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의 인권이야기] ‘레즈비언 국회의원’이 재미있는 이유

옷장 밖으로, 유령이 돌출했다

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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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는 성소수자’는 어디 있냐고?

성소수자 단체에서 활동을 하면서 가장 난감할 때 중 하나가, “성소수자라서 차별받는 구체적인 사례들이 있나요? 피해 당사자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라는 요구를 받을 때입니다. 대부분 성소수자에 대한 기획 기사를 쓰고 싶다는 언론사들로부터 받는 요구인데 성소수자가 명백히 피해자가 된 사례들을 원하곤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성소수자임이 밝혀져 ‘당신은 성소수자라서 우리와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라는 직접적인 해고 사유를 듣게 된 사례라던가,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님들에게 게이인 것이 들통 나서 강제 결혼을 하게 되거나, 가족들과 절연하게 되었다던가 하는 사례들이 그것입니다. 어떨 때에는 자신들이 원하는 사례를 만들어서 상세한 주문을 하기도 하지요. 그럴 때에는 보통 난감한 게 아닙니다. 그런 차별 사례를 구하기도 힘들 뿐 아니라, 설령 있다 하더라도 피해 당사자를 인터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위 사진:지난 4월 6일 열린 <성소수자 인권과 다양성 보장을 위한 반차별 선언> (출처: http://lgbtact.org)

성소수자이기에 자신의 차별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차별이 명백하게 드러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성소수자가 경험하는 가장 큰 차별의 지점이기에, 기자들의 그런 요구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성소수자라서 차별 당하고 있다’라는 말이 성립되기 위해 꼭 필요한 ‘성소수자 누구, 바로 당신?’이라는 질문에 우리 누구도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피해자의 정치’ 이외의 통로로는 소수자가 자신을 가시화할 수 없는 한국사회현실에서, 결국 그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차별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곤 합니다. 이런 이야기의 끝은 이렇습니다. ‘네가 누굴 사랑하던 그건 너의 개인적인 일일 뿐이야’라고요. 이렇게, 주인이 없는 말들은, 유령 같은 그 말들의 주인들은 구석진 옷장 안으로 다시 내몰리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게토 속으로 말이죠.

성소수자 ‘차별’은 이미 당신 곁에 있다

그런데 정말 ‘동성애’ 같은 건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일까 고민해 봅니다. 언제던가 게이,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바이섹슈얼과 같은 성소수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건 저랑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건 그 사람들의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니까요. 제가 그 사람의 취향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라고 말입니다. 개인 사생활에 참견마라는 방패는 가끔 성소수자들이 자신을 보호하고 싶을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내 아랫도리에서 일어나는 일에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야’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렇지만 ‘성적 지향’이나 ‘젠더 정체성’(자신을 남성 혹은 여성으로 정체화 하는 것)은 이미 너무나 공적인 것이 되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성애가 당연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렇지 한국 사회의 사회복지 체계와 교육, 나아가 정치 영역에서도 이성애 구도, 성별 이분법은 강고한 전제가 되고 있으니까요.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남자와 여자로 확연히 나누어지도록 강요받고 그에 맞는 옷과 태도 등을 배우게 됩니다. 결혼제도는 말할 것도 없지요. 일정 나이 이상의 남성과 여성이 일대일 결합을 하게 되고 그걸 등록하게 되면, 지역과 국가 차원에서 이 사적인 결합에 대한 제도적인 지원을 합니다. 건강보험 등의 사회복지 체계는 이성애 결혼을 기본으로 짜여 있지요. 정치 영역에서는 ‘이성애 가족’이 정책 수립의 가장 중요한 단위가 됩니다. 선거 때에는 ‘(이성애 엄마아빠아이) 가족의 가치’를 수호하는 게 자신의 중요한 정책이라고 선전하는 후보도 있습니다.

위 사진: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준)은 레즈비언 국회의원 후보와 함께하는 선거운동뿐만 아니라 <우리 동네 레인보우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선거 공간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출처 : http://lgbtact.org)

전혀 어울리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렇듯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친밀한 관계를 이루며 어떤 생활공동체를 만드는가는 이미 개인적인 것이 아닌 상황입니다. 오히려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공공의 화두인 것이죠. 다만 이성애 혼만이 언제나 확고한 공공영역의 주인으로 이야기 됩니다. 나머지 ‘아랫도리’의 이야기들, 다른 사랑과 관계들은 공공영역의 화두가 될라치면 개인적인 취향으로 내몰렸다가, 언제나 필요에 따라 공공으로 끄집어내어지죠. 낙인과 편견을 달고서 차별을 이야기하고 싶을 때, 그럴 때만이 공공의 도마에 올라가 사회적 윤리와 질서, 혹은 신의 섭리 등의 이름으로 난도질당합니다. 성소수자에게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은 모두 없습니다. 아무리 게토 안으로 숨더라고 안전할 수 없고 주체가 아무리 소리쳐도 유령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죠.

그리고 또 그래서 레즈비언 국회의원이 재미있는 겁니다. 전혀 어울리지 말아야 할 두 가지, 공공 정치의 대표자 국회의원과 개인의 취향으로 꼭꼭 숨겨두어야 할 레즈비언이라는 성정체성이 조합되어 있는 말이니까요. ‘레즈비언 국회의원이 그래서 뭐?’라고 말하다가도 돌아서면, 석연찮은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건 레즈비언 국회의원 개인에 대한 혐오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명명이 가져오는 한국 사회 이성애 중심주의의 폭로, 공공영역과 사적 영역의 위계를 혼란스럽게 하고 뒤흔드는 ‘정치’가 있기 때문이죠. 주인 없는 말들과 존재가 실체를 얻고 유령이었던 시민이 우리의 면전에, 그것도 외면할 수 없는 공공의 영역 한 가운데로 불쑥 돌출한 것이죠.

레즈비언 국회의원, 한 번 더 외쳐봅니다

이제 질문의 주체가 바뀌고, 공공/사적 영역의 구분의 칼자루가 바뀌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사적이고 무엇이 공적인 것이죠? 언제부터 특정한 친밀함과 관계가 당연한 것이고 인정받는 유일한 것이 되었나요? 차이를 차별로 이야기하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레즈비언 국회의원은 우리가 이전에 생각하기 어려웠던 많은 질문들을 던집니다. 생각해보면 볼수록 이렇듯 재미있는 질문들을 쏟아내는 레즈비언과 국회의원의 조합은, 그 자체로 분명한 변화를 사회에 요청하는 하나의 구호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런 게 바로 선택을 넘어선 뜨거운 소통, 진보적 정치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는 시작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레즈비언 국회의원, 그 구호를 한 번 더 외쳐 봅니다.
덧붙이는 글
수수 님은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98 호 [기사입력] 2008년 04월 08일 15:4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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