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우의 인권이야기] 앞산꼭지들과 손을 잡자!

하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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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의 이로움을 추구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세상 만물 모두가 자신의 이로움을 추구한다. 때때로 그런 만물도 손해를 보는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만일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런 행동은 다른 윤리나 가치를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만물은 서로 어울리게 되고 그러다보면 그 자아의 경계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나’에서 ‘우리’로의 확장은 그 이로움의 범위 또한 넓히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 나에게도 이롭다는 깨달음은 서로 돕고 보살피는 ‘사회적 본성’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본성은 오랜 세월 동안 반복되면서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전통’과 ‘역사성’을 만든다. 함께 어울리며 웃고 울며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전통은 그렇게 오랜 세월을 거치며 생명의 유전자 속에 새겨져 왔다.
하지만 국가와 자본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생명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이런 사회적 본성의 전통과 역사성을 부정해 왔다. 누구나 자유로이 이용하던 나무숲이 갑자기 누군가의 소유물로 변하고 땔감을 마련하던 사람들은 도둑으로 몰렸다. 서로 필요한 것을 채워주며 소식을 나누던 장터는 돈을 내고 물건을 사야하는 거래의 공간으로 변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마을일을 논의하고 결정하던 마을모임이나 촌회는 사적인 모임으로 전락하고, 행정기관이나 공무원들이 마을일을 결정하고 집행했다.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은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며 만물의 관계를 끊고 힘과 지배의 논리만을 강요했다.
생존경쟁이 판치는 지구촌에서 살아남아야 하니 ‘이기적인 촌민’이 되어야 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정경유착을 넘어 CEO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나라, 한국에 사는 우리들에게 사회성은 케케묵은 ‘주문’처럼 들린다. 그러니 주문을 외기보다 국가나 자본을 길들여서 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더 현실적일지도 모르겠다.

선한 국가나 착한 자본은 없다!

하지만 그런 주장 역시 천상을 걷기는 마찬가지이다. ‘선한 국가’나 ‘착한 자본’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의 야수 같은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거버넌스와 협력을 외쳐도 국가는 사람들이 서로 돕고 보살피면서 자신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드는 걸 참을 수 없다.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과 사회책임투자(SRI)를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자본은 사적 소유권을 해체하며 공유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가만 두지 않는다. 그렇게 사람과 생명의 사회성을 부정하기에 국가와 자본은 민족을 끌어들여 끊어진 관계를 보충하며 경계를 쌓고 자신의 외곽에 민간단체를 만들어 자기 논리를 지지하게 해 왔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국가와 자본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이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을 길러 왔다. 학교와 대학은 사람들이 어릴 적부터 국가와 자본의 논리를 몸에 익히고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를 사회성을 망각하도록 훈련시켜 왔다. 울타리로 경계를 나누지 않으면 사람들이 공공의 이익을 이기적으로 악용할 것이라는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같은 이론들이 국가와 자본의 칭송을 받아 왔다. 모두에게 발언권을 허용하면 회의가 엉망진창 되거나 각자 자기 목소리만 높일 것이니 다수결로 결정하거나 대표자를 뽑도록 해야 한다는 정치논리도 마찬가지이다. 대중매체 역시 이런 논리를 끊임없이 전파할 뿐 아니라 혹시나 과거의 주문이 되살아날까 사람들의 귀를 꼭꼭 막는다. 안테나를 달고 사는 텔레토비 나라의 주민들은 반복학습을 통해 충실히 체제의 논리를 몸에 익힌다.
이런 현실을 변화시키려면 마법의 주문이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다양한 운동의 흐름이 있기에 언제나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뛰어난 활동가가 많다 해도 대중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이상, 대중이 자신의 본성을 재발견하지 못하는 이상 그 가능성은 피어날 수 없다. 국가와 자본에 공리와 계몽의 빛을 아무리 많이 쏟아 부어도 그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마법의 주문을 외며 대중과 함께 하는 몸짓 속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찾고 싶다.

힘내라, 앞산꼭지

지금 대구에서는 힘겨운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앞산꼭지(앞산을 꼭 지키려는 사람들, 앞산에 꼭지가 돈 사람들이라고도 불린다)들은 지난해 7월부터 대구의 앞산을 지키려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앞산터널은 사업이 3,300억 원을 들여 4.45km의 터널을 뚫고 10.44km의 민자도로를 건설하는 사업이다.
대구시와 시공사인 태영건설은 선사시대 유적지가 발굴되었음에도 터널공사를 강행하고 있다(대구시의 역점추진시책 중 하나가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사회 실현’이고, 태영건설의 경영원칙이 ‘성장과 안정의 균형적 추구’, ‘정직과 원칙의 실천’인 것을 보면, 역시나 선한 정부나 착한 자본은 있을 수 없다). 심지어 이를 막는 앞산꼭지들을 힘으로 제압하려 들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앞산꼭지들은 하모니카와 기타 반주가 어울린 작은 음악회를 열고 허무히 베어져 나간 나무들에게 용서를 비는 생명평화 100배를 하며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과 가을운동회를 열며 우정과 연대의 터를 다지고 있다. 이제 겨울철 칼바람을 이기며 나무들을 돌봐야 하는 앞산꼭지들과 따뜻한 온기를 같이 나누면 좋을 듯하다(앞산꼭지들의 블로그 http://apsan.tistory.com/).
우리가 연대의 손길을 나눠야 하는 이유는 이런 힘겨운 싸움이 앞산꼭지들만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산꼭지들과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는 언제라도 우리가 앞산꼭지의 처지에 놓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 결국은 나에게도 이로운 것이다. 이런 손잡음은 풀뿌리 민중이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도록 돕는 마법의 주문이다. 손을 잡자.
덧붙이는 글
* 하승우 님은 '지행네트워크'의 연구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129 호 [기사입력] 2008년 11월 19일 15: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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