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자의 인권이야기] “저기요, 이쁘게 생기셨으면 제가 오해 받을 뻔 했어요.”

김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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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권오름> 원고를 부탁받았을 때 내가 제일 우려한 건, 딱히 인권단체에서 일해본 적도 일하는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나를 봤을 때 ‘인권’에 대해 그다지 높은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생각한 게 생활 속 인권이야기이고, 매일같이 3-4시간을 보내는 지하철이야말로 각종 인권문제의 발생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주 역시 지하철 스토리!

지하철에서의 일이다. 모임이 있어, 거의 막차를 탔다. 막차가 늘 그렇듯 사람이 가득 찬 지하철은 술과 각종 안주, 사람들의 채취가 뒤섞여 있었다. 자리를 찾지 못한 나는 한 쪽 구석에 서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만원 지하철로 30여분을 서서 가다보니 정말 머리, 어깨, 무릎, 발, 허리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그래도 인내의 시간이 지나고, 목적한 정류장이 두어 개 정도 남았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나를 확 미는 것이었다. 놀라 뒤돌아보니,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술에 잔뜩 취해 흐느적거렸다. ‘뭐, 술 취한 사람 한두 번 보나. 내가 참자’ 하고 출입구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음악을 듣고 있었고, 이제 지하철은 내가 내릴 정류장으로 막 출발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이번엔 거의 고의적이라 생각될 만큼 누군가 뒤에서 나를 안듯이 밀쳤다. ‘앗!’ 외마디를 지르며 뒤돌아보니, 또 그 남자, 아니 그 놈이다. 순간 “뭐하시는 거예요?” 하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그 놈은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미소를 보니, 기분이 확 상한다.

“뭐하시는 거예요? 아까도 미시더니 왜 이러시는 거죠?”
그러자 거의 취해 눈도 못 뜨면서 손짓으로 나보고 이어폰을 빼보란다.
“네. 뭐요.”
“저기요, 미쳤어요?”
“뭐라고요?”
“미쳤냐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아니, 사람들이 날 미친 줄 알아요. 오해하지 마세요. 오해하는 거 같아서 말하려고 간 건데, 하필이면 너무 문 앞에 바짝 서 계셔서.”
술 취한 놈의 특징.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 예~. 알았으니까 내리세요.”
“아뇨. 사람들이 날 미친놈인줄 알아요.”
뭐한 놈이 성낸다고, 적반하장 수순이다.
“알았다고요. 알았으니까 내리세요.”
그러더니 오히려 언성을 높이며 한 마디 한다.
“아니요, 사람들이 날 미친놈인 줄 안다고요.”
어라, 이제 언성까지 높여? 안되겠다 싶었다. 조용히 넘어가려 좋게 말했더니, 취중에도 내가 여자라 만만한가? 좋아~ 나도 언성 높일 줄 알거든!
“알았다고요! 입장 바꿔 생각해보세요. 전요, 놀랐어요. 아까도 제 등 뒤에서 절 미시더니, 이번에 쫓아오셔서 절 뒤에서 껴안으시듯 미시니 안 놀라요? 그래요. 말씀하신대로 제가 오해했어요. 그리고 놀랐다고요!”
“아~ 네~ 끅~ 미안합니다. 저는 아무 뜻 없었어요.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데요, 끅~ 오해하신 거예요. 정말이에요.”
“네. 알았어요. 아무 생각 없으셨는데 제가 오해했어요. 놀랐고요. 그러니 이제 내리세요.”
이미 이성적인 사리 분별이 어려운 상황, 뭔가 망신스러운 자신의 상황을 수습하고 싶었는지 그 놈은 잠시 후, 출입문이 열리자 출입문 한 번, 나 한 번, 또 출입문 한 번, 나 한 번을 바라보다 이윽고 출입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필살기(?) 한 마디를 던진다.
“저기요, 이쁘게 생기셨으면 제가 오해 받을 뻔 했어요.”
그리고 문이 닫혔다. 집에 와 식구들에게 이야기하니, 첫 마디가 “상처 받았겠네” 한다. ㅋㅋ 그 말에 더 상처받거든!



기죽은 회사원의 전형, 흐트러진 머리, 추레한 양복, 초점 잃은 눈빛에 술까지 취한 그 남자는 그 와중에도 ‘난 안 이쁜 여자는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안 하거든’ 하는 성관련 치한들의 전형적인 발언도 빼먹지 않았다. 그럼 예쁜 여자는? 완전 잠재적 범죄자다. 여하튼 그 남자는 스스로 자초한 망신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티끌만한 체면을 지키고, 여성인 내 자존심에 흠집을 내기 위한 언행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다, 요즘은 나를 포함해 그런 외모에 대한 발언 따위로 자존심에 영향을 입을 여자는 거의 멸종 수준일텐데…….

“솔직히 제가 술이 좀 취해 몸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했다면 오히려 ‘OK!’ 믿어주었을 텐데. 흔히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후, 발뺌을 위해 남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말 중 하나가, “나는 눈도 없냐. 내가 어디서 저런 여자를” 따위의 말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런 발언이 자신의 불의를 부정하고, 희미한 자존심이나마 지켜준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유치 빵꾸똥꾸다.

언젠가 한 케이블 TV 프로그램에 나온 남자 출연자에게 여자 진행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언제 여자들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죠?” 다소 선정적인 질문에 그 출연자가 정확히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이런 뉘앙스의 대답을 했다.

“전, 24시간 모든 여자들을 만지고 싶습니다. 여자들은 어떤 외모를 지녔든 다 각자의 매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시간과 장소, 대상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거죠.”

그래, 하긴 여자인 나도 비슷한 마음일 때가 있다. 물론 모든 남자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수려하거나 준수한 용모를 지니거나, 개성 강한 매력남들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힐끗 힐끗 자꾸 훔쳐보고, 짧은 순간 그와의 로맨스를 꿈꿔보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듯 멋진 남자라 할지라도 상대방이 불쾌해 할 성희롱, 성추행 같은 것은 하고 싶지도 하지도 않는다.

혹여 술로 인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더라도 지하철의 그 놈처럼 하필이면 남자 등짝을 향해 쓰러지거나, 그에 대해 항의하는 남자에게 “저기요, 잘 생기셨으면 제가 오해 받을 뻔 했어요.” 이런 식의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왜? 매너가 굿이라서? (물론 굿은 굿이지 ㅋㅋ) 아직은 사회적 약자라서? 그래서 어떤 계기로 동화 ‘이갈리아의 딸’과 같이 여성이 사회적 강자가 되면, 지금과는 전혀 반대의 상황으로 바뀌게 될까? 잘 모르겠다. 과연 내 살아생전, 여성이 사회적 강자가 되는 날이 올지, 또 그래서 사회적 약자인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희롱, 성추행이 문제가 될 날이 올런지. 뭐 그 날을 고대한다는 건 절대 아니다. 한쪽이 강자이고 다른 한쪽이 약자가 되는 한 평등이나 평화 따위는 결코 오지 않을 테니까.

여하튼 유치하고 추레했던 지하철의 그 게슴츠레 남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자씨, 너나 거울 좀 보세요.”

덧붙이는 글
김옥자 님은 『갈라진 시대 기쁜 소식』편집인 입니다.
인권오름 제 204 호 [기사입력] 2010년 05월 26일 13: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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