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의 인권이야기] 파란색 자동차와 흰색 양

낙타
print
어느 휴일 집에서 TV를 켜두고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TV에서 “재원이는 파란색~ 소연이는 분홍색~”이라는 대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브라운관으로 눈을 돌렸을 때 화면 속엔 자애로운 얼굴을 한 엄마가 아들과 딸에게 각각 파란색과 분홍색으로 포장된 초콜릿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바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유명 초콜릿 광고였다. 달걀모양의 포장 안에 초콜릿과 함께 장난감이 동봉되어 있어 어린이들의 흥미를 더 끌 수 있는 제품이었다.

다음 날 사무실 근처 편의점에서 실제로 이 제품을 남아용, 여아용 하나씩 구입해서 개봉해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아용 포장에서는 파란색 플라스틱 자동차 장난감이, 여아용 포장에서는 보들보들한 감촉의 흰색 양 인형이 나왔다. 자동차와 양. 다양성과 평등의 가치에 대해 먼저 배워야 할 아동들에게 이 사회의 그릇된 편견과 고정관념을 그대로 답습시키는 것 같아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한국 사회에 사는 대다수의 아동들은 가정 및 교육 과정, 미디어 등 일상 속 셀 수 없이 많은 곳에서 성별이분법적이고 성차별이 만연한 환경에 노출돼,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강요받고 있다. 실제로 아동들이 일상 속에서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이나 출판물만 보더라도 남성캐릭터들은 늘 역동적이거나 혹은 무성적으로 그려지는 반면에, 여성캐릭터들은 조신한 성격과 가냘픈 목소리, 차림새 등의 방식으로 여성성을 드러내어 여성캐릭터임을 인식하게끔 만든다. 이렇듯 정규 교육과정에 진입하기도 전부터 성차별적 사회화를 겪는다.

더욱이 정규 교육과정 속에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올해 6월 국가인권위원회가 개최한 ‘인권친화적 교과서 개발을 위한 위크숍’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초·중등학교 교과서 내에서 남학생은 대체로 범죄, 부도덕, 예의 없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여학생은 모범적이고 친절한 모습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예전에 비해 많이 개선되어졌다고는 하지만 교과서 내에서의 남녀역할이나 질적 불균형은 여전하다.

더불어 최근 논란이 된 교육부의 성교육 표준안은 어떠한가. 성별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내용들로 점철되어져 있고 성소수자의 존재를 삭제하여 다양한 성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교육 기회, 정보접근권은 차단됐다. 성차별과 인권침해를 버젓이 일삼고 있는 교육안으로 성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이렇듯 유아시절부터 오랜 시간 학습되고 누적되어 온 성차별과 고정관념 및 편견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아를 실현하고 발전시키는데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화된 성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혹은 다수와 다른 감정 혹은 사고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을 재단하고 억압하며 다수의 편에 서기 위해 자신을 숨긴 채 살아가기도 한다. 과연 이것이 행복한 삶일까? 그리고 이러한 학습된 성차별과 고정관념 및 다양성에 대한 교육의 부재는 남녀 성차별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성소수자 및 장애인, 이주민 등 무수히 많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로 필연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서구의 많은 국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러한 차별해소를 위한 노력들을 기울여왔고 그래서 실제로도 아동을 대상으로 한 교재나 장난감 또 사회제도나 미디어, 매체들 속에서 성역할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며 다양한 인종 및 장애인, 성소수자들의 모습들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최근 들어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성평등 동화책들이 출판되어지기도 하고 해외의 도서들이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지만, 아직 우리가 평등을 향해 가야할 길은 편의점에서 구입한 초콜릿 안에 들어 있던 파란색 자동차와 흰색 양 인형의 간극만큼이나 요원해 보인다.

우리는 이 세상은 파란색과 분홍색 그 두 가지로만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훨씬 더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과 삶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이야기 나누어야 한다. 또한 올바른 성교육이 유아 시기부터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부는 제대로 된 정책과 제도들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삶 속에서 개인이 실천하고 국가 차원에서 정책들이 함께 수행될 때 비로소 차별과 배제가 없이 사회가 요구하는 남자다움과 여자다움 그 어디에도 갇히지 않은 채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긍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는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낙타 님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506 호 [기사입력] 2016년 10월 26일 18:21:24
뒤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