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의 인권이야기] 자기 결정권이 아웃소싱 되어있는 사회에서 살아가기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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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우리를 처참하게 만들었던 말 한마디는 ‘가만히 있으라’였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의 온갖 부조리함과 부패와 구조적 모순을 보여주는 대참사였다. 그리고 이 참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한 마디는 견고한 지배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참혹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365일이 다 되도록 지금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가만히 있으라’고 강요하고,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다’. 자기 결정권을 아웃소싱 당한 채로...

우리는 자기 결정권이 아웃소싱 되어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자기 결정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침묵할 것 또한 강요받는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침묵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시스템이 작동되면 사람들은 부당함을 부당함으로 인식하지 못한 채 그 체제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어 버린다. 아웃소싱의 사회에서는 인권의 문제를 알아차릴 수 있는 감수성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조용하게 묻힌 죽음

1월부터 내내 침울했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들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지역의 교대제 노동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하면서 12월부터 1월 내내 사업장 교육을 다녔다. 1월 말 교육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교육을 갔던 사업장에서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교육 기간 중에 말이다. 사고 소식은 그 노동자가 사망하고 난 지 2주 정도 지나서 듣게 되었다. 20대 초반 비정규직으로 입사해서 5년이 넘게 조립작업을 했고 올해 정규직 채용의 대상이 되었지만, 결국 그는 정규직 채용에서 탈락하였다. 그리고 며칠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회사는 서둘러 가족들과 합의했고, 조용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정규직 채용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뒷이야기가 무성했다.
사고 소식을 접하고 난 뒤 먹먹해졌다. ‘교육장에 들어와 있었을 텐데.’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고뇌 속에 있었을 그에게 뱉었던 한 마디 한 마디가 튕겨져 나오는 듯했다. 정규직 노조에 주간 연속 2교대로 변경할 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건도 함께 바꾸어가자는 이야기가 얼마나 우습고 가당치 않게 들렸을지...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여러 해 동안 교육이나 조사활동을 함께했던 사업장이라 라인 어디에 가면 누가 일하는지 알 정도로 얼굴도 익히고 인사도 나누는 사이였다. 그러나 나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일상만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결정권을 박탈당한 그 누구 , 그 무엇과 함께 연대하기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의 선택과 결정을 하며 살아간다. 제약과 배제 없는 온전한 자기 결정권이 주어지는 게 가능할까? 나의 아주 작은 사소한 행위라도 그로 인해 누군가의 선택을 강요하거나 자기 결정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순간순간 경험하게 된다. 특히나 자기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존재에 대해서는 더욱더 말이다.

내가 만나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선택과 결정권을 배제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현장의 노동자들은 밥줄이 끊어지지 않으려면 모든 걸 감내하고 살 수밖에 없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골병들어가며, 과로사에 쓰러져가고, 심야노동에 수명이 단축되어가도, 잔업 특근에 목멜 수밖에 없다.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을 선택하고 변경할 권리가 애초에 주어지지 않고 있다.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 권한을 사업주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임금체불과 비인격적 대우도 참아가며 일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조건도 당사자에게는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에겐 평등하게 밥 먹을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사회통제 시스템의 작동은 자본의 목적에 따라 동원되고 활용된다. 거대한 그물망이 되어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노동자와 민중들의 삶은 철저하게 분해되고 통제된다. 노동, 정치, 사랑까지 모든 것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박탈되고 아웃소싱 되어 간다. 살기 위해 스스로 그 시스템을 내면화해야 하고 자발적 행위를 강요받는다.

자기 결정권을 박탈당한 그 누구, 그 무엇과 함께 부당함에 맞서서 투쟁하는 것 이것이 내가 살아가고자 지향하는 삶이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나약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내가 누군가와 같은 속도로 호흡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의 삶을 표면으로만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섣부르게 타인의 삶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되뇌며 살아가지만 순간순간 망각하기도 한다. 내가 같은 속도로 걷고, 호흡을 맞출 때 타인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그의 영전에 하얀 국화꽃과 노란 리본을 올린다.

위 사진:출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만평 (2014.5)
덧붙이는 글
이은주 님은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434 호 [기사입력] 2015년 04월 14일 15: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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