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리] 먹고사는 문제가 바로 인권이다

이윤 추구의 경제 질서를 버리는 것이 인권의 실현

미류
print

경제가 위기다. 먹고살기가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먹고사는 데에 필요한 온갖 재화나 서비스가 적당히 만들어지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이용하기도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경제난국’을 극복하겠다며 이명박 정권이 쏟아내는, 거의 황당한 수준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는 대책들을 보면 도통 먹고사는 문제가 풀릴 것 같지 않다. 왜 그런가.
‘경제’가 어느 순간 사람살이와 동떨어져 굴러갔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문제는 인권의 문제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들을 적당히 누릴 수 있는지, 그런 질서를 누리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다. 낯선 영어 약자들이나 의미를 알기 어려운 숫자들이 사람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증폭시키는 가운데 사람답게 살기 위한 모색은 오히려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먹고 살기 힘들게 만들고 있는지 분명해질 때 대안이 모색될 수 있다. ‘인권’은 지금 우리가 더욱 부여잡아야 할 열쇠말이다.

부동산 거품에 기댄 ‘빚’ 상품들

인간의 삶이 더욱 나아질 것이라는 환상을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유포했던 신자유주의는 사망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라는 특정한 시대의 경제 기조가 드러낸 것은 자신의 모순일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이윤을 향해 달려가는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지금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촉발한 계기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론이다. 200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주식시장이 붕괴하고 저금리 정책으로 떠돌게 된 돈들은 부동산으로 몰려들었다. 부동산 거품은 부풀대로 부풀어 올랐고 여기에 기댄 금융상품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은행들은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주고 집값이 오르면 더 많이 빌려줬다. 그렇게 만들어진 ‘빚’들로 증권을 만들고 그 증권들에 대한 손실위험으로 다시 금융상품을 만들어냈다.

필요할수록 빼앗는 자본주의

부동산, 그 중에서도 주택을 매개로 한 각종 금융상품들이 빚에 대한 빚까지 ‘수익’으로 만들어내며 번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집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집 한 칸은 마련해 발 뻗고 누워보려는 마음이, 한치 앞도 내다보기 쉽지 않은 시장에서는 이윤의 제물이 될 뿐이다. 금융자본이 집을 담보로 “돈 좀 빌려가세요”라고 눈웃음칠 수 있었던 것은 집을 잃지 않기 위해 누군가 그 뒷감당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집을 구하기 위해 돈을 벌고 모으고 빌려야 했다. 아파서 약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 역시 빚을 내서라도 돈을 주고 사먹어야 했다. 석유나 식량이 투기 자본에게 매력적인 먹잇감이 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금융상품이든 사유화든 사고팔기 쉽게 약간의 손질만 거치면 시장으로 끌려들어가지 못할 것이 없어졌다. 땅이나 집, 물, 식량이 하루에도 가격이 급격히 오를 수 있는 황당한 현상이 경제‘학’의 상식이자 전제가 되면서 우리의 권리를 차압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론으로 낮은 신용 등급을 가진 노동자, 가난한 사람들의 대출은 쉬워졌다. 그러나 대출이 쉬워진 만큼 인권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인권침해가 보증되었을 뿐이다. 한국의 금융피해자 인권 현실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70년대 중반 이후 은행들은 가계 대출을 본격화하기 시작했고 한국은 IMF 경제위기를 거치며 신용카드를 남발했다. 빈곤을 저당 잡아 삶을 상품화한 것이다.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미래의 삶을 담보로 맡겼기에 신자유주의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필요할수록 빼앗아가는 구조,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다.
‘필요’를 담보로 빼앗긴 삶들은 빼앗을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 바쳐진다. 많은 사람들은 경기가 좋아져야 한다고 말할 때, 부자들이 돈을 많이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기업에 돈을 쏟아 부으면 그것이 흘러넘쳐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갈 것이라고 믿는다. 이와 같은 트리클다운(trickle-down) 이론은 이명박 정권의 대책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필요한 것일수록 빼앗아가는 자본은 필요한 것들을 흘려보내지 않는다. 달라는 대로 줄 수밖에 없는 세입자들이 있어 집주인은 자산을 마련하고 그걸 밑천으로 대출을 받아 투기에 뛰어든다. 약이 없어 모자감염과 빈곤에 시달리는 HIV/AIDS 감염인들에게서 취하는 폭리로 제약자본은 선진국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고혈압, 당뇨병 등의 치료제를 낮은 가격으로 대량 판매해 다시 이윤을 취한다. 가진 거라곤 몸뚱이밖에 없는 사람들이 자본에 고용되는 순간 몸은 남아나질 않는다.

