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투, 여덟살 구역] 지금 이 순간이 필요해

엠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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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여덟 살 애들은 대부분 우리를 좋아해 준다. 책언니 시작하고 한 1년 정도까지는 그 점만큼은 자신 있었다. 우리에게는 자꾸자꾸 전화해서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여덟 살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책언니 수업들이 단기 강좌로 끝나며 사라지고, 강화도 수업 딱 한 군데가 유지되고 있는 요즘은 조금 자신이 없다. 만난 지 3년째 되어가는 이 친구들에게 우리는 좀 찬밥 신세랄까. 용건 없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슬프다. 뭘까, 이건. 권태기 같은 걸까. 너무 익숙해지고, 낯선 인간에 대한 호기심 약발도 떨어진 탓에 이제는 책언니가 매력이 없어진 걸까. 아, 난 이 꼬맹이들이 뭐라고 맘 떠난 애인에게나 할 법한 자존감 떨어지는 푸념을 하는 걸까.

대충 이유는 알고 있다. 책언니들이 어떤 사람이든 우리의 인간성(?)과 애들이 수업에서 느끼는 재미는 별개다. 애들은 마냥 순둥순둥 착한 선생님과 가끔 매도 들지만 반 애들을 재밌게 해주는 화끈한 선생님을 구분해서 심지어 후자를 더 낫다고 말한다. 책언니뿐만이 아니라, 책언니 수업까지 사랑받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좋은 사람이고, 한없이 편한 친구이면서 가능하다면 역량 있는 교육자도 되어야 한다. 매번 애들을 확 잡아끄는 몰입감 쩔고, 재미 쩔고, 심지어 울림까지 주는 수업을 할 줄 안다면 우리가 무슨 수업의 신이게. 못 한다, 그렇게는. 가끔 우리가 생각해도 잘했다 싶을 때도 있다.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아서 오늘 애들이 집중했다고 느낄 정도의 수업을 하고 난 다음 주에는 애들이 먼저 물어온다. 오늘 뭐 할 거냐고. 문제는 점점 이 말을 듣기가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언제부턴가 이 사실을 지나치게 신경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간간이 장난스레 하던 우는 척 말고, 수업하다 말고 정말로 눈물 바람을 내고야 말았던 건, 거슬러 올라가면 꽤 오래전부터 쌓여온 불안 때문이었다.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

3년. 처음 책언니를 시작했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미 오랜 시간 쌓인 관계가 있고, 애들 안에 자리 잡은 우리에 대한 상(책 읽자고 떼쓰는 호구들?!)이 있고, 반복된 행동 패턴과 풀지 못한 문제들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숙제들이 있다. 3년. 해야 할 일들은 여전한데, 해낸 것들은 많지 않아 보였다. 우리와 보낸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사람들은 무얼 얻었을까. 처음부터 책언니를 했던 애들은 책 읽는 것 자체를 지겨워하기 시작했고, 남자애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자기들끼리 뭉쳐서 싸우고 소리 지르고 뒹굴고 놀다가 가뭄에 콩 나듯이 수업에 참여했다. 우리의 수업 성공률은 2학년 이후로 언제나 50%였다. 가져간 내용을 절반이나 진행했을까.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애들의 수업 방 탈출로 인해 흐지부지 수업종료 되는 날이 많았다.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만화책부터 붙잡는 애들을 한 명 한 명 어르고 달래 방으로 데려오기도 번번이 쉽지 않았다. 매주 돌아오는 나다 회의 시간에 책언니 보고를 해야 할 때면 목이 막힐 때가 많았다. 잘하고 있는 걸까.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누군가 묻는다면 괜찮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시작조차 하기 힘든 날이 반복된다는 건 단순히 ‘편한 관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닐까. 우리, 아니 어쩌면 그냥 내가 책언니를 해나갈 역량이 없는 건 아닐까. 재미없는 성격이라, 순발력이 없어서, 에너지가 딸려서, 자기밖에 볼 줄 모르는 속 좁은 인간이라, 정이 없어서, 사람들을 안아줄 줄 몰라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을 덮어두고, 가을 새롭게 시작하는 책언니를 앞뒀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수업 준비를 더 잘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길고, 좀 더 내용 있는 수업 진행안을 오랜만에 열심히 열심히 썼다.

