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으로 읽는 세상] 라이언 화이트를 기다릴 수는 없다

한국 에이즈 30년, 인권을 살펴야 하는 이유

미류
print

[편집인 주]

세상에 너무나 크고 작은 일들이 넘쳐나지요. 그 일들을 보며 우리가 벼려야 할 인권의 가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질서와 관계는 무엇인지 생각하는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넘쳐나는 '인권' 속에서 진짜 인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나누기 위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하나의 주제에 대해 매주 논의하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인권감수성을 건드리는 소박한 글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때로는 촉촉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가가기를 기대합니다.

아이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전염성 질환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다른 학생에게 감염시킬 위험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학부모들과 교사들이 그의 등교를 거부하는 탄원을 제출했다. 그는 차별에 반대하며 법정 투쟁을 벌였고 에이즈를 인권의 문제로 다루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것은 30년도 더 된, 미국의 라이언 화이트 이야기다.
한국에서 첫 HIV감염인이 확인된 지 30년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는 라이언 화이트가 아직 없다.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반복된 차별의 현실만 봐도 분명하다. 세계 에이즈의 날(12월 1일)을 맞아 잠시라도 에이즈 인권 현실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30년이라는 숫자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의 건강하게 살 권리를 무시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건강하게 살 기회를 놓치고 있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감염인을 피할 수 있는지만 질문하는 사회에서는 인권도 예방도 불가능하다.

30년 전 ‘상륙’한 에이즈

한국에서 에이즈는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질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 미국에서 질병 유행이 시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1985년 첫 감염인 확인 소식을 전하는 신문 기사의 제목도 “후천성 면역결핍증 국내 상륙”이었다. 아직 전염경로나 치료방법이 분명하지 않던 당시 에이즈 대응은 감염인 색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에이즈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HIV)가 밝혀지고 일상생활에서 전염이 되지 않으며 항바이러스제재를 복용하면서 건강관리가 가능하다는 점 등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감염인 인권은 제자리였다.
감염이 확인된 사람들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감염 사실이 알려지면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았다. 동료들에게 터놓고 말하기 어려웠으며 혹시라도 알려질까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러니 감염이 의심되더라도 검사를 받아볼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검사를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낙인이 될까 두려웠고, 검사 결과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때로는 본인이 검사받는다는 사실조차 모르다가 결과를 확인하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이십여 년이 흘러 에이즈예방법이 큰 틀에서 개정되었고 감염인 색출보다는 자발적 검사를 독려하는 방향으로의 정책 전환도 이루어졌다. 보건소에서 익명 검사가 가능해졌고 의료기관을 방문하지 않더라도 직접 검사해볼 수 있는 신속검사키트를 약국이나 온라인쇼핑몰에서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검사 전후의 상담 지원은 미흡하다. 유엔에이즈(UNAIDS)는 검사의 3대 원칙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밀이 보장되어야 하고, 상담이 수반되어야 하며, 수검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검사와 상담이 예방과 치료, 돌봄과 사회적 지지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인권 현실은 여전히

검사 전후의 상담이 충분히 지원되더라도 감염인들이 겪는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공중을 위해 감염인을 색출하는 것과 감염인 자신을 위해 검사를 독려하는 것 사이의 진전은 작지 않다. 약을 복용하고 치료받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진료비 지원도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감염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감염인들 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여전히 냉혹하고 서럽다.
‘2015년 HIV/AIDS 10대 이슈’의 첫 번째는 에이즈환자가 갈 수 있는 요양병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가 보라매병원의 치과 진료 거부, 세 번째가 진료비 지원 예산 불안, 네 번째가 메르스 사태로 에이즈 환자를 내보낸 정부였다. 요양병원마다 에이즈 환자의 입원을 기피하고, 질병관리본부가 2010년부터 에이즈환자 장기요양사업을 위탁한 수동연세요양병원이 인권침해 및 차별행위로 위탁계약을 해지당한 후 에이즈 환자들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치과 진료와 같이 에이즈 환자들이 에이즈와 상관없이 치료를 요하는 각종 질병에 대한 치료 거부와 차별 대우 문제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진료 거부나 차별을 시정하려는 정부의 의지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진료비 지원 예산이 몇 년째 미지급되어 감염인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감염인들이 치료를 받을 때 본인부담금을 지원한다. 그러나 예산이 확보되지 않아 2015년 말 미지급금이 21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약회사의 특허권 남용으로 에이즈치료제는 워낙 값이 비싸다. 감염인들이 진료비의 10%를 미리 내야 하는 부담도 적지 않다. 정부와 국회의 예산 확충에 대한 강한 의지가 필요한데 미지급금은 계속 쌓이고 있다. 치료를 못 받는 것도 걱정, 받아도 걱정인 현실이다.

