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눈으로 교과서를 보다

[교과서를 던져라 ⓞ]교과서의 존재 의미에 대한 단상들

날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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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교과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나. ‘전쟁없는 세상’은 평화의 눈으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교과서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가랑비처럼 사람들 가슴 속에 평화가 스며드는 운동을 지향”하는 ‘전쟁없는 세상’은 세움터의 [교과서를 던져라] 꼭지를 통해, 교과서 분석의 결과를 독자들과 나눈다.


교과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

“학교에서 교육 과정에 따라 주된 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편찬한 책” 국어사전의 정의에서도 볼 수 있듯 교과서는 근본적으로 학교라는 교육제도와 분리될 수 없다.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면서 학교 교육이 시작됐을 때, 교과서는 표준화된 교육과정을 담아내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물론 국가기관인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직접 집필하느냐 아니면 외주를 준 다음 검인정을 하느냐에 따라 구분될 수 있지만 큰 틀에서 국가가 구획해놓은 (공)교육과정을 벗어나지 않는다. 교과서에는 곧 그 국가의 철학이 담겨있다. 즉 국가에서 국민들이 배워야만 할 것들을 교과와 학년 별로 분화시켜 놓은 구체적인 산물이 바로 교과서다.

위 사진:교육은 '학교를 다니고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것'으로만 여겨진다.

현재의 뭇 사람들은 ‘교육=학교교육’이라는 도식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학교가 존재하기 이전에 살던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것일까?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시대 서당의 모습이나 중세 서양의 수도원의 모습을 떠올려본다면 예전의 사람들이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시대와 환경에 따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육의 의미는 달라져온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학교와 교과서는 근대 이후에야 보편성을 획득한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각 시대에서 규정되는 교육의 의미와 이상적 인간상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운영원리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교과서로 학습을 마친 사람들이 “지금 마시는 물이 어디에서 오는지조차도 잊고” “강바닥을 파 헤집고 거기에다 거대한 화물선을 띄우겠다는 생각”을 어렵지 않게 한다는 이계삼의 지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근대 교육이 지향하는 인간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도대체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해 무엇을 배운 것일까?

『자본론』을 읽을 때도 이어지는 독해법

입시교육의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다수의 청소년들에게 교과서에 나온 지식들은 하나의 진리다. 도시에 사는 학생들과 농촌에 사는 학생들의 삶의 맥락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들이 공교육의 틀 안으로 포섭되는 순간 모두 똑같은 교과서를 외우며 똑같은 내용을 학습하게 된다. 학생들의 삶과 활자화된 교과서 사이의 간극은 정답과 오답을 가리는 객관식 대입 시험의 과정을 거치며 한 번 더 비틀어지고 왜곡된다.

모두에게 보편타당한 진리가 존재하느냐에 대한 답을 일단 유보하더라도,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받아들일 때에는 비판적 사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백번 양보해 국가가 표준교육과정을 이미 정해놓은 것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교과서에 서술된 내용들이 하나의 ‘정답’이 되어 다른 무수한 ‘오답’들을 배제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정당화되기 힘들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현실에서는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능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소위 명문 대학을 가기 위해 이미 정해진 ‘정답’에 의심을 품지 말고 일단 외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모순되게도 대학생 운동에서 이렇게 길들여진 책읽기 방식이 이어진다는 점을 조한혜정은 안타깝게 바라본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경전의 자리를 차지하던 교과서 대신 맑스의 『자본론』을 들어앉힐 뿐이다.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독해법은 『자본론』을 읽어나갈 때도 그대로 적용되어 이른바 교조주의적 운동으로 이어진다. 삶의 다양한 층위에 걸쳐있는 억압들 위로 가장 큰 억압을 설정하여 그것에 저항하는 ‘진짜’ 투쟁(예컨대 반미와 민족해방)과 그 밖의 ‘덜 중요한’ 투쟁을 위계화하고 구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공교육이 성공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사례가 아닐까.

삶과 분리된 지식을 전하는 근대교육

자신이 생산자이자 소비자이며, 한정된 커뮤니티 안에서 완결적·자급자족적 속성을 갖는 농경사회에서는 삶과 교육이 따로 구분되지 않았다. 땅에서 직접 생산하고 소비하면서 자연과 교감하는 것 자체가 훌륭한 학습이요 자기 자신을 풍요롭게 가꾸는 것이었다. 자연 안에 속한 존재로서 자연의 섭리에 만족하며 자신의 삶을 넘어서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들, 자신과 타인 그리고 자연의 관계를 성찰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타인에 대한 군림도, 자연에 대한 지배도 생겨날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보편화되면서 농경사회는 급속도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토지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개인들에게 남겨진 것은 오직 자신의 몸(=노동력)뿐이고 이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서 얻은 임금(화폐)으로 다시 자기에게 필요한 재화를 구매·소비하게 되는 생활양식이 시작된 것이다. 생산, 유통, 소비 과정이 분화되면서 인간은 세계의 총체적 관계망을 인식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제 ‘몸’ 하나 챙기기 급급해졌다.