그런데 망했다. 나름 야심을 품고 가을 책언니를 시작한 첫날, 오랜만에 만났다는 반가움도 무색하게 애들은 수업하기 싫은 티를 팍팍 냈다. 오랜만이라 당황도 배가 됐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를 보고 마침 방안에 모여 있던 몇 명이 눈을 빛내며 마피아 게임을 하자고 했다. 난 오늘은 수업하러 온 거니 게임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수업하자. 내 말 좀 들어줘. 들어줘. 들어줘. 내가 그 날 한 말이라고는 다 그런 것들이었다. 한 명 한 명한테 가져간 책을 개별적으로 읽어주고, 드문드문 오늘 해보려 했던 얘기들을 시도하긴 했지만, 이미 다들 귀를 닫고 있었다. 그 꽉 막힌 방 안에서 나는 어느 순간 말할 힘을 잃었다. 그리고는 우울함을 미처 숨기지도 못하고 의자에 망연히 앉아 있었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맨날 시작도 못 하고 이게 뭐야. 억울하고 서운한 한편으로 미안했다. 내가 못나서 모두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금 이 시간을 끝내버리면, 다음 주에 다시 아무 일 없었던 척 애들 얼굴 보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더듬더듬 떠오르는 말들을 했다. 내가 잘 못 해. 사실 이번 수업부터는 쩡열 말고 내가 주로 진행을 해보기로 했는데, 사실 난 잘할 자신이 없었어. 말을 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사실 그때는 멘탈이 가루가 되어 있던 시기라 좀만 맘이 긁혀도 무슨 병 걸린 애처럼 뻑 하면 눈물이 날 때이기도 했다. 다시 생각하니 조금 쪽팔린다.

내 말을 들어!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좀 꼴사납긴 한데, 그래도 그 날 힘들다고 털어놓은 덕분에 다음 주에도 다시 애들 얼굴 볼 기운을 얻었으니 한심한 짓 했다는 자책은 그만하련다. 내가 잘 못 해. 나 사실 자신이 없어. 이 말은 요즘 나 힘들다는 투정이기도 했고, 내가 좀 못나고 나약한 사람이라도 받아주면 좋겠다는 바람이기도 했고, 오늘 내가 좀 재수 없게 군 것 같은데 잘못했어, 용서해달라는 부탁이기도 했다. 실은 그 날 집에 돌아가는 내내 애들이랑 간만에 만난 건데 그냥 하루 놀자고 할 걸, 그때 마피아 게임을 그냥 할 걸, 내가 무심코 흘려보낸 순간들이 자꾸만 후회됐다. 귀를 막은 상태로 내 할 말만 일방적으로 떠들고 왔다는 자각이 뒤늦게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좀 단호한 태도를 보여서라도 수업 분위기를 잡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생겼다. 맨날 글 쓸 때는 ‘책언니는 사람 만나는 일이다.’ 운운했으면서 책언니를 비롯해 내가 나다에서 하는 것들이 인문학 ‘교육’의 영역에 속한다는 걸 의식하면서부터는 못내 어떤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건 수업인데 놀기만 해서는 되겠느냐’라는 사회의 시선이 집요하게 나를 감시했고, 애들이 방 탈출을 감행하고 나면 텅 빈 방 안에서 한없이 무력감이 들었다. ‘관계’와 ‘교육’은 어쩐지 양 극단에 있는 가치들처럼 느껴졌다. 애들이랑 좋은 관계를 계속 지키고 싶다면 수업을 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애초에 이 시간을 빌미로 이 친구들과 나누고 싶었던 삶의 태도와 지향이 있었고, ‘약자들의 연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든 전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활동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학교 끝나고, 방과 후 교실까지 마치고 온 애들이다. 더는 누가 시키는 일 안 하고 만화책이나 내 맘대로 보고 간섭 없이 있고 싶은 맘을 애들이 말 안 해도 내가 알았다. 실은 이미 예전부터 키워온 자괴감이었다. 책언니는 학교 수업에 비해서는 통제가 훨씬 덜한, 그러나 애들이 느끼기에는 ‘자꾸 책을 읽으라 하고, 우리를 놀 수 없게 붙잡아놓는다’는 면에서는 똑같이 지겹기 짝이 없는 교육의 굴레 속에 있다. 우리는 과연 나날이 더 강해질 학교, 교육 자체에 대한 이 사람들의 스트레스, 거부감을 넘어서 이 만남을 앞으로도 지속해나갈 수 있을까.

