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리 2] ‘언니들의 집’, 어디에 숨었나

주거권의 여성주의적 재구성에 대한 소고

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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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집에서 시집으로, 여성은 집에서 집으로 이동한다. ‘때가 되면’ 여성은 결혼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당연하다고 세상은 말한다. 여성에게 ‘집’만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과연 여성의 ‘집’에 대한 권리란 무엇일까.


‘여성’이 보이지 않는 주거권

주거권은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주거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선언이다. 누구나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 권리가 있다. 아침식사를 하는 것에서부터 편안한 잠을 청하는 것까지 집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공간이다. 그러나 아내/어머니-여성에게 집은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공간이며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이불 호청을 빨아 햇볕에 내어 말리고 ‘섹시한 속옷’을 준비해야 하는 공간이다. 집이라는 공간을 짓누르고 있는 가부장제의 억압이 드러나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의 권리라는 집은 ‘어떤 사람’에게는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 되어버린다. ‘모든 사람’이라는 출발점은 쉽게 여성의 존재를 은폐해버린다.

위 사진:이 많은 집 중에 '언니들이 살만한 집'은 어디인가 <사진 출처: 건설교통부 홈페이지>


주거권의 침해가 사회화될 때도 마찬가지다. 지하 단칸방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가족, 비닐하우스에서 일 나간 부모님을 기다리며 놀다가 화재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 거리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지붕을 찾아 헤매는 노숙인들. 이들의 모습에서 여성을 보기란 쉽지 않다.

열악한 주거형태의 하나로 최근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쪽방. 인력시장 근처에 오밀조밀 모여있는 쪽방에는 주로 30~40대의 남성들이 산다. 노숙인의 대부분이 남성이고 쪽방 거주민의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사실은 마치 남성이 더욱 주거권을 침해당하기 쉬운 집단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비슷한 조건의, 또는 더욱 열악한 주거인 고시원, 식당, 찜질방 등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많은 여성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거권을 침해당하고 있다.


‘집’을 열어젖히다

근대사회의 형성과 더불어 강력하게 자리잡은 공/사 구분의 이데올로기는 공간을 철저히 성적으로 분할한다. 공적 공간으로서의 일터와 사적 공간으로서의 집은 남성과 여성의 공간으로 상징화된다. 여성에게 허용되는 공간은 가사노동이 이루어지는 집, 성적 노동이 이루어지는 티켓다방이나 성매매집결지와 같은 공간, 즉 ‘여성다움’이 수행되는 공간뿐이다. 그러나 이런 공간에서조차 여성은 밀려난다.

흔히 집은 일터에서 쌓인 피로를 풀고 휴식을 취하며 자신을 재충전하는 공간, 사생활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가사노동을 떠맡게 된 여성에게 집은 일터이기도 하다. 일터와 집이 분리되지 않음으로써 집은 여성에게 휴식을 취하고 재충전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성에게 허락된 공간이라는 집조차도 남성의 눈으로 설명될 뿐이다.

위 사진:지난 5월 가족안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주제로 열린 여성인권영화제 포스터


사생활의 자유는 어떤가. 남성에게 집은 폭력을 휘두르든 성희롱을 하든, 제멋대로 해도 아무런 개입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부부강간이 여전히 범죄로 인정되지 못하고 가정폭력 피해 신고율과 처벌 수준이 낮은 이유가 그것이다. 여성에게 사생활의 자유는 폭력에 홀로 노출당할 자유일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집’은 열려있지 않아

많은 여성들에게 집은 벗어나고 싶은 공간인 경우가 많다. 비혼여성에게도 마찬가지다. ‘언제 시집가느냐’는 성화는 집도 아니고 시집도 아닌 공간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 틈새를 비집고 여성은 ‘집’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비혼여성이 독립을 감행하기란 쉽지 않다. 남성중심적인 노동시장 구조에서 여성이 집을 홀로 장만할 만큼의 돈을 모으기도 어려울 뿐더러 곳곳에 잠재해있는 폭력의 가능성들이 여성이 홀로 살아갈 엄두를 내기 어렵게 한다.

