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뚜의 인권이야기] 나는 난민입니다 (2)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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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기 힘든 날들

미얀마 새로운 독재자 서마웅 정권은 다시 선거에서 이기려고 이리저리 잔머리를 써서 선거를 치뤘다. 그러나 버마 국민들은 목숨을 걸고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에 투표했다. 선거에 민족민주동맹이 압도적으로 이기자 미얀마군 정부 안에 불안함이 일어났다. 결국 이들은 국민들이 목숨 걸고 뽑은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감옥에 넣어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정권을 다시 잡았다. 또한 그들은 국민들을 예전보다 더 감시하고, 어떤 정치나 복지 활동도 허용하지 않는 여러 탄압을 시작했다. 88민중항쟁 때 참여한 국민들한테도 다양한 탄압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무원인 우리 아버지가 해고당했다. 당시 버마에서는 한 가족에 한 명이 직장을 다니면서 온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도 가족 생계비가 충분했다.

위 사진:[그림: 윤필]

하지만 아버지가 해고당한 후 가족의 생계비 문제가 심각해졌다. 부모님은 대학 1학년인 나와 고등학생인 여동생 두 명에게 “아무 걱정 하지 마라, 너네들은 공부만 열심히 해라”라고 위로해주셨다. 그러나 부모님의 말씀이 고마울수록 가족의 생계문제를 공부 집중으로만 덮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밥을 먹으려고 밥통을 열었다. 밥통 속 밥을 보니 내 힘으로 만든 게 아니라 부모님들이 힘들게 일하셔서 생긴 밥이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 미안해졌다. 맘 놓고 밥 먹기가 힘들어졌고 밥 먹을 때마다 괴로움이 나타나 더 이상 창피해서 못 살게 되었다. 나도 가족들을 위해 돈 벌기를 결심했다. 하지만 나갈 때는 쉽고 들어올 때는 어려운 것이 돈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됐다. 일자리 찾기도 어려운 데다 힘든 일은 대학생인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쓸데없는 내 자존심 때문에 나는 일자리를 잘 구하지 못했다. 양심과 자존심 속에 헤매던 내게 어느날 한국으로 가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일했으면 월급을 줘야지

내가 한국에 들어온 1995년, 이주노동자들의 노동 환경과 인권상황은 참 열악했다. 뭐 지금도 똑같지만. 하지만 당시엔 이주민 지원센터들이 요즘같이 많지 않아서 우리는 어려움이 있을 때 친구들끼리 서로 도우면서 살았다. 그때 이주노동자들에게 임금체불, 사업장 폭행, 산재 무보상 등이 기본 어려움이었다. 우리는 공장마다 일일이 들어가서 일자리를 알아봤다. 하지만 일자리가 있다고 무조건 아무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공장 사장이 월급을 정말로 줄지 안 줄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공장에 아는 친구나 이주노동자가 일한 적이 있다면 월급을 주는지 안 주는지 알아볼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 달 일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한 달이 되고 월급을 받게 돼야 맘 놓고 그 공장에서 계속 일하기를 결정 내릴 수 있었다. 만약 한 달이 돼도 월급을 안 준다면 봉사해줬다 치고 정리해 나와야 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일이 힘드냐 안 힘드냐보다, 월급을 주냐 안 주냐가 우선이었다. 물론 월급을 한 달 밀려 주는 것이면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일해주기도 했다. 가끔 월급을 안 주는 공장에만 들어가서 일하게 되어 6개월 동안 월급 한 푼도 못 받고 봉사만 했던 친구들도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월 평균 70만 원을 받고 있었는데 이주노동자 두 명에게 월급 50만 원을 반씩 나눠 주겠다는 사업주도 있었다.

위 사진:[그림: 윤필]

근로 조건이나 사업장 내 한국인들과의 관계도 한국말을 잘 하냐 못 하냐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말을 잘하는 이주민들이 사업주 맘에 들지만 말만 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빨리빨리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일자리를 찾거나 알아볼 때, 사장에게 근로조건에 대한 요구를 할 때, 한국말을 잘 하는 사람이 나중에 문제가 덜 생긴다. 이주민들 사이에서도 한국말을 잘 하는 이주민을 많이 부러워하고 본인들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을 한다. 나는 공장에서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바보 취급당하기 싫어서 한국말을 5개월 만에 잘 할 수 있게 노력했었다. 내가 한국말을 잘 하게 되니 내 친구들과 다른 이주노동자들의 다양한 어려움들까지 해결 해 줄 수 있었다.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서 한국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한국사회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버마 안에서 하기 힘든, 인권과 자유를 위한 활동들이 한국에서 벌어지는 것을 눈으로 직접 봤다. 그리고 미등록 이주노동자이지만 법적으로 싸워서 자신의 노동권을 얻는 것을(물론 쉽지 않지만) 보게 되어, 그런 것이 가능한 민주주의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버마에서 ‘노동권’, ‘인권’이란 위험한 단어들이다.

