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투, 여덟살 구역] 더 많은 사람들이 여덟 살 구역에 들어왔으면 좋겠다

엠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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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참 빨리 간다. 벌써 11월이다. 얼마 안 있으면 2017년이 오겠지. 그냥 안 왔으면 좋겠네. 그래봤자 오겠지. 지난주에는 수업을 가자마자 연지(가명)가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툭 이렇게 한 마디 했다. “너도 늙었구나.” 장난으로 시비 걸 때의 놀리는 말투가 아니었다. 엄청 무덤덤하게 ‘너는 눈이 두 개구나’ 같은 사실판단을 할 때처럼 그 소리를 해서 더 기분이 이상했다. 연지가 쪼르르 다른 애들 있는 자리로 가고 나서는 쟤가 내 얼굴에서 뭘 봤길래 저런 소리를 한 걸까 궁금했다. 얼굴이 나이 들어보여서? 뭐 그건 당연한거라 오히려 괜찮다. 다만 약간 걸렸던 건 막 도서관에 도착한 내가 연지를 마주쳤을 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너무 기운 없고 피곤한 얼굴이었을까, 생기 없이 지친 눈이었을까, 혹 그런 것들이 늙은 느낌이었던 건 아닐까. 말 던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순식간에 혼자서 의미의 확장을 하고 또 하면서 자기반성 타임이 몰려오려고 하길래 오바하지 말자, 하고 생각을 그만 뒀다. 에휴.

차곡차곡 나이를 먹는다. 나는 이제 애들한테 ‘늙었다!’ 소리를 듣는 때를 맞이했고, 처음 만날 땐 여덟 살이었던 이 애들도 어린이 티를 점점 벗고, 어느덧 청소년기를 향해가고 있다. 다들 덩치가 어찌나 훌쩍 컸는지! 몇 년 동안 계속 4학년들만 보다가 요즘 같은 공간에서 새로 책언니 시작한 2학년을 만났는데 너무너무 작았다. 이에 감탄하면서 4학년들을 놀렸다. “아홉 살이 훨씬 귀여워! 너넨 이제 하나도 안 귀여워!” 그러나 다들 신경도 안 썼다. 다들 귀여워 보이는 것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나보다. 외적인 것만 그런 게 아니라 요즘은 생각하는 거나 말하는 것들도 조금씩 덜 단순(?)해지고 있다. 확실히 많이 컸다. 애들이 점점 더 안 귀여워질수록(농담이다), 점점 더 복잡해질수록, 앞으로 책언니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가 하는 일이 교육인걸까?

처음 책언니 수업을 시작할 때 그런 얘기를 종종 했었다. 애들만 자라는 게 아니라, 책언니들도 자라야한다고. 여덟 살과 책언니들이 서로를 통해 같이 성장하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사실 2013년 무렵만 해도 나와 쩡열은 인문학 교육이라는 영역에 갓 발을 들이기 시작한 초짜들이었다. 학교 갓 들어간 1학년들이 배움 계의 햇병아리들이었다면, 우리는 가르침(?) 계의 햇병아리들이었던 셈이다. 책언니에 다녀간 애들 중에는 우리가 아무리 별명으로 불러달라고 해도 쉽게 말을 놓지도 못 하고 ‘선생님’ 소리를 고집하는 애들도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하는 일이 정말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일까?’하고 어색해했던 기억이 난다.

교육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 있었던 것 같다. 교대 나와서 교사 자격증을 딴 것도 아니고, 체계적으로 공부를 많이 해본 것도 아니고, 해본 거라고는 청소년 때 인권활동했던 거랑 이런저런 알바를 해본 경험 밖에 없는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을까? 뭐 그런 생각들. 잘 가르치는 능력보다 관계와 태도의 문제가 더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으면서도 막상 ‘선생님’소리와 마주할 때면 은근히 속이 부대꼈다. ‘내가 뭐라고’의 자신 없는 마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각하게 된 건 사실 만나는 애들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다는 거다.

