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으로 읽는 세상] 성소수자 혐오와 극우정치

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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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주>

세상에 너무나 크고 작은 일들이 넘쳐나지요. 그 일들을 보며 우리가 벼려야 할 인권의 가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질서와 관계는 무엇인지 생각하는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넘쳐나는 '인권' 속에서 진짜 인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나누기 위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하나의 주제에 대해 매주 논의하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인권감수성을 건드리는 소박한 글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때로는 촉촉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가가기를 기대합니다

지난 2월 29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대한민국바로세우기국민운동본부(대표 전광훈 목사)가 주관한 3당 대표 초청 국회 기도회는 한국 혐오세력이 국회에 입성했음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기도회에 참여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의 발언은 마치 정답이 정해져 있는 듯 비슷했다. 김무성 의원은 “차별금지법, 동성애법, 인권관련법을 제정하지 않겠다”고 했고 박영선 의원은 한술 더 떠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께 동성애법, 차별금지법, 인권 관련 법, 그리고 이슬람 문제 등을 저희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말씀드린다”고 했다. 기도회를 진행한 전광훈 목사는 “두 당대표가 항복 선언을 하신 것”이라며 으쓱댔다.

차별금지법, 동성애법을 제정하지 않겠다는 게 왜 혐오발언이냐고?

기도회가 끝난 후 시민사회의 비판이 일자 박영선 의원은 그것은 “야당에 대한 흠집내기”라며 ‘더불어민주당은 동성애법을 반대한다’는 자신의 발언은 보수적인 기독교가 그 문제에 대해 민감해서 야당의 입장이 제정은 아니라는 걸 설명하는 차원이었다고 답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답답하다. 기본적인 소수자 차별의 메카니즘과 혐오발언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법을 제정하지 않겠다’고 소신(?) 발언을 왜 비판하는지 알지 못하는가보다.

또한 이는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후퇴하고 있고, 혐오에 대한 규제와 제도방안이 없는 상태에서 혐오를 단순히 감정의 문제로만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혐오표현과 혐오범죄에 대한 사회적 제재도 없는 상태에서 두 개가 같은 것으로 이해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혐오표현은 혐오 범죄로 이어지거나 동시에 수행되므로 동일한 것은 아니다. 혐오에 대한 금지는 국제인권규약에 명시됐지만 아직 한국에는 이를 규율하는 법제도가 없다. 유엔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약칭 자유권 규약) 20조에 2항은 “차별, 적의 또는 폭력의 선동 이 될 민족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증오의 고취는 법률에 의하여 금지된다”고 했다. 혐오표현은 차별적 속성을 이유로, 어떤 집단에 대한 증오를 고취하여 불특정 다수가 해당 집단에 대해 적대감을 갖도록 유도하고 나아가 차별, 또는 폭력과 같은 구체적 행동을 조장할 수 있는 표현이다.* 이러한 혐오표현은 해당 집단을 위축시키고 배제를 강화하여 해당 집단 또는 그러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적 위치를 약화시킨다. 또한 다른 사회구성원들에게도 차별과 반감을 불러일으켜 동등한 구성원으로서의 관계를 맺는 것을 꺼리게 한다. 나아가 모든 인간의 평등, 존엄에 대한 가치를 흐려놓는다.

김무성의원과 박영선의원이 동성애법인 차별금지법을 만들지 않겠다고 공공장소에서 국회의원이라는 공인의 신분으로 선언한 것이 혐오발언이다. 차별금지법을 “하느님의 섭리를 어기는” 동성애법으로 규정한 것 자체가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혐오를 고취하는 일이다. 단순히 법 제정에 대한 의견이 아닌 것이다. 누구나 차별을 받지 않도록 금지하기 위한 인권법이 왜 동성애법인가. ‘누구나’ 에 성소수자가 포함돼서는 안 된다고 보수기독교를 비롯한 보수정치인들이 주장하는 것 자체가 혐오표현이다. 차별금지법은 누구든 자신의 처지와 정체성 등으로 차별받지 않도록 제도와 관행을 바꾸기 위한 인권법이다. 그가 장애인이든, 이주민이든, 성소수자이든 간에 같은 인간으로서 인간적 존엄성을 보장해야 하는 기본적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법이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과 국정과제에 차별금지법 제정이 포함될 정도로 반대하기 힘든 기본 법이다. 한마디로 차별금지법은 국제사회에 합의된 기본적 인권법이다. 그러니 유엔인권이사회를 포함한 국제인권기구가 성적 지향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수년째 권고할 때마다 정부는 제정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못하고 검토하겠다고 얼버무리는 것이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은 혐오발언이 행해진 공간이 국민들이 직접 뽑은 국회의원들이 있는 의원회관이라는 점이다. 작년 유엔자유권위원회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적 행사에 대해 공공건물을 대관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러한 권고를 무시하는 것도 모자란지 공인인 국회의원들이 혐오발언까지 하고 있는 형국이니, 한국의 인권현실은 어둡다.