교육의 의미 역시 일상의 삶터와 분리되어, 학교라는 공간에서 표준화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증을 획득하는 것으로 재규정되었다. 사회적으로 ‘직업’이라는 개념이 놀라울 정도로 분화되었고 근대 학교 교육은 궁극적으로 학생들에게 임금을 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직업훈련이라는 특성을 다분히 지닐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학교에서 인문학적 지식과 소양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한국의 현실을 떠올려본다면 교과 학습이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이어지지는 않는 듯하다.

교육의 목표가 특정 방향의 전문가들을 키우는 것으로 한정되는 것, 이는 곧 ‘근대인’을 양성하는 과정이다. 근대의 산물인 학교에서 가르쳐지는 교과를 통해 근대적 지식을 학습한 인간들이 바로 ‘근대인’이다. 우리는 학교를 다니면서 12년에 걸쳐 수많은 교과목을 학습하고 방대한 양의 지식을 접한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 분과 학문을 전공하면서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 하지만 근대적 교육시스템의 과정 속에서는 자신의 삶 전체를 조망하고 성찰하는 인간이 되기보다는 특정 분야의 도구적 지식만을 습득하게 되기 쉽다. 장영란·김광화는 이를 두고 “교과서에서 3대 영양소는 배웠지만 정작 내 몸에 맞는 영양은 모르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교과서와 평화적 삶 사이의 건너기 힘든 강

교육과정은 교수자와 학습자 사이의 의사소통과정이고 두 사람 모두의 변화를 초래한다. 특정 공동체가 내부의 교육적 효능을 잃어버리는 때는 틀에 부은 듯이 고정된 방식으로 학습자와 환경이 조응하는 경우다. 의사소통은 정보를 주고받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의 경험이 공동 소유가 될 때까지 경험에 참여하고 경험을 변화시킴으로써 관계를 소통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교육이 촉발되었다면, 그것은 양자의 생각의 구조가 동일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서로의 경험과 가치관의 차이를 확인하고 서로 타협하고 협상하는 과정을 거쳐 공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 세상에 ‘완벽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곳은 군대밖에 없을 것이다. 그 곳에서는 모든 의사소통이 “예/아니오”로 명확하게 종결되기 때문이다.)

학습만을 놓고 보면 이는 매우 사적인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개인도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할 수 없고 늘 자신을 둘러싼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 의미가 발생되므로, 인간 행동의 어떤 부분도 완전하게 사적인 것은 없으며 그 의미는 사회적 맥락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나와 너, 나와 그것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경합하는 과정에서 학습의 의미를 찾는다면, 이때의 학습은 정희진의 표현대로 ‘의식화’가 아닌 ‘변태’의 과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는 나와 동떨어진 거대 담론의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평화는 갈등이 없는 무미건조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자극과 조건들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을 품고 내 자신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면서 매순간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평화적 삶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학습자로부터 하나의 고정된 진리로 인정받으려는 교과서와 평화적 삶 사이에는 쉬 건너기 힘든 강이 있다.

‘자유로운 개인’들을 만들어낼 교육적 상상력

1989년 전교조 교사들은 당시 교육법 제157조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소원 청구인들은 교과서제도가 국가의 관리 아래 놓여있기 때문에 교과서 내용 역시 국가를 위한 이데올로기에 좌우되고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정부는 교과서 국정제가 교육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제도라는 점과 1986년에 있었던 일본 교과서 검정제에 대한 합헌 판결을 사례로 들어 반박논리를 펼쳤다. 1992년 헌법재판소는 결국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듯이) 당시 교육법 제157조가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오는 동안 교육과정도 계속 변화를 거듭해 내년부터는 8차 교육과정이 실시된다. 교육부에서는 여느 때처럼 시대의 변화에 부합하는 교육과정을 편성한다고 말하겠지만 학교교육과 교과서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을 가진 자유로운 개인’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의 산물이 바로 학교 교육이지만 역사적으로 현실의 학교 교육은 자본과 국가 이데올로기의 파고 속에서 이상적 의미의 ‘자유로운 개인’들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표준화된 교육과정을 담아내는 활자화된 매체로서 삶의 맥락과 동떨어진 하나의 진리를 전파해온 교과서. 이 교과서를 평화의 눈으로 분석해보려고 한다. 더욱 세련되고 암묵적인 방식으로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현재의 교육체계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이 더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참고한 책>

고미숙(2007),《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그린비.
이인규(1990),〈교과서제도 위헌론의 쟁점〉,《우리교육》1990년 4월호.
이계삼(2008),〈이명박 시대를 맞이하는 마음〉,《녹색평론》2008년 3-4월호.
장영란·김광화(2006),《아이들은 자연이다》, 돌베게.
조한혜정(2004),《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읽기와 삶읽기》, 또하나의 문화.
한숭희(2006),《평생교육론 - 평생학습사회의 교육학》, 학지사.
홍순명(2006),《홍순명 선생님이 들려주는 풀무학교 이야기-첫째 묶음》, 부키.

덧붙이는 글
날맹 님은 '전쟁없는 세상'(http://withoutwar.org)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99 호 [기사입력] 2008년 04월 15일 21: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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