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의 인권이야기] 소유권의 무한 복제

금융과 인권

홍기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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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칼럼에서 우리는 소유권이 단순한 소유자의 ‘권리’라는 수동적 의미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권리를 제약할 수 있는 하나의 ‘권력’이라는 것을 살펴 보았다. 이러한 소유권의 성격은 “금융”이라는 틀로 들어가면 또 한번의 변화를 겪게 된다. 금융은 소유권의 가장 추상적인 형태요 또 그렇기 때문에 그것으로 표현되는 권력은 일체의 사회적 관계의 구체성을 무시하고 채무자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법적인 제한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사여탈권으로까지 작동할 수 있다.

화폐에 대한 ‘우화’를 넘어선 금융

주류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화폐를 단순히 “상품끼리의 교환을 위한 매개 수단”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금융은 그러한 화폐를 매개로 한 교환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자금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옮겨다 주는, 즉 ‘융통’해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동일한 가치를 가진 상품끼리 직접 교환되는 평등하고도 호혜로운 과정이다. 이것이 화폐나 금융의 제도를 끼고서 현실에 나타나는 것은 단지 편의를 위한 것 뿐이며 그러한 상품끼리의 교환이라는 시장의 본질을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화폐와 금융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이르는 고전파 경제학의 발생기에 마련된 것이다. 그래서 그 기본틀이 19세기 고전파 경제학에 크게 힘입어 결정된 마르크스 경제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화폐와 금융에 대한 관점은 이후의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의 연구에 따라 현실과는 동떨어진 하나의 ‘우화’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진 바 있다. 특히 근대 자본주의의 화폐는 단순한 교환의 매개 수단(노름판의 '칩'과 같은)이 아니라 조세를 징수하는 국가의 권력 혹은 신용을 절대시하는 상인 네트워크에서의 평판을 배경으로 하여 발행된 일종의 청구권(claim) 문서에 가깝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금융은 단순히 화폐의 흐름을 이리저리 옮기는 편의적인 과정이 아니라 화폐보다도 더욱 추상적인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권력을 창출하는 과정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도 지적되었다.

“소유권의 무한 복제”

보통의 소유권은 소유자가 정확하게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의 구체적인 대상이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화폐는 그렇지 않다. 짐멜(Georg Simmel)이 언젠가 “화폐는 사회 전체에게 청구권이 되돌아가는 일종의 환어음이다”라고 말한 바 있듯이, 그 액면에 표시된 수량만큼의 사회적 생산물 일반에 대한 청구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화폐의 소유자는 그가 정확히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가 완전히 추상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 것은 그 액수만큼 소유할 수 있는 권력을 갖는 것이다. 일종의 백지 소유권 위임장인 셈이다.

이렇게 “소유물의 내용이 비어 있는” 추상적 권력인 화폐는 금융의 단계로 들어가면 또 한 번의 변화를 겪는다. 필자의 표현이지만, 금융 과정이란 기본적으로 “소유권의 무한 복제” 과정을 포함한다. A가 B에게 1천만 원의 돈을 꾸었다고 하자. 그 1천만 원을 소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두 사람 모두이다. A는 만 원짜리 1천장을 손에 쥐고 있다. 하지만 B는 1천만 원의 차용 증서를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제도적 뒷받침과 금융 기법을 활용하면 B는 지금이라도 그 1천만 원의 차용 증서를 적당한 비율로 할인하여 당장 팔아서 만 원짜리 9백 몇십 장을 손에 쥘 수도 있다. 나아가 돈을 꾼 A가 다시 Z에게 그 돈을 꾸어주었다고 해보자. Z는 Y에게, Y는 X에게 하는 식으로 되었다고 해보자. 이 1천만 원의 돈을 소유한 사람은 모두 몇 사람인가.