자원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먹고사는 문제를 푸는 것은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의 문제다.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은 자원의 비효율적 사용을 극대화했다. 식량이 남아돌아 한쪽에서는 버리는데 어딘가에서 굶어죽는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집이 남아돌아도 집 없는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자원을 확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무분별한 파괴가 진행되는 한편, 감세정책과 같이 거두어 모아도 될 돈들을 오히려 특정 계층에게 나눠준다.
이명박 정권이 유동성을 증가시키려고 하지만 이미 부동산 거품을 통해 보았듯이 시중에 흘러 다니는 돈이 사람살이에 필요한 것들에 사용될 리 만무하다. 그동안 가난한 사람들이 사적으로 뜯겼던 돈을 이제 공적으로-세금을 통해 뜯기게 된 것일 뿐이다. 건설경기 부양책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사람들이 내쫓기는 것이 개발사업에서 발생하는 이윤의 원천이다. 그동안 주거권을 짓밟으며 날뛰었던 건설자본의 부실에 대한 책임을 다시금 짓밟힌 사람들에게로 전가하는 것일 뿐이다.
부동산 거품에 기생해온 금융자본이나 건설자본뿐만 아니라 모든 자본이 마찬가지다. 자본의 고용이 사람다운 삶을 보장하지 않는 것은 충분히 드러났다. 이윤 논리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자본은 고용된 노동자의 삶과 적대할 뿐이다. 고용창출 효과도 기대할 것이 거의 없지만 창출된 고용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불안정 노동과 노동빈곤의 양상을 통해 충분히 확인됐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건설경기를 부양할 자금으로 개개인의 주택담보대출을 갚고 은행에 공급할 유동성으로 가계부채를 갚고 은행의 지급보증 대신 노동자들의 임금을 보증하는 것은 어떨까.
부실한 금융자산이나 부동산 거품을 부풀리는 것으로 해소될 위기가 아니다. 비정규직이 확산되고 정리해고는 가속화될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를 풀기 위해 노동을 조직하고 사람살이에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는 기능을 시장이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은 앞으로 더욱 확연해질 것이다. 건강을 해치지 않을 노동환경에서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쉬면서, 생산과 분리되지 않은 사회적 관계를 조직하기 위한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

‘경제’와 ‘인권’은 다른 말이 아니다

물론 이때 인권담론도 재구성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와 함께 발전해온 권리체계는 재산권에 스스로를 귀속시켜버리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기업이 인격을 획득해 법인으로 격상되고 수많은 자유를 누리는 동안 정작 사람의 존엄은 하찮은 것이거나 ‘경제’보다 뒷전에 밀리는 것이 당연해졌다. 인권담론 역시 경제위기 국면에서 취약계층과 소수자들의 인권침해를 최소화하거나 사회보장을 강화하는 것에 제한되어왔다.
사람답게 살 권리는 절대로 먹고사는 문제와 다를 수 없다. ‘경제’와 ‘인권’이 구분되는 순간, 경제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것이 되어버린다. 자산으로서의 집이 거주공간으로서의 집과 분리될 때 집은 이윤 추구의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며 재산권은 주거권을 압도하게 된다. 노동이 생산 과정의 요소로서만 취급되고,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자아를 실현하며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해내는 권리로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인권의 실현도 불가능하지만 경제의 성장도 허상일 뿐이다. 자본주의가 발전시켜온 배타적 소유로부터,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먹거리, 물, 집, 교육, 문화 등과 그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생산수단을 되찾아 와야 한다. 일자리를 만들고 집을 구하고 먹거리를 길러내기 위한 경제 질서는 바로 인권의 문제다.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자립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초국적 금융자본을 토빈세 등으로 규제하거나 금융산업을 더욱 꼼꼼히 통제하는 것만으로는 경제 위기는 극복될 수 없다. 이윤은 자본의 존재이유다. 이윤율이 낮아질 때마다 끊임없이 변신하며 자구책을 마련해온 것이 자본주의의 역사다. 이윤에 의해 조직되는 경제 질서를 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를 확장하고 평등을 실현하는 길이다.
세계인권선언은 제28조에서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제시된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사회적, 국제적 질서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덧붙이는 글
* 미류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129 호 [기사입력] 2008년 11월 19일 17:18:57
뒤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