위 사진: 3월 8일 기자회견에서 레인보우 보트(Rainbow Vote)가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일삼는 ‘최악의 정치인 베스트 오브 베스트(Best Of Best)’를 발표했다. <사진 출처 ; 비마이너>


성소수자만 배제되는 정치는 상관없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만이 문제가 아니다. 어느 때보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말들이 서슴지 않고 나오고 있다. 동성애는 신의 섭리를 어기는 거야,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범죄가 많아, 장애인들 때문에 복지예산이 많이 들어 등등의 말들에 귀가 솔깃해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때다. 소수자들을 차별해도 합당한 것 같은 말들을 공인인 정치인들이 쏟아낼 때 우리 사회 인권의 가치는 뒤로 갈수밖에 없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일종의 신호이다. 인권의 기준이 뒤로 후퇴하고 있다는 뜻이다. 기득권세력들이 자신의 이득(권력, 부)을 위해 보편적 인권을 부정하며 모든 사람들이 누려야할 권리들을 축소하려할 때, 가장 먼저 소수자들을 공격하곤 한다. 소수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일은 저항도 별로 없을 것으로 예상되고 편견에 기대어 인권의 축소를 합리화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 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장애인이 아니니까, 성소수자가 아니니까, 이주민이 아니니까' 라며, 내 일이 아니라고 여기지만 정말 ‘나’와 상관없는 것일까? 우리와 상관 없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모든’에서 제외된 ‘어떤 것’, 즉 다시 말해 인권을 박탈해도 되는 무엇-예외를 인정하는 순간, 예외에 포함되는 것들은 주류세력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확장될 수 있다. 지금은 성소수자의 인권이 문제가 되지만 나중에는 가난하거나 능력이 없다고 인정되는 자들로 확대될 수도 있다. 인권의 보편성은 그렇게 파열된다.

그렇기에 혐오는 극우정치와 만난다. 극우정치는 ‘애국’, ‘질서’라는 추상적 이름으로 보편의 내용을 해체하며 기존 질서, 주류세력을 옹호하려 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 경제위기 이후 극우세력의 발호는 커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상상한 가족, 즉 이성애 가족 모델'만'을 가족의 가치로 세우며 그를 바탕으로 애국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현혹한다. 가족과 국가를 지키면 당신들의 불안-실업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이렇게 사회를 불안하게 한 것은 소수자들-성소수자들, 이주노동자들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극우정치가 애용하는 혐오는 국가권력에 대한 충성을 높이고 사회불안의 원인을 돌릴 ‘타켓’을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이제 사회불안은 잘못된 정책이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들의 존재 문제로 전도된다. 1929년 경제대공황이후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발호한 파시스트당과 나치당의 대중적 지지도가 높았던 것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나치가 유대인들을 어떻게 학살했고 비유대인들이 그 학살을 어떻게 방조했는지도.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극우정치

극우정치를 지지하고 동참하는 사람들이 기득권세력만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불안의 원인제공자가 보이지 않아 답답할 때, 화를 내고 폭력을 휘두르고 싶은 누군가를 ‘만들고’ ‘부추기는' 혐오 선동을 하는 것이 극우정치다. 극우정치에 ‘희망’을 건 사람들이 혐오에 동참한다. 그러니 가난한 백인들이 흑인이나 타국에서 온 이주민을 혐오하는 일이 생긴다. 미국의 공화당 경선에서 극우선동을 하는 트럼프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흐름에 있다. 트럼프는 반(反) 이민 같은 퇴행적 정책을 내놓고 그의 연설장에선 흑인들을 내쫓을 정도로 배제와 혐오의 정치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지난 경선에서 트럼프는 실업률이 높고 소득은 낮은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극우정치가 인권의 가치를 어떻게 해체하고 뒷걸음치게 만들고 있는지,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보고 있다.

한국의 혐오현상은 조직적인 보수정치와 만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자유총연맹, 뉴라이트, 어버이연합회와 같은 정부지원을 받는 보수단체들이 보수적 기독교단체들과 성소수자 혐오선동에 같이 해왔다. 단지 잘못된 종교적 신념 때문에 혐오가 확산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 둘은 서로 만나 정치를 더욱 우편향으로 만들고 있다. 새누리당을 포함한 보수정치인들은 이들의 표를 의식해 혐오적 반인권적 발언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이렇게 정치담론을 극우로 몰아넣으며, 모든 사회구성원의 더 많은 권리를 만들기 위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흩뜨리고 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혐오의 정치는 더 극에 달할 것이다. 그들은 빈곤과 경제불평등의 책임을 소수자들에게 돌리면서 표를 획득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보수기독교를 등에 업은 혐오세력들의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은 그들이 원하는 차별과 배제의 정치를 공언할 것이다. 이제 혐오의 정치, 극우 정치는 소수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함께 맞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옹호하지 않는다면 그동안 쌓아왔던 인권정책들은 다 무너질 것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는 미국의 샌더스 돌풍처럼 평등의 가치를 내거는 정치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극우세력-혐오세력의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들만이 넘쳐날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는 정치를 만들기 위해서 의회가 아닌 공간에서 반(反)혐오운동을 기획해야 한다. 의회가 아닌 공간에서 펼쳐지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담론이 의회 내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권의 정치적 힘을 모으고 보여줘야 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 위축되지 말고 그들이 혐오발언을 할 때마다 더 큰 목소리로 광장에서, 인터넷 공간에서 당당하게 따지고 묻자. 그런 혐오와 차별의 정치가 누구에게 득이 되냐고, 당신이 원하는 세상은 무엇이냐고. 그리고 선언하자. 우리는 모든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며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혐오의 정치는 그것을 채워줄 수 없다고.


* 이주영, ‘혐오표현에 대한 국제인권법적 고찰’, [혐오표현의 실태와 대책 토론회 자료집], 2016.1.28.
덧붙이는 글
명숙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476 호 [기사입력] 2016년 03월 10일 3: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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