어 정부, 기업영역, 시민사회, 학계 및 기술 커뮤니티의 참여자들이 차례로 발언하였다. 회의는 생중계되었고, 미리 마련된 세계 각지의 오프라인 공간을 통해 원격으로 발언할 기회도 주어졌다. 물론 행사장에만 800여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기에 세부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은 가능하지 않았지만,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할 만하다.
위 사진:<사진 설명> 넷문디알 회의 장면

이번 넷문디알 회의의 주제는 ‘인터넷 거버넌스의 원칙과 향후 로드맵’을 만드는 것이었고, 최종 결과물인 ‘상파울루 넷문디알 선언문’은 그 합의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G8, OECD, 유럽위원회 (Council of Europe) 등 몇 개의 인터넷 관련 국제회의의 선언문들이 나온 바 있지만, 대부분 정부간 합의문서이거나, 시민사회의 선언문이거나, 특정 지역에 한정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상파울루 넷문디알 선언문은 전 세계 다양한 참여자들이 모여 합의한 최초의 선언문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인터넷 거버넌스의 원칙으로 ‘인권’을 최우선적으로 명시했다는 의미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물론 인권만을 다룬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 권리장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정부, 기업 등을 포함한 다양한 참여자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시민사회 입장에서는 다소 문구가 후퇴한 부분이 있는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상파울루 넷문디알 선언문이 기존의 정치적 갈등이나 인터넷 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거버넌스의 모델과 관련해서도 여전히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이 선언문은 진화하는 인터넷 거버넌스의 하나의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이 선언문은 인권에 기반하고, 개방적이며, 공정한 인터넷 거버넌스를 위한 여정에서 현재 우리가 얼마만큼 왔는지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덧붙이는 글
오병일 님은 진보네트워크센터와 정보공유연대 IPleft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393 호 [기사입력] 2014년 05월 21일 22: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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