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험해도 죽으라는 법은 없다?

[기획] 죽음을 기억하라 (3) 수급권자

유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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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주] 모든 죽음은 산 자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기지만 어떤 죽음은 산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 이런 죽음은 죽은 자가 의도했든 아니든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남긴다. 생물학적 죽음을 수반하지는 않더라도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사실상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사회적 죽음도 있다. 죽음마다 다양한 사연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죽음을 부르는 한국사회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런 죽음이 계속되리라는 점이다. <인권오름>은 노무현 정권 시기인 2003년부터 최근까지의 죽음 가운데 점점 잊히고 있지만 산 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죽음을 기록함으로써 한국사회 인권의 현실을 점검한다.


2003년 7월 인천에서 30대 여성이 세 자녀와 함께 동반자살한 사건은 모든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남편은 사업실패이후 집을 나갔고, 카드빚 독촉에 갓 태어난 셋째아이를 돌보느라 일을 할 수도 없었던 그녀는 14층 아파트에서 두 딸을 떨어뜨리고 자신은 셋째아이를 안고 뛰어내렸다. 자녀의 병원비 3000원을 낼 수 없었던 이 가정은 유일한 사회안전망인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될 수 없었다. 중고자동차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낙타 바늘귀 통과하기가 수급자 되기보다 쉽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성장과는 무관하게 서민들의 생활은 바닥으로 질주하고 있다. 실직으로, 가계부채로, 질병으로, 부도로, 주거의 상실로 혹은 그 모두로 인해 스스로 생활을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그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지원’을 찾게 된다. '생산적 복지'니 '참여복지'니 복지가 확대되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기 때문이다. '국민이면 누구나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고 법에 명시되어 있다고 하니 내 상황정도면 그런 복지는 당연히 가까이에 있어야 할 것이니까. 그러나 현실은 별로 그렇지 않다.

유일한 사회안전망인 기초법의 수급자가 되려면, 먼저 최저생계비 기준에 맞아야 한다. 2007년 기준 최저생계비는 1인가구 43만원. 4인가구 120만원이다. 문제는 소득이 최저생계비 미만이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재산을 소득으로 환산한 금액과 합했을 때의 금액이 최저생계비 미만이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5천만원 전세를 살면 소득이 하나도 없어도 48만원의 소득이 있는 것으로 환산되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경우 100만원짜리 자동차가 있다면 월 소득이 100만원으로 환산된다.

둘째, 부양의무자 기준에 충족해야 한다. 부모나 성인이 된 자녀가 있다면 일단 포기하는 게 상책이다. 자살이나 질병으로 사망하는 대다수의 빈곤노인은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수급자가 되지 못한다. 자녀가 부모를 실제로 부양하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극단적인 상황에 방치되어 있다가 개에게 물려 사망한 아이도 돌보는 이가 있다는 이유로 수급자가 되지 못했다.

셋째, 노동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조건이 붙는다. 법적으로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은 18세 미만, 65세 이상이거나 2급 이상의 중증장애인이거나, 6개월 이상의 진단서를 받을 수 있는 중증만성질환자여야 한다. 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노동능력 ‘있음’이다. 노동능력이 있으면 일단 소득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여 소득을 추가시킨다. 그리고 자활사업 등 일을 하지 않으면 수급자에서 그 개인은 제외된다.

성경에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보다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공감이 간다. 부자는 웬만해서는 죽기도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이쯤 되고 보면 기초법 수급자 되는 것이 낙타 바늘귀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더욱 공감 가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죽으라는 법은 없다?

2005년 2월, 1급 중증장애인인 주 씨는 강서구청 현관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주 씨는 수급자로 한 달 생계비 67만원과 9만원의 장애수당으로 고등학생인 딸과 살고 있었다. 주 씨는 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몇 차례 구청을 찾아가 면담을 요청하고 항의했으나 결국 선택한 것은 죽음이었다.

수급자가 되더라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주 씨의 경우는 받을 수 있는 생계비를 모두 받는 경우였지만 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그러나 대다수의 수급자는 생계비조차도 이러저러한 기준으로 차감된다. 평균 생계급여가 30만원 수준인 것이다.

열악한 주거공간의 월세와 공과금, 식비와 교통통신비, 대다수 빈곤층에게 큰 부담이 되는 의료비, 생활용품비 등을 고려했을 때 비상식적으로 낮은 최저생계비와 그에도 훨씬 못 미치는 생계급여는 수급자들에게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는다.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요구하며 투쟁하다 결국 세상을 등진 최옥란 열사는 “살아도 살아있는게 아니고”라는 이야기를 했다. 어렵게 수급자가 되더라도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죽음’을 맞고 있는 것이 수급자의 현실이다.

유일한 사회안전망이라는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제정된 지 8년이 지났다. 그동안 자살은 급격히 늘어 5분에 1명씩 자살을 시도하고 45분에 1명씩 자살하는 사회가 되었다. 자살 증가의 이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생활고라고 한다. 그리고 자살보다 더 많은 이들이 빈곤으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 그러나 기초법은 별로 바뀐 것이 없다. 2003년 138만명이던 수급자가 150만명 수준으로 증가했으나 여전히 700만에서 1000만에 이르는 빈곤층의 1/4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죽음의 구조를 기억하자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빈곤한 이들에게는 난방은 고사하고 전기담요 켜는 것도 부담스러운 고통의 시간들일 것이다. 날이 추워지면 빈곤층에 대한 언론과 사회의 관심도 급작스럽게 증가한다. 그러나 빈곤층의 ‘살아있는 죽음’의 모습은 모금함에 얼마간의 돈을 넣거나 전화기로 ARS를 누르는 이들의 훈훈한 인심과 받는 이의 사회적 낙인으로 교차된다.

빈곤층의 죽음에 대해 언론이 관심을 갖는 경우는 인천 사건의 예처럼 극단적인 경우에만 해당된다. 대구 아이 아사사건이나, 단전으로 인한 화재사망사건, 장애인의 동사사건 등이 그것이다. 극단적인 빈곤의 상황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살아있는 이들에게 더욱 강도 높은 빈곤을 요구하곤 한다. 아니면 장애인 주 씨의 죽음처럼 죽음으로라도 빈곤에 항의하라고 말한다. 이는 더 많은 죽음과 ‘살아있는 죽음’에 대한 외면으로 이어지고 있음에도 누구도 죽음의 구조에 대해서는 기억하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세상 험해도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말이 있다. 기초법은 유일한 사회안전망이라는 차원에서 사람을 살리는 법일 것이다. 그러나 기초법의 엄격한 기준과 낮은 보장은 죽으라는 법으로 그 의미가 바뀌고 있는지도 모른다. 드러나지 않는 죽음과 ‘살아있는 죽음’의 행렬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기초법 개선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생활권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을 살리는’ 구조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유의선 님은 빈곤해결을위한사회연대(준) 사무국장입니다.
인권오름 제 82 호 [기사입력] 2007년 12월 05일 9:5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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