위 사진:최근 세월호 풀뿌리 토론을 한 후 찍었던 기념사진! (공개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낸 사진입니다~ 히히)

세 가지 질문

애들 안 괴롭히고, 얼마 안 되는 자유마저 빼앗지 않으면서 책언니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한 걸까? 이렇게 질문했을 때, 지난번의 일을 통해 느낀 게 있다면 수업을 잘 만들면 된다는 내용에 대한 고민만으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나 혼자 복잡하게 생각하는 동안 놓쳤던 것이 관계였고, 요즘 자주 생각하게 되는 단어로는 ‘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세 가지 질문’이라는 그림책을 우연히 읽었다. 톨스토이의 원작을 어린이용으로 각색한 이 그림책에는 다음의 세 질문이 나온다.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일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세 가지 질문에 맞닥뜨린 아이는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맨다. 그러던 중 늙은 거북이 레오를 찾아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레오의 밭을 가는 일을 돕고 폭풍우에 다친 판다 가족을 구해와 치료해주게 된다. 판다들이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세 질문의 답을 궁금해하는 아이에게 레오는 이미 너는 그 답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네가 다친 판다를 발견했을 때, 너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어미 판다의 다리를 치료하고 아기 판다를 구하는 순간이었지. 그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어미 판다와 아기 판다였고, 가장 중요한 일은 판다들을 치료하고 안전하게 보살펴주는 일이었어.
기억하렴. 가장 중요한 때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란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너와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거야. 바로 이 세 가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란다.”

이 뻔하고 흔한 말들을 자꾸만 되새기게 되었던 것은 이것들이 실은 지키고 살기 가장 어렵고 버거운 가치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내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을 떠올려도 그렇고, 책언니만 해도 그렇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말을 하는 나 자신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이야기들을 전하는 것이며, 가장 중요한 때는 이 시간이 만들어낼 더 나은 미래라고.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관계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을 잊게 만든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온전히 만날 수 없게 만든다. 도저히 내 얘기를 들어주고, 맞장구쳐줄 기운이 없을 만큼 힘든 기색의 친구를 만났을 때, 그 순간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정말 그 친구를 좋아하고 아낀다면 내 얘기 하고픈 욕심을 잠시 내려놓고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묻는 게 기본 아닐까.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살피고, 마음을 헤아리고, 애쓰고 살아가는 일. 그 기본을 나는 지키고 살았나. 실은 그 부분이 제일 자신이 없다. 교육의 한계고 뭐고 자시고 거창한 고민 할 것도 없다. 어차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는 기존 교육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을 때도 가장 최선의 탈출법은 현재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하는 태도다. 어쨌든 변화의 실마리는 교육자 개인의 역량보다는 그 공간에서 만나는 서로의 케미(?)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혼자 아무리 빠방한 수업 기획안을 들고 가서 날고 기어도 상대방이 안 받아주면 다 소용없다. 그래서 요즘은 ‘오늘 수업 잘했어!’ 이런 말보다 ‘오늘도 수업은 망했지만, 그래도 애들이랑 분위기가 되게 좋았어!’ 이런 말이 더 좋다.

마치면서

3년. 책언니 활동이 필요하다는 생각만큼은 확실해졌지만, 이 일을 내가 해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언제나 자신 없을 때가 많았다. 이런 내가 책언니로 남는 데 필요한 건, 애들이랑 만나면서 정말로 지금 이 순간과 눈앞의 사람에게 충실하기 위해 가져야 할 건, 맨날 관계 타령만 하는 너희 방식은 틀려먹었다고 말하는 세상의 시선에 맞서고, 씩씩하게 버텨낼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책언니에서 만난 작은 사람들은 우리를 어느 정도 믿어줬다고 생각한다. 이젠 우리가 스스로를 믿을 차례다.
덧붙이는 글
엠건 님은 '교육공동체 나다' 활동가 입니다.
인권오름 제 458 호 [기사입력] 2015년 10월 13일 22: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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