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 공룡트림] 학교가 재밌어지려면

이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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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시절 목청 높이 부르던 ‘학교 종이 땡땡땡’은 참으로 끔찍한 노래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이 노래 가사에서 주어는 ‘학교 종’과 ‘선생님’이다. ‘주어’는 그저 문장을 만드는 한 문법적 구성 요소에 불과하기도 하지만, 행위 주체가 누구인가를 명시하는 부분이기에 무척 정치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이 노래를 부르며 주어인 ‘학교 종’과 ‘선생님’에 더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여기서, 어린이인 ‘우리’는 학교 종이 울리는 소리에 따라 선생님 앞에 서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호출된다. 이 조선 땅에 학교가 만들어진 이후 한 번도 바뀌어 본 적이 없는 법칙이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적지 않은 교사와 학부모들이 ‘학생인권’을 불편해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언제 어디서나 자신들의 ‘목적어’이던 학생이 어느 날 갑자기 ‘주어’가 되겠다고 하니, 어색할 뿐만 아니라 불쾌하다고 까지 여기고 있는 것이다. 쥘 르나르의 소설 『홍당무』(1894)에는 홍당무의 아버지가 “누구에게나 자기의 역할이 있는 법이다. 선생님이 교단에 서는 것은 연설을 하기 위해서지 네 연설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란다.” 라고 충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교사는 ‘말하고’, 학생은 ‘듣는다’는 위계질서는 확고한 것이니, 이에 따르는 것이 현명한 일이란 뜻을 담고 있다. 아니, 현명함이 아니라 ‘안전함’이란 말이 더 어울리겠다. 이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풍경인데, 21세기 우리의 현실과 너무 닮아 있지 않은가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소통이란, 말하고 듣는 것이 서로 섞이어 공존하며 하나의 물음을 만들어 내는 일인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갑갑한 노릇이다. 주어를 ‘책임’지는 사람은 어깨가 무겁고, 목적어를 ‘따라야’하는 사람은 발걸음이 무겁다.

그래, 그렇다면 그 주어를 ‘어린이’가 쥔다면 어떻게 될까?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안되지, 안 돼 하며 통통 튀어 날라 다니는 주어를 잡기 위해 저 멀리서부터 뛰어 오는 어른들이 보인다. 저 어른들이 우리를 붙잡기 전에 루이스 쌔커의 『웨이싸이드 학교 별난 아이들』(창비)과 오카다 준의 『신기한 시간표』로 어서 빨리 공간이동을 하자. 혹시, 마음이 바뀌어 손을 내저으시던 분도 그래 어디 구경이라도 해보자 싶다면, 언제나 환영이다! 책의 세계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아, 그리고 어른들이 열심히 놀아 보자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어린이들은 박수치며 널리 받아줄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이여, 절대로 놀이를 주도하고 결정하기 위해 떼쓰면 안 된다!!

재미가 만들어지는 구조 - 루이스 쌔커 『웨이싸이드 학교 별난 아이들』



역자 후기를 보니, 루이스 쌔커의『웨이싸이드 학교 별난 아이들』은 어린이들의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게 된 책이라고 한다. 어린이 책은 주로 어른들이 좋은 책을 고르고 그것을 중심으로 추천되고 유통되기 때문에, 아이들의 목소리를 알기 쉽지 않다. 어린이가 듣고 싶은 이야기와 어른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에, 양서로 꼽힌 스테디셀러가 어린이들이 사랑하는 책과 일치하리란 보장이 없다. 따라서 어린이들의 직접적 관심과 인기가 『웨이싸이드....』의 유통에 영향을 미쳤다면, 이것은 현실을 뒤집어 버린 특별한 일이 된다.