위 사진:올해로 30년,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을 앞두고 올해 HIV/AIDS 10대 이슈 발표와 함께 UNAIDS 낙인지표조사를 시작할 것이라는 기자설명회가 열렸다. (출처: 미디어오늘)

알고도 조직되는 편견

30년이 흐르는 동안 에이즈 편견은 조금씩 해소되어왔다. 십년 전이었던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누군가 “자위를 하다가 정액이 입에 튀었어요. 에이즈에 걸리는 걸까요?”라는 질문을 올린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마 이제 와서도 이런 질문을 올리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러나 몰라서 생기는 편견을 대신해 알고도 조직되는 편견이 등장하고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 책임져라!” 굳이 돈을 들여 신문 하단 광고를 내며 반동성애 혐오를 조장하는 세력이 활개를 치고 있다.
살면서 누구나 아플 수 있고 어떤 질병으로 죽음을 맞게 될 수도 있다. 에이즈에 걸린 누군가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그가 죽어야 할 이유도 아니고, 그의 죽음을 스스로 책임져야 할 이유도 아니다. 인권은 우리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누려야 할 권리다. 치료받을 권리, 건강하게 살 권리는 기본적 인권이다. 누군가의 자격을 따지고 깎아내리는 혐오는 인권을 부정하는 폭력이다. 한국 사회가 진료 거부를 인권의 문제로 보지 못하고 편견을 해소하는 데에 무능한 현실은 메르스 사태에서도 그대로 확인되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방치하는 사회는 우리 모두의 건강할 권리를 위협한다.
전 세계적으로 에이즈 신규 감염은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신규 감염은 감소 추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유엔에이즈도 한국의 신규 감염 증가를 주목하고 있다. 유엔에이즈가 ‘2016년 한국 HIV/AIDS 낙인지표 조사 연구’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도 그것이다. 낙인과 차별, 빈곤이나 여성 인권 수준 등이 에이즈 발병과 유행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이라는 점이 이미 충분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공무원의 질병 정보를 수집하거나 에이즈 환자 출입국을 제한하는 몇 안 되는 나라의 하나로 남는 것은 에이즈 예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30년, 정부가 달라져야 할 때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는 에이즈의 날을 맞이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우리 HIV/AIDS 감염인들은 위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는 자신을 혐오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사랑하며 사회구성원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이들은 낙인지표 조사 연구에 직접 참여해 동료 감염인들을 인터뷰하고 한국의 감염인 인권 현실을 증진시키기 위한 여정에 나서고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당연한 요구를 위해 삶을 걸어야 했던 라이언 화이트를 기다릴 수 없다. 모든 것이 처음이던 그때 중학생인 그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모욕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인류는 그 이후로 에이즈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더욱 많은 지식과 정보, 에이즈를 다루기 위한 더욱 많은 지혜와 기술을 가지고 있다. 정부는 감염인 인권 증진이 예방임을 인정하고 인권에 기반을 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감염인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귀를 여는 것만으로도 정부는 성큼 나아갈 수 있다.
덧붙이는 글
미류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465 호 [기사입력] 2015년 12월 03일 13:58:48
뒤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