나를 인권활동가로 만든 한국

내게는 도와 달라는 이주민들의 상담전화가 많이 온다. 대부분 임금체불, 사업장내 문제, 산재 무보상, 일자리 알아보기, 사장과의 근로계약, 어떻게 아픈지 말을 할 줄 몰라서 약국이나 병원 갈 때 통역을 도와 달라는 것 등이었다. 나는 이들의 요청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다가 한국 내 이주민들의 열악한 상황을 많이 알게 됐고 왜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일들이 생기는지 안타까워했다. 이미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은 왜 그들의 인권과 자유를 존중해주지 않는 건가. 따뜻한 방에 들어가면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따뜻해지는 것인데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고 보장하는 민주주의 국가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들은 왜 그런 것을 느끼지 못 하고 있는 건가.

위 사진:[그림: 윤필]

나는 이주민들의 눈물을 멈추게 하고 웃을 수 있게 하는 일에 빠졌다. 그들이 눈물 대신 웃음을 짓게 되는 걸 보면 나도 행복해진다. 이것이 바로 행복인 것 같다. 몰론 매달 부모님에게 월급을 보내 줄 때, 내가 보낸 돈으로 예쁜 옷을 사 입은 가족들의 사진을 볼 때 기쁨, 그것도 행복이지만. 나는 그렇게 이주민들의 어려움을 남 일 같지 않게 풀어가면서 분노, 안타까움, 슬픔과 기쁨 속에서 활동가로 점점 변한 것 같다. 만약 그때 이주민들이 기본적 권리를 누리며 살고 있었더라도 내가 오늘날처럼 활동가가 되었을까.

내 나라 버마의 상황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이미 한국에 와있는 버마 학생활동가들 덕분에 버마에서 구하기 힘든 버마 정치, 인권 상황을 알리는 소식지, 책 등을 읽게 되어 미얀마 정부의 아주 잔인하고 비인간적 행동들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놀랐고 슬프며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생겼다. 이들은 자기나라 국민에게 왜 이렇게 할 수가 있나. 여기 타국에 와 있는 우리도 기본적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데. 그래서 나는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에 조금씩 참여하게 됐다. 물론 나무도 열매를 맺으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내가 점점 활동가로 변해가는 것도 인식 개선에 따라 많은 시간이 걸렸다.

대규모로 시위해도 아무도 잡혀가지 않는 것으로 나를 부러워하게 했던 민주주의 한국, 이주민들의 인권을 존중해주지 않는 것으로 나를 마음 아프게 했던 한국이 나를 오늘날 버마와 한국을 위한 인권활동가로 만들었다. 여기서 나를 적극적인 활동가로 변하게 했던 것은 2003년 강제추방 반대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 농성장이었다. 한국 경제 밑바닥 일을 책임지는 이주민들의 꿈을 망치고 목숨을 빼앗는 강제 추방이라는 비인간적 제도를 반대하는 농성에 참여하던 중이었다. 자진 출국하면 다시 들어올 수 있게 해주겠다는 한국 정부의 불확실한 배려를 기회라 생각하고 자진 출국하기로 결정한 버마 노동자들에게 큰 문제가 생겼다. 미얀마 대사관에서 자국민들에게 요구한 거대한 세금, 거대한 비용이 드는 여권 재발급 요청이었다.