웨이싸이드 학교는 ‘학교’다. 주인공은 어린이‘들’이다. 한 반 어린이들이 모두 한 번씩 돌아가며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보통 학교와는 많이 다르다. 학교 교육이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안정적’이며 ‘안전한’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건물의 형태부터 뭔가 아슬아슬 하다. 한 층에 교실 한 개씩, 30개 층으로 ‘잘못’지어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더 좋아했’단다. 이유는 운동장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교실은 좁고 길어지고, 운동장은 넓고 풍요로워졌다. 현실의 학교를 휙하고 흔들어 새로운 형태로 뒤집어 꼬아 놀이의 공간으로 재조직해 놓았다. 아이들이 이러한 ‘비합리’의 세계에 폴짝 빠져들어 즐거울 수 있었다는 것은, 지루하고 획일적인 ‘합리’의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미국의 좌파 아동문학 연구자 젝자이프스에 따르면, 미국의 어린이들은 1등 국가의 1등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주문에 시달린다고 한다. 『웨이싸이드....』에 대한 사랑은 그런 씁쓸한 현실에 대한 반영이기도 하면서, 어린이의 소망을 충족해 주는 즐거운 세계의 발견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웨이싸이드 학교에서 어린이들이 주인공이 되기 위해 선행된 작업이 있다. 못된 고프 선생님을 사라지게 한 일이다. 고프 선생님은 아이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사과로 만들어 버린다. 컨닝을 하거나, 컨닝을 하도록 내버려두거나, 지각을 하거나, 선생님이 넘어진 모습을 보고 웃는다고 사과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모든 아이들이 사과가 됐다. 사과가 된 아이들은 분노하여 고프 선생님에게 뛰어든다. 사과소스를 만들어 버리겠다는 선생님과 결투를 벌인다. 결과는 아이들의 승리! 모두 사람으로 되돌려지고, 고프 선생님만 사과가 된다. 자기 마법에 자기가 걸려든 꼴. 마침 지나가던 루이스 선생님이 배가 고팠는지 ‘사과’를 아니 ‘고프 선생님’을 슥슥 닦아 먹어 버리면서..... 결투는 막을 내리게 된다. 못된 고프 선생님이 사라지고,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는, 아이들에게 친절한 것 같으면서도 불친절한 주얼스 서생님이 새로운 담임으로 들어오면서 아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자기 이야기를 펼치기 위해서 ‘강력한’ 힘을 제거했다. 고프 선생님 앞에서라면, 입을 다물거나 사과이거나 둘 중의 하나다. 이런 상태로 라면, 어떤 재미난 이야기도 만들어질 수 없다. 재미가 만들어지는 ‘구조’가 있는 법이다. 작가가 철저히 어린이 입장에 섰기 때문에, 만들어 질 수 있는 ‘구조’다. 교훈의 목소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른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 않기에 유쾌통쾌한 복수극과 난센스의 세계가 펼쳐질 수 있었다. 30개 층으로 된 별난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별난 아이들의 별난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나도 별난 거 하나 있어 하고 손들고 합류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웨이싸이드 학교 아이들에게 모두가 똑같이 공부하여 똑같이 1등이 되어, 똑같이 일류대학 가길 바라는 지금의 모두 똑같은 학교를 소개해 주면, 이렇게 말하겠지? “참 별난 학교도 다 보겠네!”

어린이의 마음 - 오카다 준 『신기한 시간표』



「하지 못한 말」이란 동시(강삼영, 『동시마중』창간호, 2010.5)가 있다. 복도에서 뛰며 장난치다 교장 선생님을 만나자, 이런 훈계가 쏟아진다.

“야, 너 이리 와 봐./ 6학년이 이러니까 / 다른 애들도 다들 뛰는 거 아냐 / 너 사람과 동물이 / 다른 게 뭔 줄 알아?”
‘뛰었다고 벌주는 거요.’

뛰고 춤추고 노는 것이 생명이 가진 본성의 한 영역이라면, 학교의 규율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어린이를 “동물과 비슷한 야만인으로 여기고, 어떻게 하면 문명화된 인간처럼 행동할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페리 노들먼, 김서정 역, 『어린이 문학의 즐거움2』)”하는 것이 이 시대의 확고한 법칙 아닌가. 질서를 잘 지키고, 예의바르고 착한 아이만이 어른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런 현실에서, 동시「하지 못한 말」은 ‘어린이를 길들여 문명화 시켜야’한다는 어른의 관점과 어린이의 마음이 어떻게 상충되는가의 지점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어린이의 마음에 다가가서 보면, 교실에서 뛰고 복도에서 뛰는 것이 죄가 될 리 없다.

