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에 비친 인권풍경] 방학은 없다② 스펙도 인생의 로드맵?

입시생이 되어버린 대학생의 ‘스펙강박증‘

융(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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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예정자 H씨(27)는 군 제대 후 복학한 학교에서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살풍경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1, 2학년 때까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스펙 열풍’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너나 할 것 없이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적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H씨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언제부턴가 대학생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스펙’이라는 용어는 원래 컴퓨터와 같은 복잡한 전자제품의 사양을 일컫는 ‘specification’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이 가진 능력이나 경험치를 기계의 기능과 비교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하지만 이러한 스펙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대학생의 사정을 들어보니 그 상황이 더욱 암담할 뿐이다.


방학동안 주로 무얼 하며 시간을 보냈나? 다른 대학생 친구들은 어떤 것 같나?
학비조달과 생활비 마련을 위한 아르바이트와 토익공부를 하며 보냈다. 다른 친구들을 봐도, 졸업준비생들은 주로 도서관에 상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언제 처음 ‘스펙’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나?
스펙이라는 말은 제대할 무렵 처음 듣게 되었다. 마침 사회생활을 준비해야했던 시점이라서 더욱 관심이 갔던 것 같다. 용어가 참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제대 후 복학을 하고, 졸업이 다가오면서 학점관리나 토익점수에 대한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학생들이 쌓는 스펙에는 무엇이 있으며, 본인이 지금까지 쌓아 온 스펙은?
학점이나 토익, 어학연수가 주를 이루고, 그밖에 봉사활동이라든가 ‘이력서에 한 줄 더 쓰려고’하는 활동들이 많은 것 같다.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스펙에 대해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는 건 아니고, 쌓아 둔 스펙도 평균미달이다. 그러나 심리적 압박감은 똑같다.

“심리적 압박감”을 이야기 했는데, ‘스펙 강박증’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대학생들이 스펙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나다고 한다. 어떤가?
스펙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운 대학생은 아마 없을 것이다. 주변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토익이 900이 넘고, 학점이 3.5가 넘어도 굉장히 불안해하고, 해 놓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다른 활동을 더 해야겠다고 쫓긴다. 주변의 한 친구는 토익점수와 학점은 높은데 취업에서 몇 번 고배를 마신 후로, 끊임없이 스스로 자책을 한다. 스스로 너무 무미건조하게 살았다는 자책을 끊임없이 하더라. 그 친구를 자책하게 만드는 건 바로 사회시스템이다. 왜 스펙을 위해 좀 더 많은 활동을 못했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 것을 보면, 뭔가 거꾸로 됐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실제로 사회에서 스펙이 성공을 위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가?
취업에서 매번 낙방하는 사람과 한 번에 성공하는 사람의 차이는 사실 그렇게 크지 않다. 너도나도 모두가 스펙에 목을 매기 때문에 변별력을 잃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다만 스펙은 성실성의 척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어폐가 있는 것이, 토익점수만 놓고 보더라도 어학연수만 한 번 다녀오면 점수 얻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학점 따는 것도 학비걱정 없이 아르바이트하지 않고, 학업에만 열중하는 경우가 훨씬 유리할 것이다.

스펙 쌓기 말고 대학에 오면 꼭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나?
그냥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문제는 대학에 와서도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던 것 같다. 대부분의 한국 대학생들은 아예 하고 싶은 게 거의 없는, (삶의 진로에) 무비판적인 경우가 많다. 자기만의 열정을 가지고 오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얘기다. 그럴 수 없게 만드는 교육체계가 문제다. 점수에 맞춰서 대학에 오고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다시 또 분위기에 이끌려가는 분위기다. 이미 우리나라는 초등학교부터 정해진 인생의 로드맵에 맞춰가는 시스템이지 않나. 힘들게 공부해서 대학에 오고나면, 졸업 후에 대기업 취업해서, 좋은 배우자 만나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그런 정해진 길을 따라가게 된다. 중고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정말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을 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해야만 하는 일’은 많은데 ‘하고 싶은 일’은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하고 싶은 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제로 무조건 하라고 하면 차라리 저항이라도 할 텐데, 자유롭게 살라고 하면서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데 자유롭게 살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방법은 딱 두 가지이다. 첫째, 순응하거나, 둘째, 아예 인간관계를 모두 끊어야 한다. 대개는 순응하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용기를 내서 거기에 저항하려해도 힘들다. 주변에서 가만두지 않기 때문이다. 억압당했다고 느끼는 개인은 많은데, 그런 집단이 모여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는 분위기 무섭다. 이민을 고려하기도 한다. 최소한 1, 2년 하거 취업을 위해 노력한 후, 그래도 안 된다면 이민을 갈 생각도 있다. 이미 대기업에 취업한 친구도 몇 년만 참고 차라리 이민을 가고 싶다고 하더라. 이런 경쟁시스템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적어도 각자의 삶의 방식이 존중되는 곳에서 살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의 대학생은 고3과 다를 바가 없다. 내신=학점, 수능=토익, 특기활동=기타 스펙. 결국 고등학교 때 미친 듯이 대입준비하려고 경쟁했던 것처럼, 취업도 마찬가지다. 대학도 sky로 서열화 되어 있듯이, 기업도 서열화 되어 있고, 거기에 점수(스펙) 맞춰서 입학 하는 거랑 똑같다. 이렇게 힘들게 입사해서라도 행복하면 다행인데, 그마저도 아니다. 적어도 나라가 젊은 사람들한테 ‘이민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게 했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마치고 H씨는 여담으로 캐나다에 체류했던 10개월의 생활을 이야기했다.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시간이었다고 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끊임없이 희생해야하는 한국인의 삶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더라고 했다.

'스펙’ 때문에 방학을 잃어버린 대학생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애초 인터뷰의 취지였지만, 문제는 대학생이 아니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대학생이 살아가는 방식은 결국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삶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우리를 길들여놓은 사회체계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직장인이 되어서도 그대로이다. “처음부터 없었던 인권, 그냥 계속 없을 뿐”이라는 그의 마지막 말이 더욱 쓸쓸하게 다가온다.

덧붙이는 글
융(Jung)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169 호 [기사입력] 2009년 09월 09일 15: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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