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호의 인권이야기] 내가 TV를 보지 않는 이유

TV와 문화적 권리

안태호
print
TV는 고약한 물건이다. 바보상자라 일축하기엔 그것이 가진 영향력이 너무나 크다. 또 그것은 단순히 ‘이데올로기 박스’가 아닌 사회적 내용이 드러나는 형식이기도 하다. 애써 외면하기에는 미련과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 공식적으로 드러내기가 꺼려지는 강력한 끌림)의 덫이 곳곳에 잠복해 있는 쾌락의 정원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세상을 지금과는 다른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TV는 양날의 검과도 같다. 그것은 기존의 통념을 반복하여 끊임없이 억압의 내용을 재생산하기도 하고, 조금씩 그 재생산의 구조에 균열을 내는 문제제기와 통찰의 지점을 담아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세상을 바꾸려는 이들에게 TV는 세상의 부조리를 읽는 강력한 참고서인 동시에 극복해야 할 현실이기도 하면서, 활용해야 할 도구이기도 하다.

TV와 변혁의 관계를 길게 논할 생각은 아니다. TV가 그만큼 양가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로 충분하다. 다만, 숱한 여론조사 결과 TV가 언제나 한국인들의 여가시간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수단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측면에서 TV와 문화적 권리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문화가 기본권 중 하나라는 것은 이제 상식에 가까운 말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종종 망각되고, 자주 주변화 되고 가끔은 의도적으로 무시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어떤 문화적 형식과 내용도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절대빈곤의 고통을 문화적 형식으로 덮으려는 위선적인 행태도 역사적으로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화적 형식이 다양성을 띠지 못하고 하나로 수렴되는 현상에 대해서까지 침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 보라. 인터넷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해 TV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그야말로 엄청난 시간이 TV라는 사회문화적 구성물을 만들고 소비하는 데 투입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를 단순히 사회적 자원의 낭비라고 일축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여가의 대부분을 TV를 보는 데 사용한다는 조사결과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이 순기능만을 갖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너무 자주 삶과 현실을 지워버리는 기제로 작용된다는 것도 문제지만, TV가 아닌 다른 종류의 문화적 가능성을 닫아버린다는 것 역시 심각한 문제다.

삶의 조건을 두루 살피고, 인간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문화예술 활동은 기본적으로 삶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것이 성공적이었는가의 여부를 제쳐두고 현실을 재인식하는 과정을 담아내는 것, 그를 통해 삶이 한 뼘이라도 달라질 계기를 주는 것이 문화예술 활동의 목적이란 이야기다. 물론, TV도 성찰의 포즈를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TV가 갖고 있는 막대한 영향력과 그 영향력을 구성하는 힘들을 생각해 볼 때, 이를 과장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TV를 보며, 복잡한 현실을 잊을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은 주장 이전에 압도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 그대로 권리로서의 구색을 갖추려면 보지 않을 권리, 다른 문화적 산물을 접할 권리, 스스로 문화적 활동을 만들어 낼 권리가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선택지가 없는 지금의 상황, 압도적인 물량공세로 인해 TV말고는 다른 종류의 여가나 문화적 활동을 상상해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이것이 권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라면을 예로 들어보자. 집에 신라면, 너구리, 삼양라면, 맛있는라면, 해물짬뽕, 짜파게티, 열라면, 스낵면을 비롯한 국내에 출시된 모든 라면이 박스채로 쌓여 있다고 하자. 다른 음식은 전혀 없이 라면만 먹고 살아야 한다면, 그것을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채로운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도로 라면’이라는 단일한 현실은 그저 악몽일 뿐이다.

나는 그 권리를 포기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물론, 이것은 일종의 역편향이다. 현명하고 슬기롭게 TV를 활용하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다. 사실, 그것이 균형감각을 가진 이의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자신(TV를 보며 나 자신의 문화적 활동을 방어해 낼 자신)이 없기에 TV라는 ‘또 하나의 현실’을 포기해야 했다. 이것이 내가 TV를 보지 않는 이유이고 TV가 문화적 권리와 강력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덧붙이는 글
안태호 님은 예술과 도시 사회연구소 연구원입니다.
인권오름 제 198 호 [기사입력] 2010년 04월 14일 15:46:29
뒤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