오카다 준의 『신기한 시간표』의 ‘미도리’는 선생님 부탁으로 2층 교실에서 1층 양호실까지 가야 한다. 혼자 갈 수 있는 곳은 화장실뿐인데, 양호실을 가라니!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복도에 나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고 있을 때, 여러 가지 색으로 만들어진 바닥 타일이 눈에 띄었다. ‘초록색 타일만 밟으면서 가야지’ 초록색이라면 미도리 이름의 뜻이기도 하며, 가장 좋아하는 색이다. 검은 고양이까지 합세해 검은 타일을 밟으며 뒤따라온다. 어느새 타일 밟기는 게임이 된다. 미도리와 고양이가 신나게 뛰어 놀다보니, 양호실에 다 왔다. 게다가 고양이와는 친구가 되었고!

어른들은 종종 너무 쉽게 어린이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감당하지 못하면 노력하지 않는다고 용기가 없다고 나무란다. 많이 먹으면 많이 먹는다고, 적게 먹으면 적게 먹는다고 나무란다. 어른들이 요구하는 ‘어린이상’을 설정해 놓고, 그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 대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어린이의 욕구와 내면의 갈등은 쉽게 무시된다. 어릴 때가 가장 좋다, 걱정할 것 무엇이 있냐고 여겨 버리기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어른들 못지않게 어린이 역시 삶의 희로애락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다만 그 상황과 조건이 다를 뿐이다.

오카다 준은 그런 어린이의 마음에 훈계를 내리지 않는다. 양호실까지 무사히 가고 싶은 마음, 카레라이스를 한 그릇 더 먹고 싶은 마음, 마룻바닥 사이에 떨어진 지우개 조각을 줍고 싶은 마음, 친구를 찾고 싶은 마음속에 곱게 다가간다. 갑자기 벌어진 마법 같은 일들에 대처해 나가다보면 어느새 카레라이스가, 치즈 한 조각이, 친구가 바로 눈앞에 짠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오히려, 어린이의 즐거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마음에 물음표를 던진다. ‘당신이 그들이라면 어땠을까’

위 사진:[설명] 나도 류이치처럼? 청소함 속에 들어간 마사코 선생님.


『신기한 시간표』의 마지막 편은 마사코 선생님이 주인공이다. 밤중에 홀로 남아 하루 일과를 정리하는데 낮에 있었던 일이 자꾸 생각난다. 모두가 건강검진을 받고 있는데, 류이치만이 보이질 않는다. 아무리 뒤져도 나타나질 않는다. 의사선생님은 기다리고 있고, 류이치는 나타나지 않아 마사코 선생님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 때, 교실 뒤편 청소함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다가가 보니,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류이치가 문을 열고 나타나서 V자를 흔들지 않는가. 류이치는 자랑스러워했고, 아이들은 웃어댔다. 단 한사람. 마사코 선생님만이 화가나 호통을 쳤고, 교실 분위기는 썰렁해졌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한밤중에 혼자 남은 마사코 선생님은 류이치가 자랑스러워하던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30년 전 나라면 어땠을까’, ‘내 몸무게도 견딜 수 있을까?’ 마사코 선생님도 청소함으로 쑥 들어간다. 2층짜리 청소함의 2층 칸이 자기 몸무게를 견딘다는 것이 놀랍다. 그 때 교실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와 ‘마사코 선생님’을 부른다. ‘이 나이에 청소함에 숨어 있다니, 들키면 이게 무슨 망신이야’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 갑자기 청소함 문을 열고 나간다면 니시무라 씨는 얼마나 놀랄까?’를 생각하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즐겁다. 그리고 결국, 씩 웃으며 류이치 처럼 승리의 V자를 날리며 청소함 밖으로 나온다. “이거 생각보다 재밌는데요?”

작가가 선생님을 청소함으로 밀어 넣어 우스운 장면을 연출한 이유는 뭘까. 어린이의 마음속으로 어른을 밀어 넣어, 어린이를 ‘주어’로 교실을 다시 돌아보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교사의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청소함 속으로 들어가 어린이의 입장이 되어 보니 보인다. 게다가, 마사코 선생님은 류이치와 같은 심정이 되어 승리의 V자를 흔들며 희열을 느끼지 않았던가. 류이치의 즐거움을 공감하게 된 것이다. 학교종이 땡땡 칠 때, 선생님이 기다리는 학교 속으로 아이들이 구겨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어린이의 입장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시도를 반복하며 학교를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새 아이들보다 교사가 먼저 이런 함성을 지를지 모르겠다. “이거 생각보다 재밌는데요?”
덧붙이는 글
이선주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 입니다.
인권오름 제 226 호 [기사입력] 2010년 11월 10일 20: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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