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욱의 인권이야기] ‘무오류의 체제’와 조각 맞추기

김영남 씨 모자 상봉을 둘러싼 논란을 바라보며

정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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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인권문제를 제기하면 인권문제는 있지도 않으며 있을 수도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사회주의는 완벽하게 인권을 보장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납북자 문제에서도 그와 유사한 얘기를 할 수 있을 법하다. 즉 북한에게는 납북자 문제 역시 있지도 않으며 있을 수 없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북한이라는 ‘훌륭하고 탁월한’ 체제를 거부할 수 없으며, 그 곳에 살기로 결정하는 것은 ‘필연적이고 당연한 선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사 어린아이가 당장은 싫어할지라도 그를 북한에 머물게 하는 것이 결국은 ‘그의 참된 이익에 부합하는 옳은 선택’이 되는 것이다. 그런 체제에서 모든 납북자는 ‘의거월북자’가 되거나 아니면 이번 김영남 씨가 주장한 대로 돌발 입북의 상황에서 북한에 남는 것을 ‘선택’한 자가 되어야 한다.


체제의 무오류성이 지배하는 사회

북한은 자신들이 추구해 온 사회주의 체제, 즉 ‘인간성이 완벽히 발현된’ 주체의 사회주의를 ‘착취와 타락으로’ 물들은 자본주의 사회와 비교하는 것 자체를 거부할지 모른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원흉’인 일본 군국주의와 미 제국주의 및 남한의 ‘식민지 파쇼’ 체제와 목숨을 걸고 투쟁하여 온 북한이 아닌가? 그들의 ‘배타적 자부심’과 ‘절대적 우월주의’는 그러한 고난의 역사에서 새겨진 피해의식의 반면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 ‘투쟁’이 현재진행형으로 있는 한, 내부적으로는 체제의 가치를 모르는 불평불만의 ‘반동분자’를 강제노동을 통해 개조시키는 것이 지당한 일이 되고, 외부적으로는 사회주의의 대의를 위한 것인 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와의 ‘전쟁 중’에서 ‘적국’의 몇몇 국민들이 납북된다고 하여도 그것은 충분히 양해될 수 있거나 나아가 오히려 ‘영예’로운 일이 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체제의 절대성과 무오류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각 개인의 삶은 이념이라는 커다란 그림의 조각 맞추기와 같은 것이 된다. 이념에 어긋나는 사실은 존재해서는 안 되거나, 아니면 그 이념에 맞게 자르고 붙이고 하여야 한다. 그것이 ‘순전한 사실’과 다를지라도, 그것은 그릇되거나 거짓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절대이념을 넘을 수 있는 진리란 있을 수 없으며, 그 이념을 보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엄중한 의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 근본주의가 그렇듯이, 모든 절대주의 하에서 개인의 진실은 위협받는다. 이는 단지 전제적 절대왕정, 현대의 나치와 일제와 같은 전체주의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아무리 체제의 이념이 인류의 이상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하여도 경직화된 체제, 즉 체제 안보가 지상과제가 된 곳에서는 각 개인의 진실과 인권은 체제유지와 국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종교적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는 물론이고 구소련의 스탈린 체제 및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에서도 그런 문제를 볼 수 있다. 한편 실제 현실이 그러한 절대적 이념을 쫓아가지 못하고 부적응과 문제점을 노출하면 할수록 그 이념과 체제에 대한 선전과 강요는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경향이 있다.


위 사진:14차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28년 만에 어머니 최계월 씨와 누나 김영자 씨를 만난 김영남씨가 6월 29일 금강산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출처: 국정브리핑(news.go.kr)>


가려진 개인의 진실

설사 정말 북한 체제의 현실이 그 이념처럼 탁월하고 훌륭하다고 하여도 청소년을 몰래 북으로 데리고 가서 남한의 가족들에게 일언반구 얘기도 없이 거기서 눌러 앉혀 살게 하는 것은 인권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무상의 대학교육 혹은 그 이상의 아무리 좋은 혜택이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사회적 조건이 개인의 진실을 대신할 수는 없다. 설령 북한의 체제가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남한의 청소년에게 북한에 대한 사랑을 강요할 수는 없으며, 그 청소년이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였다고 하여도 그렇게 강요된 사랑이 진짜 사랑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김영남 씨의 짧은 몇 마디의 말이 그의 진심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마지막에 보인 눈물이야말로 그의 진짜 마음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납북’된 청소년이 40대가 되어 성공한 인생으로 나타나 ‘납북’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만으로 그 인권문제는 끝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수십 년간 모친과 가족이 겪었을 고통, 김영남 씨의 인생에 새겨진 강제적 이별의 상처는 그러한 간단한 설명으로 아물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수십 년 맺힌 한이건만 현재 아들이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한 번 껴안아 본 것만으로 그냥 녹아내려 버리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만약에 그것을 부인하면서 김영남 씨의 가족에게 인권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까다로운 주문을 한다면, 그것 또한 오만한 ‘인권주의’이며 그러한 교조주의는 결국 다시 개개인의 인권을 수단화하고 처분 가능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어머니 마음을 모든 이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김영남 씨 모자는 극적인 상봉과 잘 살고 있다는 현재의 축복만으로 과거의 고통을 모두 묻어둘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요코다 메구미 씨 부모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더 어린 나이에 강제납치 당하여 결국 불귀의 몸이 되어버린 딸에 대한 그 부모의 원통함을 무엇으로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부모가 딸의 죽음을 계속 못 미더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메구미 씨 부모의 단호함과 집요함은 오히려 개인의 진실과 존엄에 부합하는 바가 있다.


일본의 인권의식은 높나

그러나 다시 그러한 메구미 씨 부모의 태도를 김영남 씨 모친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방북 상봉의 건에 대하여 김영남 씨 가족은 기꺼이 북한에 가서 김영남을 만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일본의 통역사가 사전 각본에 따라 북한에서의 상봉은 메구미 씨 부모와 상의하여 결정할 것이라고 그릇되게 통역한 것은 또 하나의 인권침해에 불과하다. 나아가 북한이 건넨 메구미 씨 유골이 판정불가를 넘어서 ‘가짜’라고 성급하게 발표하여 여론을 휘젓고 반북감정을 높여 일본 보수주의의 득세를 도모하는 일본 정치권이 인권과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국익과 정치를 위해 인권이 활용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울러 북한이 납북 일본인 문제에서 자백을 한 2002년 “북일 평양선언”에는 일본의 과거청산 문제도 언급되어 있다. 일본 자신은 청산할 과거가 없으며, 오직 북한만 청산하여야 할 과거가 있는 듯이 유세하는 것은 편리한 사고방식이다.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극심한 착취 속에서 혼백마저 이역 땅에 묻어 버린 이 땅의 수많은 딸 아들들을 잊을 수는 없다. 일본은 북한의 인권의식을 한심한 수준으로 볼지 모르겠으나, 일본의 인권 수준도 그보다 크게 높아 보이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정태욱 님은 아주대학교 법학교수입니다.
인권오름 제 11 호 [기사입력] 2006년 07월 04일 22: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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