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낱의 인권이야기] 그런 사람 아니에요.

한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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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진행을 의뢰받은 곳에 도착해 강단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으면, 삼삼오오 모여 앉은 참여자들 사이로 묘한 웅성거림이 번진다. 호기심과 의구심 그 어디쯤에 있는 눈빛을 받아내는 일이 당혹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6년째 교육 활동을 하다 보니 이제는 능숙해졌다. 곧이어 터져 나올 익숙한 질문을 교육 소재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너스레가 늘기도 했고.

“몇 살이세요?”, “남자에요, 여자에요?” 강사 인사가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용기 있는 한 참여자가 ‘선빵’을 날린다. 자신의 수고로움을 대신해 준 사람에게 감사해하듯 모두 귀를 쫑긋거리며 내 반응을 살핀다. “왜요?”라고 바로 물어보면 “그냥 궁금해서요.” 라는 답을 얻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냥 던지는 질문은 없다. 특히 위의 두 질문은 ‘교통정리’를 위한 질문이라는 데 공통점이 있다. (나이, 성별, 사회적 신분 등에 관한) 본인의 관념 체계에서 나 같은 존재를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겠다는 난감함을 표시한 것이고, 질문에 답하는 순간 나는 고정된 자리를 배정 받는다.

속마음의 맥락을 살려 질문을 다시 상기시켜보자. (강단에 오를 만큼 학식과 경험을 쌓기엔 어려 보이는데), (머리 스타일이나 복장이 교육할만한 사람 같지 않은데), (당신에게서 별로 권위가 느껴지지 않는데) “몇 살이세요?” (남자라고 보기에는 목소리가 좀 얇은 것 같은데), (여자로 보기에는 머리가 짧고, 옷차림도 펑퍼짐하고, 몸가짐도 단정하지 않은데) “남자에요, 여자에요?”

“왜 우리는 서로의 수많은 정보 중 특히 나이를 궁금해 할까요?”라고 되묻자, “나이를 알아야 상대를 어떻게 대할지 알고, 그래야 혼란스럽지 않잖아요.”라는 대답이 이어진다. 나이를 묻는 행위는 “민증 까봐”식의 명령보다는 덜 노골적일지 모르지만, 실은 비슷한 욕망에 뿌리내리고 있다. 관계망의 레이더에 새롭게 포착된 사람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대할 것인가. 수직적 관계의 질서 안에 나를 붙박으려는 질문에는 곧이곧대로 대답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실제 내 나이를 밝히면 ‘어린 나이에도 능숙한 교육이 가능한 사람’임을 입증해야 하고, 나이를 부풀려 대답하면 ‘나이에 비해 동안을 가진 사람’ 쯤으로 인식된다. 내 외모가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한 점의 ‘혼란’으로 작동하는 것에 무한한 영광을 느끼며 “제가 남자라고(여자라고) 생각하셨던 분? 그 근거를 나눠주세요.”라고 말하며 교육 바깥의 교육을 이어간다. 빈약한 근거들이 오고가다 이내 참여자들은 어느 쪽도 뚜렷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한다. ‘진짜’ 남자도, ‘진짜’ 여자도 없는 현실. 오로지 ‘남자답지 못한’ 남자, ‘여자답지 못한’ 여자를 밀어내는 힘만이 존재하는 현실. 기준을 흔드는 존재들을 공공의 적으로 삼아 권력은 더욱 결집하는 현실. 이것이 우리가 차별을 이야기하는 출발점이다.
위 사진:[사진 출처] 인권교육센터 '들'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저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방긋)” 교육 참여자들을 만날 때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은 순간들이 꽤 있다. ‘그런’은 정체성이 머무는 장소다. 사람들이 읽어내는 ‘나’가 모여 ‘그런’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런 나’와 ‘그저 나’는 일치하기 어렵다. ‘여자들은 그렇지.’, ‘청소년들은 그렇지.’ 라는 말처럼 소수자/들은 고유한 존재가 아닌 하나의 무리로 퉁쳐서 인식되곤 한다. 갑갑한 정체성의 감옥을 탈출하려면, 우리는 삶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독해의 충돌을 빚어내는 수밖에 없다.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 대낮에 (학교에 있지 않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청소년을 예외적인 오류로 취급하는 사회일수록 다양한 ‘이물질’들이 만들어내는 혼란을 반갑게 맞이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를 그 자체로 궁금해 할 수 있을 테니까.

역설적이게도 재밌는 건, 동시에 나는 ‘그런’ 사람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나이, 성별, 장애, 병력 등의 결 에 따라 공통된 차별 경험은 있게 마련이다. 그 이야기들이 ‘그러함’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묶어주고, 공통의 이해를 낳으며, 저항할 용기를 내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복합적으로 얽힌 정체성의 숲에선 희한한 장면도 종종 연출된다. 나는 (아직까지는;) 이성애자 여성인데, 동성애자 여성 친구들과 나눌 수 있는 공감어린 이야기가 사실상 더 많다. 비혼 상태라는 또 다른 교집합이 나와 그녀들을 이어주고, 함께 투덜거리고, 함께 분노할 수 있는 접점을 마련해준다. 지금은 훌쩍 비청소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미성숙/성숙의 이분법은 ‘철들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옥죄는 논리로 작동하므로 나는 나를 위해 청소년인권운동을 계속 해나간다. 이것이 우리가 연대를 말하는 출발점이지 않을까.

차별의 무게를 홀로 감당해온 사람들의 연결과 섞임을 두려워하는 세력들이 꽤나 득세하는 시절이다. 이럴 때 일수록 더 많이 얽히고, 더 많이 더럽히고, 더 많이 시끄럽게 굴자. 그래야 더 재밌게 살 수 있을 테니까.
덧붙이는 글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입니다.
인권오름 제 399 호 [기사입력] 2014년 07월 10일 15:4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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