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보자 폴짝] (1) 용기가 필요했던 순간

할머니랑 둘이 사는 명현이의 이야기보따리

김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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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내는 게 정말 가슴 떨리고 두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굉장히 즐거운 일이라는 걸 얼마 전에 나는 경험했어. 아참, 내가 겪은 일을 빨리 얘기하고픈 마음에 내 소개를 깜빡했네. 난 명현이라고 해. 키는 아주 작고 조용해서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려면 오랜 시간이 걸려. 그런데 학교에서 내 준 숙제 때문에 난 우리 반에서 갑자기 유명해졌어.


우리 집을 소개해야 한다니...

지난주에 선생님은 숙제 하나를 내주셨어.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함께 살거나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듣고 그걸 모둠별로 구연동화(*)로 만들어 발표하라는 거였어.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렸어. “우리 할머니는 시골에 계신데…”, “우리 동네에는 경로당이 없는데 어쩌지?” 하지만 난 걱정이 되지 않았어. 집에만 가면 언제나 나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할머니가 계시거든. 그런데 신나는 마음도 잠시. 갑자기 걱정이 생겨났지 뭐야. 나와 모둠이 된 동무들이 우리 집에 와서 우리 할머니 얘기를 꼭 듣고 싶다는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동무들에게 우리 집을 소개하는 건 나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어.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

몇 년 전 부모님이 이혼을 한 후 나는 엄마랑 같이 살았어. 하지만 엄마가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어. 그래서 2년 전부터 난 엄마와 떨어져서 할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어.

위 사진:<집으로>라는 영화 본 적 있니? 7살 꼬마 상우도 명현이처럼 할머니와 둘이 알콩달콩 살고 있었어.


처음부터 할머니랑 잘 지낸 건 아니야. 엄마와만 살게 됐을 때 아빠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생각에 가끔 슬펐어. 그런데 엄마와도 떨어져 지내야 한다고 하니 이번에는 엄마마저 나를 버리는 건 아닐까 두려워졌어. 그래서 처음에는 할머니가 무슨 말을 해도 잘 안 듣고, 엄마한테 가자고 떼도 많이 썼어. 그땐 정말 내가 철이 없었나봐. 다행히 엄마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나랑 할머니를 보러 왔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힘들 때 제일 먼저 엄마를 떠올리는 것처럼 엄마도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한테 도움을 받으려고 나를 보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우리 할머니는 은빛 머리를 항상 곱게 빗어 쪽을 찌고 계셔. 촌스럽다고? 그렇지 않아. 쪽찐 머리에 버선을 즐겨 신는 할머니와 있다 보면 과거로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빠지곤 하니까. 잠이 오지 않을 때에는 할머니를 졸라 옛날이야기를 듣곤 해.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로 시작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새 꿈나라로 가 있곤 해. 같은 이야기를 또 들어도 할머니의 이야기는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아. 참 신기하지? 그리고 “우리 똥강아지”하면서 내 엉덩이를 뚝뚝 치며 흐뭇해하시는 할머니를 보고 있으면 내가 정말 할머니한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도 들어 마음이 따뜻해져.


꾹꾹 눌러놓은 이야기

그런데 할머니랑 사는 게 다 좋은 건 아니야. 부모님이랑 살 때도 항상 행복하지만은 않았듯이. 어느 날 낮잠을 자고 있는데 할머니가 내 머리 맡에 앉아서 울고 계신 소리에 잠이 깼어. 내가 잠이 깬 걸 알면 할머니가 속상해 하실까봐 자는 척 눈을 꼭 감고 있었지. 할머니는 “아이고 불쌍한 놈, 불쌍한 놈”이라고 하시면서 우셨어. 내가 정말 불쌍한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 물론 엄마랑 떨어져 살아야 하고, 아빠 없이 지내야 해서 불편한 일도 있지만 그게 불쌍한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 사람들이 모두 다 다르게 생긴 것처럼 우리 가족도 다른 가족이랑은 좀 다르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위 사진:세상엔 정말 다양한 가족이 살고 있어. 혼자 사는 삐삐, 할머니와 사는 상우, 아들과 둘이서 사는 앨리슨 래퍼 아줌마, 그리고 양부모와 함께 사는 빨강머리 앤처럼 말이야.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아직까지 친구들한테 얘기하지는 못했어. 어떤 사람들은 우리 집이 ‘문제 가족’이라면서 자꾸 나쁜 말을 하거든. 그러니까 엄마, 아빠한테 사랑을 못 받아서 내가 문제아로 자랄 수 있다고도 하고, 가끔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싸우기라도 하면 부모가 없어서 애가 버릇이 없다며 할머니한테 막말을 하기도 하거든. 그럴 때면 너무 속상해서 울음밖에 나오질 않아. 그러다보니 친구들한테 혹시 이런 얘기를 하면 놀림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구.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숙제를 내주는 바람에 친구들이 우리 집으로 놀러오겠다고 했으니 내가 정말 난처하지 않았겠니?


으랏차차! 용기를 낸 순간

어떻게 할까 머리를 굴리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우리 반 진선이 이야기가 내 귀에 쏙 들어왔어. “우리 집에 가자. 할머니랑 나랑 둘이 사는데, 너희들도 깜짝 놀랄걸? 우리 할머니는 동화책에도 나오지 않는 옛날이야기를 정말 정말 많이 알고 계셔. 할머니한테 언제 가면 좋을지 물어보고 얘기해줄게.” 이야기를 듣던 동무들의 얼굴이 약간 놀라는 듯 했지만 진선이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걸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게 아니겠어? 난 정말 깜짝 놀랐어. 어디서 저런 용기가 나오는 걸까?

집으로 가는 길에 진선이에게 말을 걸어 보았어. 나도 진선이처럼 할머니랑만 살고 있다고 얘기를 했지. 진선이만은 나를 놀리지 않을 것 같았거든. 내 이야기를 들은 진선이는 이렇게 말했어. “나도 처음에는 너처럼 친구들한테 얘기하기 싫었어. 하지만 할머니가 그러셨어. 우리 둘이서 사는 일은 부끄러운 일도, 숨겨야 할 일도 아니라고. 누구랑 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보살펴주는 사람이랑 함께 사는 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말이야. 그 말을 들으니까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어. 물론 나를 불쌍하게 보거나 문제아처럼 보는 사람들 때문에 속상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이 창피하지는 않아.”

진선이의 말을 듣고 나니 아까보다는 조금 더 큰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어. 세상에는 우리 가족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진선이와 같은 동무들도 있다는 걸, 어떤 가족이든 소중하지 않은 가족은 없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리고 세상에는 나처럼 할머니랑만 살거나 아빠랑만 살거나 동무들끼리 사는, 정말 다양한 가족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

그런데 어떻게 유명해졌냐고? 숙제 때문에 집으로 온 동무들이 우리 할머니 옛날이야기를 듣고 모두 반해서 반 동무들에게 ‘명현이네 할머니는 이야기보따리 할머니’라고 소문을 냈거든. 물론 모든 동무들이 다 나를 부러워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할머니랑 단 둘이 살고 있는 명현이라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이런 생각도 해보았어. 진선이가 내게 힘을 주었던 것처럼, 나도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말이야.

(*) 동화를 사람들 앞에서 말로써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것
인권오름 제 10 호 [기사입력] 2006년 06월 28일 1: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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