테러리스트가 되어버린 나

자국민들이 다른 나라에서 탄압당하는 것을 도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위기를 탄압의 기회로 잡은 미얀마 정부의 부하 미얀마 대사관의 행동을 참을 수 없어 나와 친구들(현 버마행동 한국 회원들)이 항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자신의 정부와 타국 정부, 두 정부의 탄압을 동시에 받게 되는 이주민들, 참 힘들었다. 미얀마 대사관은 미얀마 정부에 우리를 테러리스트로 보고했다. 대우 인터내셔널 가스 공사장을 폭파할 조직이라고. 참 이상하다. 3천 명의 국민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미얀마 정부, 이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외국 기업들과 나라들. 멈출 수 없는 욕심을 가진 이들이 이 세상에 당당하게 존재해서 우리가 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상황들을 해결하고자 나왔던 나는 테러리스트가 되어 이제 본국으로 들어가기 어려워져 위험에 빠졌다. 위험할 것을 모르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정의를 위해서 함께 싸울 동료들이 주변에 함께 있고 정의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들의 두려움을 이겨낸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끝나지 않은 싸움에 계속 참여하기 위해 많은 활동들을 해야만 했다.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국제 사회의 관심과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한국에 와 있는 우리는 한국사회가 버마의 민주화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게 만들어야 했다.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본인들이 체류한 나라의 관심과 지지를 만들고 있는 다른 나라의 버마 활동가들처럼.

나와 동료들은 그런 목적으로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하게 됐다. 난민 신청 후 우리는 집회, 기자회견, 세미나, 간담회, 행사, 공연, 음반 등을 통해 한국사회가 버마의 민주화에 관심을 가지게 노력했다. 활동 운영비를 위해 회원 모두가 매달 15만 원씩 내고 하루에 평균 15시간 공장일 하면서 남는 시간에 버마의 민주화 활동을 했다. 결과적으로 이제는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함께 활동하는 단체들과 동료들 그리고 이주민들과 버마인들도 많이 생기고 버마내부에도 활동가들을 양성해 다양한 활동들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됐다.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

하지만 법무부는 우리들의 활동을 소극적 활동이라며 난민 인정을 거부했다. 독재정권 하에 고생해온 한국이 소극적 활동은 위험하지 않다고 하는 게 참 이해가 안 됐다. 독재자들이 소극적 활동은 용납한다는 것인가. 민주화가 된 지 얼마 안 된 한국이 이 점을 잘 알 텐데. 외국에 단체 만들면 불법단체로 징역 35년, 블로그에 정부 풍자한 만화 한 장을 올려서 징역 12년, 국제노동기구(ILO) 관계자 명함을 가지고 있어서 징역 15년형을 시원하게 내리는 미얀마정부를, 법무부는 잘 모르는 것인가. 국제사회를 잘 알아야 하는 외교부에서 난민에 대한 일을 처리한다면 한국에서 난민 신청하는 이주민들이 이런 헛고생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우리는 법원에 법무부를 상대로 난민 인정에 대한 소송을 걸었다. 2004년 난민신청한지 7년 후 행정, 고등, 대법원을 거쳐 2011년 우리는 승소했다. 7년 동안 반정부 활동을 해야만 정치적 난민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한 민족민주동맹 회원들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물론 초기에는 이들도 법원에 소송하며 몇 년 후에 난민 인정을 받았지만) 난민 인정을 받지만 내가 활동하는 버마행동 한국 회원들은 난민 인정 받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심지어 버마행동 대표는 자기보다 늦게 난민 신청을 한 사람들이 인정받는데도 아직 결과를 못 받고 있다. 왜 그럴까? 법무부는 ‘여수 외국인 보호소 화재 사건’ 항의 성명서에 버마행동이 왜 참여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사람들을 조직해서 한국 사회를 흔들고 있는 당신들을 어떻게 난민으로 받아 주냐? 난민이라는 것은 우리랑 같이 살아도 된다는 뜻인데.”라고 말했다. 이런 법무부의 인식을 보면 우리가 난민 인정을 받기 어려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나라 사람의 인권만 인권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의 인권도 인권이기 때문에 우리는 국경이 없는 인권을 위한 활동을 했을 뿐이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같은 생명들인데 너 나를 분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7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려 대법원에서 난민 인정을 받게 된 후 나에게 “국내법을 잘 지키면서 한국에서 지내라”라는 메일이 들어왔다. 참 어려운 명령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인권을 존중하고 자유를 보장하는 법을 지키고 지내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지낼 것이다. 그런 행동으로 다가올 모든 상황을 당당하게 기다리며 살아갈 것이다. “사회 약자를 안아줄 줄 모르면 인권이 없는 사회다.”
덧붙이는 글
소모뚜 님은 이주노동자의 방송 MWTV 대표입니다.
인권오름 제 241 호 [기사입력] 2011년 03월 08일 18:3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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