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 밖으로, 세상을 향해] “나의 자유, 나의 삶이 찾아온다.”

경계에서 한 발 더 내딛는 오늘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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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도 안 먹히는 이야기, “엄마, 나 시설에 가기 싫어요.”

9살 때부터 시설에서 생활했으니 20년이 넘었네요.

처음엔 다른 시설에 있었어요. 기숙사도 있고, 학교도 있었는데, 병동에 들어가서 생활해야 했지요, 당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워서 신문지 깔고 똥 싸고 그랬으니까.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7년 정도 있다가 초등학교만 겨우 마친 상태에서 나와야 했어요. 시설에서는 나이가 다 찼으니 나가라고 하더군요.

위 사진:3월 25일 서울시청 앞에서 농성을 시작한 현수 씨.
잠깐 집에 와있었지만, 부모님은 또 시설을 알아보시더군요. 엄마에게 “시설에 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는데, 씨도 안 먹히더라고요. “너 시설에 안가면 어디서 먹고 살거니?” 그 한마디에 말문이 막히더군요. 부모님은 어부였고, 집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아래 동생들이 있으니 집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거든요. 그래도 시설에는 가고 싶지 않아서 가출을 했어요. 길거리에서 자고, 노숙하는 아저씨들에게 밥도 얻어먹었지요. 그럭저럭 버틸 만은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수동휠체어의 바퀴에 있는 쇠가 닳아서 손이 다 찢어졌어요. 피는 나고, 집에 가면 시설에 보내질 것 같고……. 하지만 결국 사춘기 반항은 여기서 끝났어요. 돌파구가 없었으니까. 그 때 들어온 곳이 지금의 석암 시설이지요.

부모님은 별로 가진 게 없었지만, 나를 이 시설에 보내려고 입소금을 무려 2천만 원이나 내야 했어요. 처음에는 4천만 원을 불렀다고 하데요. 집에서는 “많은 돈을 냈으니 얌전히 살아라.”라고 말했고요. 처음 몇 달은 기억도 잘 나지 않아요. 뭘 먹고 살았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뭘 했는지……. 너무 지치고 할 일이 없어서 그랬겠죠? 대부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마음을 나눌 사람도 없어서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어요. 그래도 어찌어찌 아무생각 없이 살다보니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긴 하더라고요.

나를 고치려 들지 말고, 사회를 고쳐야 되는 거 아닙니까?

8년 전 쯤, 처음 그룹홈이라는 걸 들었고, 자립생활이라는 것도 알게 됐어요. 어머니는 얌전히 살라고 했지만 부모님도 동생들도 각자의 인생이 있듯 나의 인생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나도 남들처럼 돈 벌어서 연애도 자유롭게 하고,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싶었어요.

일산에 있는 직업학교에 지원했는데, 고등학교 졸업 이상만 입학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난 초등학교 밖에 안 나왔잖아요. 사정사정 했지요. 초등학교밖에 못나왔지만, 여기서 하는 일은 잘 할 수 있으니 지켜봐 달라고요. 다음날 땜질하는 테스트를 하고, 필기시험 보는데 중학교 이상이 풀 수 있는 문제가 나오더군요. 나는 초등학교밖에 못 나와서 이런 문제 못 푼다고 했더니, “누가 중학교 안 다니라고 했냐?” 그러는 거예요. 내가 다니고 싶지 않아서 안 다닌 것도 아닌데, 배우지 못한 게 죄도 아닌데. 못 배웠으니까 배우고 싶어서, 남들처럼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싶어서 그래서 간 거였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그렇게 원망을 했어요. 엄마도 울고 나도 울고…….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봐요. 사람들 중 반이 장애인이었다면 휠체어를 타고 다녀도 요상하게 쳐다보지 않을 거라고. 혹 모두가 장애인이고 몇몇만 비장애인이었다면 오히려 비장애인이 창피를 당했겠지요?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회는 장애인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 사회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배우지도, 일하지도, 연애를 하지도, 평범하게 살지도 못하고 시설에 사는 거예요. 나를 고쳐야 하나요? 사회를 고쳐야 하나요?

나는 결국 엄마에게 부탁해서 석암 시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먼 길 앞에서도 기분 좋은 이유

열심히 싸워서 시설장도 바꾸고 이사장도 바꿨어요. 하지만 시설의 규칙은 여전해요. 매일같이 반복되고, 하는 것도 없으면서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도 없지요. 이른 저녁이면 잠에 들고, 이른 아침 눈을 뜨면서 먼저 생각하는 건 “어떻게 시간을 재미있게 때우나?”예요. 참 재미없죠?

시설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자유롭게 사는 게 백배 천배 나을 거라 생각해요. 늦게 들어가면 혼날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버스를 놓칠까 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시간을 내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 우리는 경계에 있어요. 시설생활인과 ‘평범한 삶’ 그 사이예요. 힘들지만, 이 싸움은 나를 자유롭게 할 것 같아요. 시설을 넘어 지역사회로. 가야할 길의 끝이 멀게 보이지만 ‘나의 자유, 나의 삶이 찾아온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좋아져요. 신이 나지 않나요?

서른이 넘은 이 나이지만 아직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게 있어요. 평범하게, 자유롭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게 될 그 날, 진탕지게 술 퍼먹고 집에 늦게 들어갈 거예요. 같이 술 먹어요. 그리고 우리의 자유를 위해 “건배~”

안녕하세요?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살고 있고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현수입니다. 저는, 1991년 8월경에 지금의 시설에 들어왔고, 그전에는 S재활원 뇌성마비병동에서 13년을 살았습니다.

석암재단에 비리가 있다는 건, 시설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당시는 증거자료도 없고, 증인이 될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작년, 서울시의 특별 감사를 앞두고 시설측은 또다시 비리를 감추려 했고, 우리는 우리의 두 눈으로 똑똑히‘이중장부’의 실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시설에 살고 있는 우리는 분노했고, 하나 둘, 투쟁에 함께할 사람도, 증언을 해줄 사람들도 모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과 연대를 알면서 힘을 얻을 수 있었지요. 드디어 2007년 12월 27일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3월 25일 우리는 지금까지보다 더 힘든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서울시 관할인 석암재단과 성람재단의 법인취소, 나아가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복지법인의 인권침해에 대한 처벌을 외치기 위해 시청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탈시설의 권리를 얻어낼 것입니다. 멀고도 긴 길에 더 큰 힘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언제든 놀러오세요, 시청 앞으로. ^^

인권오름 제 96 호 [기사입력] 2008년 03월 26일 2:3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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