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으로 기억하는 4.16] 서북청년단으로부터 광화문 광장을 지켜야 할 이유

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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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주]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겠다는 약속은 참사 당일에 벌어진 일을 기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존엄과안전위원회'는 우리의 삶에서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참사에 직면하자고 제안한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열망은,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끊임없이 질문할 때 사회를 바꿀 힘이 된다. 매주 <인권오름>에 실릴 글이 질문을 함께 품는 과정이 되기를 바란다.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은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

얼마 전 독일의 반이슬람단체 ‘페기다’의 대표가 히틀러로 분장한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비난에 몰려 사퇴한 일이 있었다. 물론 분장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그의 외국인혐오와 인종차별적 발언들이 모두 도마에 올랐다. 그것은 히틀러 분장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공감대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작년 가을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구타, 고문, 살인 등을 일삼았던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는 발상을 ‘있을 수 없는 일’로 다루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은 씁쓸하다. 그러는 사이 서북청년단이 1월 중 광화문광장의 세월호 천막을 철거하겠다고 나섰다. 이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세월호 천막 그 이상이다.

‘혐오’ 너머의 혐오세력

세월호 참사 이후 드러난 여러 현상은 한국사회에 ‘혐오’를 중요한 사회 문제로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세월호 가족들의 단식만큼, ‘폭식투쟁’을 기억한다. 참사 초기부터 ‘일베’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혐오 경연과 ‘엄마부대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특별법을 반대하던 피켓 시위 등 다양한 집단이 부각되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몇몇 발언이나 표현을 중심으로 ‘혐오’를 이해한다면 이들은 모두 다른 집단일 것이다. 차별금지법에 성적 지향 등의 차별금지 사유를 명시하지 말라고 주장했던 집단이 스스로 동성애 혐오세력이 아니라고 주장하듯, 서북청년단이나 엄마부대봉사단도 스스로 혐오세력임을 인정할 리가 없다.

그러나 각각의 집단이 자임하는 역할은 꽤나 긴밀한 협력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유가족들을 향한 직접적인 혐오 표현들은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 ‘보상을 바라는 억지’라는 유언비어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이 펼쳐지고 노란리본과 천막 등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행동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실력 행사가 이어졌다. 서명운동이나 집회와 같은 대중행동이 필요해졌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 국가기구와 언론 등이 이루었던 협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국가기구나 언론과 같은 권력을 보유하지 못한 이들은 ‘합법적’이거나 ‘점잖은’ 방식이 아닌 혐오를 통해 대중행동을 만들어낸다.
위 사진:[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혐오를 통한 정치세력화

그들이 실제로 해내는 것에 비해 과잉 평가되는 측면도 있다. 서북청년단을 재건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정국에서 서북청년단이 가졌던 권력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반공’을 이뤄낼 국가권력이 체계적으로 자리 잡지 못한 시기와 지금은 다르다. 작년 말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결정에서도 확인되듯이 ‘합법적’인 국가기구의 작동으로 충분히 ‘반공’이 달성되고 있다. 서북청년단은 “세월호 희생자들의 넋을 간악한 망국적 선동에 이용하고 있는 종북매국세력들의 기만술”에 행정부와 사법당국이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행정부와 사법당국은 서북청년단의 조력을 구하면서 권력을 나눠가질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충분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은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더욱 진지하게 다뤄야 할 이유가 된다. 부족한 힘을 채우거나 포장하는 그들의 전략이 ‘혐오’이기 때문이다. 혐오 현상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유럽 등 전세계적으로 문제시되고 있다. 혐오 자체가 새로운 현상인 것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도 특정 집단을 지목하며 비하하고 사회적으로 기피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내는 현상은 언제나 있어왔다. ‘종북’ 혐오는 최근의 것일지 모르지만 ‘빨갱이’ 혐오는 한국사회의 오랜 습속이다. 문제는 혐오 자체가 아니라 혐오를 통한 정치세력화다. 최근 혐오세력은 서울시 인권헌장과 같은 제도를 무력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성소수자 혐오와 종교의 힘-신앙과 결합된 물질적 기반-이 만났기 때문이다. 기존의 혐오들이 보수세력의 집권 체제로 수렴되었던 것과 비교할 때, 최근의 혐오는 보수세력의 집권 체제를 넘어서 흘러넘치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와는 다른 모습의 정치를 하고 있다.

혐오세력이 무너뜨리는 것

혐오세력은 세월호 가족이, 이주노동자가, 성소수자가, ‘종북좌파’가 사회적으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비난한다. 그리고 그런 권력에 당당하게 맞서 경멸과 비난을 감행하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힘을 확인한다. 더 폭력적일수록 더 정당하다고 확인되는 것이 혐오의 정치다. 혐오는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의 문제거나, 표현 또는 윤리적 태도의 문제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혐오 자체가 혐오세력의 목적이 아니다. 그들은 취약한 집단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세를 불리고 있다. 혐오세력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류가 쌓아온 ‘인간’에 대한 감각을 무너뜨리고 있다.

혐오는 누군가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혐오에 맞닥뜨렸을 때 경험하게 되는 인격의 훼손은 순간의 모멸감이나 공포에 그치지 않는다. 혐오는 특정한 정체성을 문제 삼기 때문에 인격의 통합성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은 공격당하는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권리를 주장하는 순간 쏟아지는 혐오를 경험하면서 공격당하는 집단은 위축되게 된다. 권리를 주장하기 더욱 어려워진다. 한편으로는 혐오세력의 공격을 통해 특정한 집단에게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부정하는 표현 자체가 득세하게 된다. 혐오를 문제 삼으면서도 “나는 ***이 아니지만”이라는 조건을 달게 되는 경향도 생긴다. 정치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혐오는 혐오당하는 집단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광화문 광장에서 함께 지켜야 할 것

그들의 혐오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바라는 세상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성애자여야 하며 적령기에 결혼을 해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세상을 유지해야 한다. 혹시나 아이가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너무 오래 슬퍼해서는 안 되며 적당히 마음을 정리하고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며 사회에 기여하고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사회적으로 풀자고 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 사상과 같은 것은 무의미하거나 해악적이라 눈길을 줘서도 안 된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벗어나려고 해서도 안 되고, 다른 나라를 동경해서도 안 된다.

낯선 이야기들은 아니다. 보수세력이 추구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기도 하다. 그래서 혐오세력에 대한 비판은 혐오에 대한 비판 이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세상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혐오 자체에 함께 맞서야 할 이유도 분명하다. 인간에 대한 감각이 무너져 내렸던 홀로코스트와 같은 경험은 역사적 현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북청년단의 역사를 ‘있을 수 없는 일’로 충분히 역사화하지 못했던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긴장할 필요도 있다. 광화문 광장에서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것은 세월호 천막 그 이상이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감각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한발 더 나갈 수 있다.
덧붙이는 글
미류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입니다.
인권오름 제 424 호 [기사입력] 2015년 01월 29일 19: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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