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아의 인권이야기] ‘인권영화제’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가지 것들

김정아
print
이번 주 금요일(18일)이면 인권영화제 11번째 막이 오른다. 인권영화제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힘이 된다. “제일 재미있는 영화는 뭐냐?”는 누구나 궁금해 하는 질문에서부터 돈은 부족하지 않은지, 어떤 사람들이 준비하는지, 상영작은 어떻게 결정하는지 등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찬찬히 그 질문에 답하다 보면, 인권영화제는 정말 ‘다른’ 영화제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생각하게 된다. 도대체 뭐가 다른 걸까?

우선 작품을 선정할 때의 고민이다. 어떤 영화가 ‘인권’영화인가 기준은 사실 형식화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근육질 남성의 상징으로 알려진 한 배우가 자신이 연기한 <변강쇠>를 인권영화라고 말한 것처럼 인권영화는 다양한 코드 속에서 해석되고 있다. 물론 해석자의 인권의식 정도에 따라 엉뚱하게 인권세례를 받기도 하지만 말이다. 인권에 대한 ‘감동’과 ‘자각’ 그리고 실천을 위한 ‘공유’와 ‘연대’를 이어주는 좋은 인권영화를 가려내는 과정에서 가장 고민을 던져주는 것은 인권이라는 ‘옷’은 입었지만 감동이나 자각 또는 실천과 연대를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영화이다. 즉, ‘소재’는 분명 인권을 다루고 있지만 보는 이들에게 건네는 인권의 메시지가 없는 영화를 말한다. 인권영화는 한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더라도 차별과 빈곤 그리고 억압에 놓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보편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부족할 때 감동보다는 공허함을, 연대보다는 동정심을 자극하기 일쑤다. 또하나 경계해야 할 영화는 영화 속 차별이다. 차별과 군림의 질서는 거대 권력만의 것은 아니다. 한 인권활동가는 “사장에게 착취당하는 남성 노동자가 집에 가서 부인을 때리고 부인은 그 스트레스를 아이들에게 풀고 엄마에게 혼난 아이가 화가 나서 개를 발로 차자 개가 꽃을 물어 뜯는다”는 말로 거대 권력으로부터 시작해 미시영역에 이르는 차별과 군림의 질서를 설명한다. 만든 이들이 이러한 문제의식의 끈을 놓쳐 버릴 때 영화 속의 차별은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다.

인권영화제는 교육하지 않는 인권교육의 장이다. 공익광고는 ‘마마 호환 보다 불법 비디오’가 더 무서운 전염병이라고 주입시켜왔다. 끔찍한 범죄가 일어날 때면 마치 폭력적인 영화가 배후세력인 양 사회적 지탄을 받곤 했다. 이는 영화를 지나치게 부정적 영향으로 상징화하는 것이자 사회 구조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은폐시키는 효과까지도 낳는다. 폭력의 동기는 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억울한 누명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을 확인하고 연대의 대열에 뛰어들게 하는 매개 고리 역할은 한 편의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아름다운 힘이다. 인생사를 두루 비춰주는 스크린에서 관객들은 인간이 직면해 있는 존엄/비존엄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수고로움이 덜 하지만 때로는 더 강렬한 감동을 전달하기도 한다. 영화는 보고 들을 수 없는 사람들,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과도 그 영화를 통해 평등한 공감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영화를 통해 인권의 감수성과 현장성을 관객과 공유하고, 소통과 연대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는 장이 인권영화제이다.

누가 인권영화제를 만드는가 라는 질문은 어떤 사람들이 영화제를 찾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과 동일한 대답을 기대할 수 있다. 인권영화제가 처음 시작된 1996년은 한국 사회에 영화에 대한 열풍이 몰아닥친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감독의 꿈을 꾸고 있던 당시 인권영화제에도 영화에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보기 힘든 다큐멘터리를 찾아 영화 매니아들은 인권영화제의 문턱을 넘는다. 그러나 해를 더해갈수록 관객층의 다수는 그들이 아니다. 상영작마다 모여드는 사람들은 다르지만 그들을 이어주고 있는 공통점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인권의 현장에 대한 관심이다. 구체적인 인권 현장이 아직은 멀고 낯선 사람들에게 인권영화는 좋은 길동무가 되어 줄 수 있다. 인권영화라는 길동무를 사귄 사람들은 때로는 인권단체에 뿌리를 내려 튼실한 활동가로 성장하기도 한다. 인권영화제의 관객에서 영화제를 준비하는 자원활동가로, 그리고 인권활동가로 변신을 거듭하는 모습은 지난 10여년 동안 지속된 즐거운 반복이었다.

갈수록 인권영화제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다. 보도할 영화제는 넘쳐나고 있고 언론이 기대하는 ‘화려함’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엔 특별한 이벤트가 뭐냐’, ‘보도할만한 감독이나 배우가 영화제에 오느냐’라는 기자들의 질문을 종종 받는다. 인권영화제는 기자들에게 지루하고 별 것 없는 영화제라고 낙인 찍히기도 하겠지만, 인권영화제를 찾는 관객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권영화제는 그동안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집행위원장이 구속되는 등 힘겨운 일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가장 큰 힘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관객들의 발길이었다. 국가로부터의 직접적인 탄압, 돈이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구조적인 어려움 등에 맞서 꿋꿋이 영화제를 이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 바로 상영장을 발 디딜 틈 없이 채워주는 관객들이었다. 어느 영화감독은 어떤 감독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감독”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언론은 종종 어떤 영화제로 만들어 갈 계획이냐고 묻는다. 같은 대답이다. “내년에도 이어갈 수 있는 영화제”가 인권영화제의 계획이다. 관객들이 지난 10여년 동안 보여준 연대의 힘으로 곧 제11회 인권영화제의 문을 연다. 더 많은 관객들의 지지와 동참이 인권영화제를 지속시키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11회 인권영화제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면, http://sarangbang.or.kr/hrfilm 로 가서 확인해보세요.
인권오름 제 54 호 [기사입력] 2007년 05월 16일 10:09:52
뒤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