진짜 좀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어쩌다보니 누군가의 성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사람이 되었다. 특히나 책언니에서 만난 애들은 여덟 살 때부터 지금까지 4년을 만났다. 원래 가족도 아니고, 친동생도 아니고, 내가 낳은 애들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평생 신경 쓰이는 애들이 한 무더기로 생긴 것이다. 내 안에 개인주의가 너무 뿌리 깊어서 그랬는지, 시간이 이쯤 흐르고 보니 쟤들이 이젠 정말 남 같지가 않다는 게 참 기분이 묘했다. 진짜로 좀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어른들이 맨날 거들먹거리며 하던 말이라 좀 고깝긴 하지만 정말로 세상은 만만치가 않던데, 비교적 자유로운 지금 초등학교에 비해서 앞으로 겪게 될 중고등학교 과정은 더 개떡 같은 데 이걸 어쩌나. 문득문득 서글픈 걱정이 든다. 어떻게 해야 쟤들이 살아가는 게 조금이라도 덜 고달플 수 있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그런 마음이 일이라서가 아니라, 진짜로 애정에 기반 해서 자연스럽게 든다고 해야 하나. 살면서 이런 관계성을 만나봤다는 게 애들한테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참 무거우면서도 고마웠다. 정말로.


사람들 덕분에 자랄 수 있었어

사람을 바꾸는 건, 엄청난 가르침보다는 결국 사람인 건 같다.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람으로 성장해왔는지를 돌아보면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감이 좀 잡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오랫동안 나는 개인주의가 너무 강해서 애들을 만나고,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이 부담스러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개인주의’라 불러왔던 건 사실 각자 살아남기를 바라는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획득하는 삶의 방식 아니었을까. 나도 그럴 테니, 너희들도 각자 살아야 한다는 냉정한 선 긋기의 일종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의 삶까지 감당해야한다는 게 무서워서 끝끝내 거리를 뒀던 건 아닐까.

그동안 나다 일을 하면서 같이 살아가는 감각을 가까스로 배워왔다. 성인이 된다고 곧장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대 내내 주변 사람들이 나와 같이 살기 위해 애써준 덕분에 겨우 할 줄 아는 것들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자기 삶도 여의치 않으면서 내 것까지 감당해주려는 마음들을 만나고 살아왔으니, 여기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책언니에서 만난 애들한테도 그렇게 애써주는 관계가 필요하다. 너 혼자 알아서 살아야한다고만 말하는 지금 같은 사회에서는 더더욱, 책언니가 아니라도 괜찮으니 그 누구라도 말이다. 이제는 교육은 자격을 갖춘 사람들의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공동체에서 같이 나눠야 할 몫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린 사람들은 모든 게 처음이다. 그들이 현재의 사회가 어떤 곳인지, 세상살이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가는 과정은 생존의 영역이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은 다음에 태어난 사람들을 위해 반드시 이것들을 전해줘야 하고, 이는 공동의 사회를 앞으로도 계속 꾸려나가기 위한 필수적인 상호작용일 뿐이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베풀어주는 어버이의 은혜 같은 게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려면 당연히 필요한 거니까. 그 노동의 몫이 앞사람에게서 뒷사람에게로 대물림되면서 전해지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그동안의 시간을 통해 내가 배운 교육은 그랬다. 책언니에서 하는 것도 그렇게 당연한 삶의 몫일뿐이다. 이 사회가 사람들 맘 속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비틀어놓는 바람에 이 당연한 감각으로 긴 시간을 지나 겨우 돌아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 자라는 것과 늙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 같다. 나이가 몇 살이든 마음이 쭈글쭈글 힘없이 늙을 수도 있다. 내 마음도 그랬다. 천천히 늙어 가고 있었다. 이런다고 세상이 바뀔까, 지금 이대로 돌아가는 관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한 무기력. 세상이 자꾸만 내 에너지를 뺏어갈 때, 책언니 애들이랑 같이 한강 소풍 같을 때 느꼈던 이상한 감동, ‘너희와 보낸 시간이 충분히 좋았다’고 해줬던 말들, 그런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나를 지켜줬다. 끙차끙차 다시 일어날 힘을 줬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여덟 살 구역에서 이렇게 소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떻게든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하는 노력들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줄 테니까.


덧붙이는 글
엠건 님은 교육공동체 나다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510 호 [기사입력] 2016년 11월 24일 1: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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