혈연에 기반한 가족이 주택정책의 단위인 현실도 ‘집’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공공임대아파트의 입주자격은 무주택 세대주로 요약된다. 대개의 경우 남성이 세대주로 등록되고 세대주와 함께 사는 배우자나 자녀는 독립적인 세대주가 될 수 없다. 결국 무성적으로 보이는 무주택 세대주 규정은 여성의 권리를 박탈하는 요인이 된다. 물론 임시로 주거지를 옮기는 전입신고를 하는 등 비공식적인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주민등록 말소를 각오해야 하는, 그야말로 편법이다. 이혼이나 별거를 고려하는 기혼 여성이나 부모와 따로 살려고 하는 자녀는 공공이 제공하는 임대아파트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말인 셈이다.

보편적인 주택정책에서 주거권의 주체는 가부장일 뿐이고 집은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여성이 주택정책에 등장하는 것은 ‘미혼모, 성폭력피해자, 가정폭력피해자, 탈성매매여성’으로 호출될 때뿐이다. 주택매입/전세임대사업의 대상에 포함되는 이들은 모든 폭력을 견디며 살아남아 ‘피해자’가 되어야만 주택정책 안에서 시민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주택정책에 똬리 튼 가부장적 시선

주거의 질을 높이기 위한 지표라는 최저주거기준에도 가부장적 시선이 똬리를 틀고 있다. ‘가구구성별 최소 주거면적 및 용도별 방의 개수’는 ‘표준가구구성’을 설정하고 ‘침실분리원칙’을 둔다. ‘부부는 동일한 침실 사용’, ‘6세 이상의 자녀는 침실 분리’, ‘노부모는 별도 침실 사용’ 등이 그 내용이다. 침실을 ‘분리’하자는 원칙조차 부부는 ‘동일’한 침실을 사용하라고 한다.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오래된 외침이 무안하기만 하다.

모든 사람이 각자 하나 이상의 방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부부가 아닌 2인가구가 주택정책의 시야에 들어오지 못하는 문제가 남는다. 주택수를 가구수로 나눈 주택보급률도 ‘가족’중심적이다. ‘일반가구’에서 1인가구와 비혈연가구를 뺀 숫자를 분모에 넣는 것이다. 그나마 1인가구를 정책대상으로 하는 ‘단신계층용 임대주택’도 여성들을 밀어낸다. ‘노숙인, 쪽방거주자, 비닐하우스거주자 등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취약계층’으로 자격을 둠으로써 단신‘여성’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만 실행되는 정책이 된다.


다시 만들어야 할 ‘집’

많은 여성들에게 ‘독립’은 버릴 수 없는, 버려지지 않는 ‘꿈’이다. 여성이, 아내도 어머니도 딸도 아닌 온전한 개체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립은 단순히 혼자 사는 것만을 의미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존엄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데에 고갱이가 있다. 집은 자발적으로 형성된 공동체의 물리적 거점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주거권은 다양한 공동체(또는 대안가족)를 구성할 권리와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위 사진:여성에 대한 폭력 종식을 위한 국제앰네스티 캠페인


여성폭력의 종식도 주거권의 주요한 얼개가 되어야 한다. 유엔 사회권위원회의 주거권 일반논평은 ‘주거권이 개인의 프라이버시, 가족, 가정에 대한 자의적이고 불법적인 간섭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중요한 측면이라며 강조한다. 그러나 가부장의 폭력에 노출되기 쉬운 ‘집안’에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는 점이 더욱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점유의 안정성’이라는 주거권의 요소는 강제퇴거나 압박으로부터의 보호에 그칠 것이 아니라 ‘집안’에서의 폭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는 데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주거권은 집 안팎을 가로지르는 가부장제의 억압을 직시할 때에 비로소 ‘모든 사람’의 권리일 수 있다. ‘살만한 집’에서 살 권리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기 위해 여성주의적 재구성은 끊임없이 시도되어야 한다.
인권오름 제 9 호 [기사입력] 2006년 06월 21일 3: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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