근대 은행 제도의 기적

이러한 예화는 결코 근대 금융 체제에서 주변적인 측면이 아니다. 근대 화폐 제도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17세기 말 영국의 영란 은행(The Bank of England)의 출현 과정을 보라. 화급하게 전쟁 자금을 조달해야 할 영국 정부는 거액의 공채를 발행하여 영란 은행에게 맡기고 돈을 타간다. 그런데 영란 은행은 그 정부의 공채를 자산으로 삼아 또 은행권 지폐를 발행한다. 결국 영란 은행은 정부에게서 원리금 상환의 약속도 받아낸 셈이지만 그것을 자산으로 하여 지폐를 발행하는 이익도 누리고 있다.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언젠가 정부가 그 공채의 원리금을 상환할 것은 확실하니, 그 받을 돈을 지금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셈이다. 따라서 그만큼의 돈을 지금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그 돈을 남에게 조금 꾸어주는 것 - 은행권의 발행 - 도 하자가 없다. 물론 사실상 그 돈이 지금 바로 ‘금화’와 같은 현물 형태로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니니, 그 돈이 들어올 날을 기약하는 일종의 약속 어음 즉 지폐의 형태로 발행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 지폐를 꾸어간 이들이 그 약속을 철석같이 믿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영란 은행의 약속 어음인 지폐를 또 자산으로 삼아 새롭게 은행업을 펼치기도 한다. 정부도 돈을 벌었다. 영란 은행은 이중으로 돈을 벌었다. 활발하게 발행되는 영란 은행권 덕에 많은 이들이 대출을 얻어 또 돈을 벌었다. 갤브레이스도 말하고 있지만, 이것이 바로 근대 은행 제도의 “기적”이다.

한 채의 집에 놓인 수많은 숟가락

최근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건도 바로 이러한 “소유권의 무한 복제”라는 현대 금융 제도의 본질적 성격과 직결되어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란 신용 상태가 좋지 않아 주택 대출을 받기 힘든 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높은 이자율로 돈을 대여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부 대출에 따르는 높은 리스크를 떠넘기는 자산 유동화(securitization)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수많은 금융 기관들이 최초의 담보가 되는 한 채의 집에 대한 소유권을 모두 가지게 된다. 단 한 채의 집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 수많은 이들이 동시에 숟가락을 놓고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알쏭달쏭한 ‘소유권의 복제’라는 메카니즘은 그 복제의 연쇄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이들이 약속을 철저히 지킨다는 소위 ‘신용’이라는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누구라도 그 연쇄의 쇠사슬에 칭칭 묶여 있는 주제에 감히 그것을 어기려 들 경우에는 무서운 보복이 뒤따르게 된다. 그 이름은 ‘무한 책임’이다. ‘유한 책임’이라는 일종의 특권이 법적으로 만들어지기 이전 전근대적 금융 관계에서 채무자가 결국 최종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채무를 청산해야 했던 것은 동서양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관행이다. 가슴살 1파운드를 요구했던 샤일록의 요구도 사실 그 당시 금융 세계에서 그다지 무리한 것만이라고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신용? 무한책임 “신체포기각서”

금융적 관계에서의 채무는 결국 얼마 얼마를 지불하라는 화폐적 요구로 귀결된다. 화폐는 구체적 소유물이 아닌, 무정형의 소유물에 대한 무조건적인 ‘청구권’이다. 따라서 채무자가 끝까지 돈이 없다고 할 때에는 채무자에 대한 무제한의 권력으로 바뀌게 된다. 그 가장 원시적이고도 적나라한 모습이 아마도 ‘신체포기각서’일 것이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육체 심지어 내장 기관에 대해서까지 맘껏 사용할 권리 - 이것도 권리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 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채무자 혹은 신용불량자로 전락했을 경우 처하게 되는 각종의 기본적 인간의 권리의 제한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오게 된다. 물론 ‘신체포기각서’ 따위는 ‘불법’이다. 즉 금융과 화폐로 표현되는 사회적 권력의 한계에 일정한 제한을 두지 않는다면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사회적 복리가 어디까지 파괴될지 모른다는 위험을 사회 체제 스스로가 의식하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홍기빈 님은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인권오름 제 91 호 [기사입력] 2008년 02월 20일 13:2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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